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정리, 시선의 확장

떠날 때 의미가 보인다.

by 물 긷는 자 연지신
떠나기 전에, 벌초하러 가요.

일요일 아침, 어머니 댁에 왔다. 다음 주면 미국으로 떠난다. 그전에 동생,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산소에 벌초 가기로 했다. 제수씨가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주었고, 동생 차로 길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돌아가신 다음 해에 내가, 동생은 그로부터 2년 뒤 결혼했다. 이제 어머니 자손은 며느리 둘, 아내 뱃속의 셋째까지 다섯이 늘었다.


아버지 생전 고향길엔, 늘 삼촌 두 분이 동행했다. 나는 운전하는 내내 그분들이 웃고, 큰 소리로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갔다. 대화 소재도 정치에서 어린 시절 추억까지 다양했고, 이야기는 도착해서도 쉼 없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병 중에 울적해하시다가, 삼촌들이 면 금세 환해지셨다. 형제간 우애가 참 유별났다.


“형님, 골말 고모님 있쟎쓰이꺄… 곧 돌아가실 것 같시다” 형제들이 모이면 바로 강화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다. 사투리는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시키는 힘이 있었다.

“우리 죽기 전에 큰 형님 산소를 찾아야 할 텐디…

형님이, 강화 제일 수재였쟎여. 배재학당에 다녔으니까…” 삼촌 두 분은 잠자코 있었다.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우리 삶도 이렇게 굴곡지지 않았을 것을…’ 모두 동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큰 형님이 휴가 나오셨지 잉. 그땐 휴가 때 총 들고 나왔다니께. 아 형님 가슴에 수류탄이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얼마나 멋지던지...”

큰 아버님은 625 전쟁이 터지자, 당시 의식 있던 학생들이 의례히 그랬던 것처럼 학도병에 지원했다. “휴가 끝나고 복귀하려는데...”

마을 어귀에서, 귀대하는 큰 아버지를 누가 총으로 쐈다. 하필 총알이 가슴에 달려있던 수류탄에 명중해서, 그렇게 처참히 가셨다. 그때 큰 아버지 나이 열여덟이었다.

몇 년뒤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아버지는 졸지에 모친과 어린 네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 됐다. 그때 아버지 나이도 열여덟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 산소에 도착했다. 작년보다 봉분이 더 낮아진 것 같다. 여기저기 아카시아 나무가 퍼져있다. 아무리 뽑고, 약을 쳐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토록 매혹적인 아카시아 껌 광고와는 완전 딴판. 지금 우리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목일 따름이다.

나와 동생은 금세 지쳐서 그늘에 앉아 있었다. 시골 바람이 살랑살랑 땀을 식혀주었다. 어머니는 쉬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봉분에 있는 잡초를 조심스레 뽑고, 군데군데 잔디를 옮겨 심는다. 마치 병상에 계신 아버지 머리를 빗겨 드리는 것 같았다.

애정의 농도는 함께 한 시간과 비례했다.





간호사 선생님!

갑자기 울컥하더니 아버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때, “아…” 하는 탄식과 동시에 병실 밖으로 뛰어나가 간호사를 불렀다.

황급히 달려온 간호사는 아버지를 보더니 곧바로 당직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도착하자마자 “생명 연장, 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거 한다고 오래 살아요?”

질문이 아니라, 체념이었다.


약 10여분 뒤, 의사가 병상 사이에 있던 커튼을 기계적으로 획 쳤다. 이 커튼이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해 놓았다. 의사가 뭔가 서류를 작성한다.


'아! ‘시체 검안서’라 적혀있다.'

아버지는 법적으로 사망한 시체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어… 어떻게… 이 양반, 불쌍해서 어쩌면 좋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끓어오르는 격정으로 숨이 멎을 것 같다. 남편의 굳은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직, 온기가 남았는데, 천으로 얼굴을 덮고 침대를 밀고 어디론가 가져간다.

거부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삼촌들과 고모들이 황급히 달려와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분들께는 형제의 죽음이 아닌 부친상이었다. 슬픔의 무게는 비슷했지만 모습은 달랐다. 고모들은 애통해했고, 삼촌들은 비통해했다.


“며칠은 더 사실 줄 알았어. 그때 일주일 만에 깨셔서, 한 삼일 정신이 왔다 갔다 했잖아. 그러다 정신줄 놓고, 느닷없이 찬송가를 불러서 이게 왠일이야? 한 거 기억나?"

“너무 시끄러서 아이, 좀 살살해요. 내가 아버지를 어린애 달래듯 했잖아.”

잊을 리 없다. 어머니는 엊그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듯 한다..




그거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오후 7시가 돼서, 어머니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함께 하며 어머니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몸을 씻겨 드리려고 했더니, 아 글쎄 등에 붉으스레 욕창이 생기려는 거야. 그렇게 샅샅이 씻겨 드렸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 몸에 욕창이 생기려 했던 것, 그것 만으로 아직까지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정성스레 봉분을 다듬으셨나!'

어머닌 아직도 아버지 머리를 빗겨 드리고, 얼굴을 쓰다듬고 계셨다. 오랜만에 갔어도 낯설어하지 않으셨다.


내가 쓰던 방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 낯익은 비디오테이프가 꽂혀 있다. 스티커에 ‘아버지와 설악산 – 1993년 8월’이라고 적혀있다. 아버지가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설악산에 함께 가서 찍은 비디오였다. 아버지 움직이는 모습이 담긴 유일한 기록물이었다.

빨리 돌려보니, 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얼굴이 검은 것을 보니 한창 항암 하실 무렵이었다.


문득, 아버지 모시고 항암 하러 갔던 때가 생각났다. 혼자 전철 타고 가신다는 걸, 마침 일요일이라 운전해서 모시고 갔다.

혜화동 서울대 병원까지 가는 내내 아무 말 없이 갔다. 안타깝고 가슴 아팠지만,

부모 자식 간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알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서로 어색했을까? 삼촌들한텐 전혀 그러지 않으셨는데…’

아끼고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은 우리를 허둥거리게 했다.


'내 맘 알지? 이제부터 이런 말 하지 말아야지. 말 안 하면, 나도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 잘 몰라.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새 굳어져 습관이 돼버리잖아.’


집에 가는 중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밥 먹었어요? 당신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일 건대”

“아니, 아직 안 먹었어.”


비디오 속 아버지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화면이 아닌, 함께 설악산에 갔을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파란색 반팔 티셔츠에 흰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등산화를 신고 계셨다. 여전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반가움에 가슴 시렸다. 희미했던 기억이 추억으로 돌아왔다.

제2 경인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창밖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아버지의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을까?

그분의 죽음으로 남은 형제들이 더 깊이 사랑하게 됐다면?...'

아버지의 죽음도 남은 가족들에게 그랬다.


의미를 모른다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죽음이란 참 이상한 괴물이다. 몸은 떼어 놓는데, 마음은 더 가깝게 한다. 신비였다.

죽음의 본심은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꼭 일주일 뒤, 경아 결혼식에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깊은 어둠을 걷어낸 찬란한 아침이었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아내가 활짝 웃으며 반겨 준다. 된장찌개가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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