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집착의 방정식
진 차장, 내 방으로 좀 와.
이 상무가 복도를 지나며 손짓하며 부른다. 습관적으로 의자에 걸린 재킷을 집어 올리고 급히 앞으로 갔다. 상사를 대하는 나의 정형화된 예의였다.
회사를 옮긴 지 7년, 전 직장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거기서 배우고 익힌 것이 습관으로 살아 있었다. 이런 자세는 태도로 이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흔히 있는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똑똑똑’
“들어와요”
문 열고 가볍게 목례하고 섰다. 이 상무는 안경 너머로 날 보더니, 신문을 내려놓았다.
“어서 와서 이리 앉아” 손을 흔들며 부른다.
그는 나를 꽤 흡족해했다. 무엇보다 실적이 뒷받침됐고, 나에 대한 광고주의 평판도 좋았다. 그들은 내가 한 일의 결과보다, 내 ‘태도가 좋다’고 칭찬했다.
“보름 뒤, 미국 출장이야. 나하고 둘, 광고주도 같이 가네. 이번에 가서 좀 쉬자고…”
광고 제작을 위한 열흘 간 미주 지사 시찰이라고 했다. 그는 쉬러 가자면서, 경쟁사인 A 애드도 함께 가니 신경 좀 쓰라고 한다. 이제 나는 그들과 한 공간에서, 열흘간 함께 붙어있어야 한다.
‘이 상무와 광고주, 경쟁사까지 동행하는 출장, 단순히 일에서 멀어진다고 쉬는 걸까?’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미국은 처음이라 설렘도 있었다
모두 오셨지요?
오전 아홉 시 반,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광고주 쪽에선 맹 상무와 이 부장, 우리 쪽은 이 상무와 나, 경쟁사 A애드에선 최 상무와 류 차장, 모두 여섯이 모였다. 최 상무는 그 회사 차기 사장감으로 거론되는, 업계에서 이름난 인물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자 그가 무심하게 손을 내밀었다. 눈길이 스치듯 지나갔다.
류 차장은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서글서글하게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그는 강남 출신이다. 심한 곱슬머리로 피부는 검고 까칠해서 미남형은 아니지만, 광고회사 직원답게 스타일은 꽤 신경 쓴다. 이에 반해 나는 이런 자리가 좀 어색하다. 낯가림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혼자 있는 게 편했다.
임원들은 비즈니스 석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이코노미로 갔다. 비행기 안에서는 좌석으로 계급이 극명하게 나뉜다. 모두 당연히 여긴다. 바로 옆 자리에 류 차장이 앉았다. 매번 승부해야 하는 경쟁사 직원과 바로 옆자리에서, 그것도 10시간 넘게 함께 붙어 있다는 것이 편치 않아,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꺼내 읽었다.
구약성서 이야기 - 광고를 제대로 하려면, 성경이 뭔지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사뒀는데, 정작 펴보지도 않았다. 그가 흘끔 책을 보더니, 불쑥 “어, 교회 다니세요?” 씩 웃으며 물었다. 표정과 말투가 전혀 의외라는 투여서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다.
“네. 다녀요.” 짧게 대답했다. 왠지 이마저 부인하면 신께 벌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교회에서 결혼식은 올렸지만, 내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가족 간의 정서적 유대를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약간 불쾌해서, 제대로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신이시여, 저 불신자를 벌주소서’
그와 말을 이어가는 것을 피하려고, 비행기 창밖을 내다봤다. 뜬금없이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어떻게 이 거대한 쇳덩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싣고
하늘을 날아다닐까?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한 사실
세상엔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벌써?
잠시 눈을 붙였는데, 어느새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낮 12시. 이코노미석은 탈 때도, 내릴 때도 늘 마지막이다. 짐을 찾고, 안내에 따라 입국 심사대로 가니,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내 바로 앞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혼자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 심사관이 그녀를 손짓하며 불렀다. 약 5분 뒤, 뭔가 미심쩍었는지 누군가 와서 데려간다.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 내가 입국 심사관 앞에 섰다. 내 여권을 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몇 마디 물었다. 석연치 않으면 바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압적인 태도였다. 그는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이 기회를 뺏기 위해 몰려드는 침입자나 불청객으로 보는 것 같았다.
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 출구 벽에 ‘Welcome to the United States’ 문구가 큼직하게 걸려 있다. 그다지 환영받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왔다. 10월 LA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끝이 안보였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압도적인 세계 최고로 알았는데, LA 하늘도 못지않았다. 약간 속은 느낌이 들었다.
11시간 거리에 내가 살고, 경험했던 곳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었다. 여기에 사람이 산다는 것 외에는 언어도, 문화도, 얼굴 색도, 집 모양도… 모든 게 달랐다.
