우연, 만남과 인연을 잇는 끈
기쁨과 슬픔은 본래 같은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멈출 수 없었다.
논산 훈련소를 퇴소하니 군번이 새겨진 인식표를 받았다. 1363으로 시작하는 군번이 이제부터 주민등록 번호를 대신한다. 완전히 바뀐 낯선 환경은 내 안에 숨겨진 본모습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었다.
아버지, 어머니, 삼촌이 첫 면회를 왔을 때, 보자마자 반가움과 서러움이 뒤섞여 눈물이 터졌다. 군에 갈 때엔 무덤덤했는데, 나 스스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떠나보낼 때 우셨다. 다시 만날 때엔 웃으셨다. 아버지는 면회 마치고 집에 가시며 우셨다.
함께 살아온 가족인데, 울고 웃는 때가 다 달랐다. 의미들의 무게가 달랐기 때문일까?
12월 초, 자대 배치된 지 보름 남짓,
조 일병이 나를 힐끔 돌아보며 “어이, 신병!” 나는 관등성명을 목청껏 부르고, 냅다 그 앞으로 달려갔다. “이거 네 거야” 위문편지 한 통을 휙 던지듯 줬다.
수신: 국군장병 오빠께,
발신: 충북 단양군 매포읍 OO-XXX, 김경아
대개 학교에서 집주소는 적지 못하게 하는데, 주소가 있어서 신기했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 나와 여섯 살 차이였다. 다 커서 여섯 살은 큰 차이가 아닐지 몰라도, 대학을 휴학한 군인과 여중생이 체감하는 나이 차는 그보다 훨씬 컸다. 큰 기대 않고 답장했다. 흰색 편지 봉투 겉면에 군사 우편이라고 파란색 스탬프가 투박하게 찍혔다.
이 스탬프가 속 내용까지 국가가 공인했다는 어떤 신뢰를 주었는지,
며칠 뒤 답장이 왔다.
나는 매주 한 번 보낼 수 있는 군사 우편으로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답장도 계속 이어졌다.
부대원들은 서서히 부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편지는 군대 간 오빠가 중학생 동생한테 보내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내용은 거의 학교 시절 소소한 에피소드였고, 대학에 대해 물으면, 내 경험을 말해 주는 정도였다. 가끔 신앙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어느 날 아무 말없이 편지가 뚝 끊겼다.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왜 답장이 없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 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보다.' 그렇게 잊혀졌다.
몇 달 뒤, 경아에게 편지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봉투를 뜯으니, 어이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계셨죠?.
......
어느 날 갑자기 조 일병이라는 사람한테 편지가 와서 '원래, 편지가 자기한테 온 것이니, 앞으로 자기와 편지하자'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어요. 오빠도 같은 사람 아닌가 오해했어요.
한참 동안, 오빠한테 편지가 안 오니까, 아빠가 어찌 된 거냐고 물으셨어요.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죠. 아빠가 웃으시며,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하시는 거예요...’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나는 조 일병에게 저항은커녕,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절대 ‘을’이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그의 인격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인격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었다.
벌써 2년이 지났네...
군생활도 많이 익숙해졌다. 가끔 순서가 돌아오는 외박은 안 나간 지 오래다. 휴가 때 집에 가도 친구들 모두 군에 있으니 하릴없이 뒹굴거리다 복귀했다. 어느덧 군대가 집보다 더 익숙해졌다.
풍랑이 일면 이런 무료함이 그리움으로 바뀌는 것인가? 아버지가 실직해서 혼자 대구로 가셨다. 군에서 말년을 보내던 나는, 87년 6월 항쟁으로 실탄을 지급받고 24시간 비상 대기를 했다. 그 뒤로, 경아한테만 보내던 편지를 홀로 계신 아버지께도 보냈다. 아버지는 그때 병을 얻어, 이후로 직업을 갖지 못하셨다.
마지막 휴가 때, 경아를 만나러 갔다. 부대 앞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박달재를 넘었다. 제천에서 버스를 갈아타서, 단양 근처 경아 집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 됐다. 가는 동안 ‘아마 인연이 여기까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경아 부모님, 오빠들이 군복을 입고 온 나를 따뜻하게 맞았다. 초면이었지만 서로 친숙했다. 입대한 지, 한 달 여부터 시작된 만남은 제대를 눈앞에 둔 지금까지 약 2년이 넘게 이어졌다.
대화는 만남이었다.
마침 그날이 시골 교회 문학의 밤이었다. 늦가을 깊어 가는 시골 밤. 수십 년 전, 시인들이 노래한 고향 풍경이 내 안에 전해졌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바로 그 모습이었다.
교회 가는 길,
뜨문뜨문 떨어진 창문
새어 나오는 흐릿한 불빛,
하늘로 올라가는 뿌연 연기
까만 하늘에 퍼지는
불 때는 냄새,
멀리 개 짖는 소리
평안함, 적막함 -
조용한 파도처럼 서서히 강렬하게
들어와 덮었다.
그날 경아는 성극에서 에스더를 연기했다. 나는 경아 가족들과 함께 관람했다. 그 옆에,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여고생 수연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경아는 아내의 절친이었다.
