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상대성의 남용 때문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질까?
진연우는 매장 입구에 서서 한 바퀴 시선을 돌렸다. 유리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박 부장은 손님들을 태우러 밖으로 나가고, 김 부장은 제품 배달을 준비 중이다. 다른 직원들은 구석구석 청소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의 아내는 직원들과 미팅하며 할 일을 점검하고 있다.
매장 안은 여느 때처럼 활기가 돌았지만, 연우 마음은 돌덩이를 잔뜩 쌓아 놓은 것 같았다.
“사장님, 커피 한 잔 하세요.”
직원이 갓 내린 따뜻한 커피를 가져왔다.
“아, 감사합니다.”
그는 가볍게 인사하며 커피를 받았지만, 시선은 계속 창밖을 향했다.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갈팡질팡 했다.
10년 전, 아내와 단둘이 작은 가게를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이 다섯, 매장은 세 배로 넓어졌다. 도면, 벽 색깔, 진열대 위치, 장식 소품 하나하나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했는데, 이젠 공구를 들고 직접 수리를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매장은 오렌지 카운티 한인 상권 중심부에 있다. 그곳은 하루 종일 차들로 북적이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모두가 눈독 들이는 좋은 자리였다.
일요일에 가게 문은 닫았지만, 이것저것 밀린 일을 하다 보면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했다. 그런데 정작 돈은 손에 잡히지 않고, 들어오기 무섭게 빠져나갔다. 언제나 그랬지만, 최근 들리는 뉴스도 온통 부정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의 지갑은 점점 더 얇아지고 자물쇠로 잠근 것처럼 굳게 닫혔다.
요새 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총판 사장 김정호였다. 좋게 시작한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뒤틀렸다. 최근엔 횡포가 노골적으로 더 심해졌다.
“진 사장, 이제부터 한 오더에 만 불 이상은 해야 그 가격에 줄 수 있으니 그리 알아요. 선 입금 후에, 창고에서 직접 가져가세요.” 연우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매번 당했다.
김 사장 역시 힘들기는 매 한 가지였다. 최근 한국 본사로부터 수입 물량을 두배로 늘릴 것을 통보받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제도 본사 임 사장에게 독촉 전화를 받았다.
“김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본사 임입니다. 사업은 여전하시죠?
요새 회장님 성화가 여간해야 말이지요.
앞으로는 물량이 두 배는 돼야, 총판 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고 하시네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도 판매 허가를 내주겠다고요. 중간에 저도 아주 난처합니다. 사장님이 양보 좀 해주세요.”
정호는 전화를 끊고 망연자실해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지금까지 내 돈 들여 마케팅해서 이 브랜드를 여기까지 끌어올렸는데, 독점 계약을 포기하라는 게 말이 돼? 이 영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제 와서 날름 먹겠다고? 이나저나 이걸 또 어쩌나…’
당장 구매 수량을 두배로 늘리라니, 도통 방법이 떠 오르지 않았다.
정호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10여 년 전 사업을 다시 시작할 때를 떠올렸다.
‘주주들한테 쫓겨나다시피 물러나고, 아무것도 할 게 없었지,
와이프가 부동산 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돈벌이가 되나?
겨우 P 냄비 회사에 들어가,
드센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눈칫밥 먹느라, 참 힘들었지.
내 나이도 이제 60이 넘었는데, 더 이상 실패는 안돼…
길은 찾으면 나오게 돼있어. 반드시 방법은 있어.’
정호가 P 냄비 회사에서 일할 때, 연우가 광고를 담당했다. 정호와 연우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P 냄비 본사 한쪽 구석, 허름한 정호의 사무실에 둘이 마주 앉아 고충을 나누며 서로 힘이 되었는데, 지금은 원수처럼 등졌다. 절박함은 숨겨진 민낯을 드러나게 한다.
연우는 정호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했고, 정호는 연우가 너무 자기 입장만 고집한다고 생각했다. 상대적이었다.