마중 나온 현진수 과장은 현지에서 채용된, 미국 지사 광고 책임자였다. 그동안 함께 한 업무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처음 만났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통성명했다. 크지 않은 키에, 눈썹이 짙은 미남형이었다. 웃으면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것이 인상이 맑았다. 그는 아직 더운 날씨인데,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현 과장이 8인승 밴을 몰고 와서, 모두 한 차에 탔다. 맹 상무가 운전석 옆자리에, 다음 줄 창가에 이 부장, 그리고 광고 회사 두 임원이 차례로 옆에 앉았다. 나와 류 차장 자리는 맨 뒷줄이었다. 자연스레 서열이 정해져 있다.
현 과장이 맹 상무에게 “상무님,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묻자,
그는 “으응, 비행기 안에서 해서, 별생각 없는데.” 뒤 돌아보며 “식사하고 할까요?” 사실상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최 상무가 “저희도 별생각 없습니다. 바로 하시죠”
순간, 느낌이 안 좋았다. ‘뭘 바로 하자는 건가?’
약 한 시간 뒤, 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LA 지사로 향했다.
회의실.
벌써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다. 류 차장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TV 광고 썸네일을 펼쳐놓고 설명했다, 우리는 사전에 아무 언질도 받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이 상무를 보니, 약간 경직됐다. 류 차장은 힐끔 나를 보며 씩 웃는다. 그가 설명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회의가 끝나면 어떻게 할까?' 이 생각뿐이었다.
오가는 질문과 답변 내용을 보니, 사전에 충분히 조율이 돼있었다. 광고 제작을 위한 미주지사 시찰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하고 확정 짓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나자, 이 부장이 좀 미안했는지, “당신들은 그동안 많이 가져갔으니까, 이번에는 류 차장 쪽에 기회를 주자고” 어색하게 한마디 툭 던진다.
최근 연거푸 세 번 우리가 이겼다. 그래서 이번 미주 광고 제작은 저들에게 준 것이다. 이 말에 좀 위로는 됐지만, 이 상무는 여전히 찜찜한 눈치다. ‘이 양반 욕심은 끝이 없다…’
류 차장은 함께 온 이 부장과 맹 상무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런데 현 과장에겐 눈에 띄게 홀대했다. 그는 실질적인 미주 지역 광고 책임자인데 그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현 과장이 서서히 불쾌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 틈을 내가 치고 들어갔다.
류 차장은 현 과장이 결정은 못해도, 반대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안일함의 결과는 언제나 예상을 넘어선다.
휴식 시간에 휴게실에 혼자 있는 현 과장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과장님, 저희도 준비해 볼까요?”
“아니 왜 그냥 오셨어요?
“저희는 사전에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어요. 미주지사 시찰이라는 말만 듣고, 별 준비 없이 왔습니다. 지금이라도 준비할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하세요”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흔들었다.
곧바로 한국의 담당자에게 그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서 준비시켰다.
다음 예정지는 시카고였다. 현 과장도 함께 동행했다. 틈틈이 그에게 우리 쪽 진행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나는 수시로 회사와 연락하며 조율해 갔다. 낮에 씨어스 타워와 오대호를 둘러보고, 다음날 밤 뉴욕으로 향했다.
시카고 야경이 눈부시게 화려했다.
뉴욕 지사는 맨해튼 이스트 53번가에 위치했다. 사방이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한껏 자랑했다. 호텔은 그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겉보기와 달리 엘리베이터는 좁고 심지어 덜컹거리기까지 했다. 내부 인테리어와 객실도 꽤 낡았다.
맨해튼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곳에 이야기가 넘쳤다. 브로드웨이,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브리지, 한인들이 조다리로 부르는, 뉴저지를 잇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 할렘, 소호 거리, 자유의 여신상, UN, 영화 대부…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문득 엄숙함을 느꼈다.
맨해튼의 눈부신 업적이 아닌, 이야기를 만든 모든 이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뉴욕에서도 류 차장은 여전히 자기 식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현 과장의 마음은 더 멀어졌다. 멀어진 그 마음에 내가 들어갔다. 나는 호텔에 돌아와서 계속 한국과 일을 진행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이 부장이 “우리는 내일 LA로 돌아갑니다. 결론을 내려서 알려 드릴게요. 수고 많았어요.”
나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이 상무는 LA에서 광고주와 함께 골프를 친 뒤, 귀국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 현 과장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과장님, 내일 사무실에 도착하시면, 광고 썸네일과 브리프가 팩스로 와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이 이야기 나눴으니,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마음에 드시면, 저희 것도 설명해 주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버리세요.” 나와 그만 아는 비밀이었다.
돌아올 때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15시간 내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잠시 임원이 된 기분을 맛보았다. 여유만 된다면, 계속 비즈니스를 타며 이렇게 대접받고 싶었다.
며칠 뒤, 현 과장한테 전화가 왔다. 약간 흥분된 목소리였다.
“차장님, 잘 계셨지요? 보내주신 광고 안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이미 결정 났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세상은 내 생각대로 움직일 만큼, 수준이 낮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욕심을 내려놓을 때, 예상치 못한 더 큰 것으로 돌아온다. 매달리면 집착이 되어,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
현 과장이 “아, 참… 차장님, 혹시 미국에서 일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이 달 말까지 알려주세요.”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