제대한 다음날 2학년으로 복학했다.
올림픽으로 모든 군인의 제대가 2주 정도 연기돼, 가까스로 복학 마감 시한에 맞출 수 있었다. 경아와는 제대 후,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았다.
졸업 후 경아는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정형화된 삶이었다. 만남을 지속할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도 좋은 관계였다.
끊어질 듯 이어졌던 만남. 어떻게 인연으로 이어졌을까? 당시에는 모른다. 지나 보면, 우연은 필연으로 귀속되어 의미로 새겨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 꼭 일주일 후, 경아 결혼식이라고 연락이 왔다.
“오빠, 저 결혼해요. 근데 수연이 기억나요? 소개해 줄까?”
“그래? 좋지 뭐…” 아버지 빈자리가 아직 그대로 있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인사치레로 대답했다. 경아는 “오빠, 수연이한테도 말해 놓았으니 결혼식 때 같이 봐요” 재차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례식 때문에 내가 가야 하는 일본 출장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가서,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10년 만에 다시 본 수연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여고 2학년에서, 어느덧 20대 중반의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어, 참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얼떨결에 반말이 나왔다. 10년의 시간이 조금 낯설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10년 전, 시골 교회 문학의 밤에서 연극하는 친구를 내 옆자리에서 같이 보던 여고생. 이번엔 그 친구의 결혼을 곁에서 함께 보고 있었다.
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치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당시, 아내는 주안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같은 방향이라 자연스레 1호선 전철을 함께 타고 바래다줬다. 나는 다시 개봉역으로 돌아와 광명 집으로 갔다.
다음 주 토요일 다시 만나기로 한 그 약속 하나로, 일주일 내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우리는 결혼했다.
아내의 무의식 안에서, 군인 오빠와의 만남이 계속 이어졌을까? 만남은 무의식 속에서도 계속된다. 어쩌면 그게 진심이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다.
아내는 네 살, 한 살배기 두 딸 육아와 7년째 접어든 직장 생활로 꽤 지쳐 있었다. 셋째를 낳으면, 휴직하겠다고 했다. 교사는 3년까지 육아 휴직이 가능했다. 그러면, 나도 일 년 정도 쉴 계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12년간 쉼 없이 달려와, 이젠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눈앞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일 년간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고 싶었다.
몇 년 전, 속초로 휴가를 갔다. 한계령을 넘었다. 아버지와 설악산 갈 때 지나던 바로 그 길이었다. 한계령 입구에 오색 약수가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로 많이 붐볐다. 오색 약수는 유량이 적어 조금 큰 숟가락으로 샘물을 떠야 했다. 그래서 더 귀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한 숟갈씩 약수를 담아, 큰 물통에 가득 채웠다.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 입에 넣어 드리지는 못해도, 이 물을 드시고 낫기만 하신다면… 이 심정으로 한 숟갈씩 정성껏 담았다.
가족과 함께 있는 차 안, 좁은 공간에 사랑이 가득했고, 밖에는 아련한 기억이 자연과 합하니, 이 찬란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기쁨과 슬픔을 넘는,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울림이었다.
마음은 잠잠한데 눈물이 났다.
민박집 바로 앞에 바다가 있었다. 낮에는 파도가 넘실대며 소리를 냈고, 밤에는 멀리서 오징어 배의 불빛이 파도에 움직였다. 그곳에서 일 년 동안 빈둥거리며 사계절을 맛보고 싶었다. 그 뒤에도 계속 남고 싶으면, 택시 운전을 하며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미국에서 일할 생각 없냐고...
퇴근 후, 오랜만에 혁수를 종로 3가 호프집에서 만났다. 그는 몇 년 전 J기획으로 옮겼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별생각 없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에게 어떤 의견을 묻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속초로 떠나기로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그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부리 부리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져다 보며,
“야, 왜 안 가? 남들은 가지 못해서 난린데… 요새 영어 유치원이 얼만 줄 알아? 너, 애 셋이면, 애들한테 평생 선물 주는 거야. 나라면 간다”하며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무엇보다 ‘남들은 가지 못해 난리’라는 말이 귀에 들어와, 마음을 다른 곳으로 몰아갔다.
인생이 걸린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도, 내 형편과 바람은 무시하고, 타인의 욕망을 따라간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의논하니 "어디든 좋으니 떠나고 싶다"라고 했다. 전혀 예상치 않게 결정이 뒤바뀌었다.
한 달 뒤, 나는 인터뷰하러 미국으로 향했다. 입국장 벽면에 걸린 커다란 문구가 눈에 다시 들어왔다.
“Welcome to the United States.”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환영해 줄까…’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간단히 면접을 마치고 8월부터 일하기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표를 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중에 오기로 하고, 보름 뒤 나 먼저 미국 땅을 밟았다. 도착한 지 스무날이 지나지 않아 세상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2001년 9월 11일.
하늘에서 무너져 내린 불길과 먼지, 내가 간절히 바랐던 ‘환영’ 문구를 순식간에 낯선 두려움으로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