P 냄비가 폐업을 결정하며, 정호는 공중에 붕 뜬 총판권을 재빨리 계약하며,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연우의 아내가 새로 시작하는 정호의 매장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했다,
이래 저래 두 사람은 인연이 깊었다. 그 인연이 이제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번 틀어진 악순환의 고리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둘 사이도 그랬다.
“총판이 앞장서서 이렇게 가격을 흐리면, 대리점이 어떻게 영업합니까?”
연우가 어렵게 시정을 요구하면, 정호는 건성으로 받았다.
“아, 그런 일이 있었나? 알아보고 시정하도록 할게요.” 말뿐이었다.
하자 있는 물건을 교환해 달라 하면, 정호는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이런 걸 다 바꿔주면 어떻게 총판해요? 손님을 설득해야죠. 우리가 뭐 코스트코라도 되나?”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받아줬다. 안경 너머 그의 시선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눈빛에도 온도가 있었다.
연우는 이런 일이 세상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갑 을’의 역학이고, 자기 위치로는 절대 정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 원리였다. 이를 대신할 강력한 무엇이 내재되지 않으면 결코 변할 수 없었다.
처음 계약 당시엔 반경 10마일 영업권을 보장했지만, 계약서는 금세 휴지 조각이 됐다. 정호의 아내는 상도의와는 담쌓은 사람이었다. 연우 지역 손님에게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제품을 몰래 팔았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진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운해요.”
고객들 항의 전화에 해명하며 차액을 돌려주는 것이 일과가 됐다. 그는 점점 지쳤고 치가 떨렸다. '상황에 따라 누구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구나.' 그는 이제 이 말이 충분히 가슴에 와닿았다.
어느 날, 길 건너편에서 진짜 위기가 다가왔다.
“사장님, 저기 행사 보셨어요? 똑같은 물건을 엄청 세일해요?”
손님의 이 말에 연우는 얼어붙었다.
건너편 행사장은 음식 냄새와 확성기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 한쪽에는 연우의 지역 대리점을 축소판처럼 빼닮은 부스가 있었다.
정호는 대리점 마진을 영업사원 커미션과 파격 할인에 쏟아부었다.
김진 부사장과 그의 조카 성 부장이 판매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열기는 대리점을 집어삼킬 파도였다.
시장은 결국 가격으로 움직인다. 연우의 대리점은 풍전등화였다. 이 상태로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 보듯 훤했다.
정호는 ‘내가 잘돼야 모두 잘된다.’라고 믿었다.
그에게 모든 사람은 자기 성공이라는 태양을 도는 행성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거리낌 없이 잘라냈다.
그는 감정이 격해지면 눈물도 자주 흘렸다. 마치 ‘살기 위해 너를 잡아먹어서 미안하다’는 듯, 악어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연민이 아닌 자기 연민이었다.
행사장 한쪽, 정호 모습이 연우 눈에 들어왔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영업사원들과 농담을 나눴다. 손님이 부스로 들어오면 두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한마디라도 하면, 이제 연우는 욕을 퍼부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때, 정호가 시선을 돌리다 멀리 서성이는 연우를 발견했다.
잠시 시선이 멈췄고, 행사장 소음이 정지됐다.
웃음 가득하던 정호 얼굴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설득하듯, 숨을 고르며
“미안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이게 최선이야.
내가 무너지면 당신도 함께 무너져.
미 전역으로 사업이 뻗어나가면, 그때 더 큰 기회를 줄게. 지금은 고통을 나눠지자고”
그의 마음은 진실을 담지 못했다. 욕심만 담겨있었다.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 눈빛은 경멸에 차가웠다. 지금까지 분노의 뜨거움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연우는 그곳을 떠나며 다짐했다.
‘당신과는 여기까지야. 저 웃음 뒤에서 저들이 곧 살모사처럼 당신을 물어 버릴걸.
먹잇감이 없으면 자기 어미부터 물어뜯지. 당신도 결국 자기가 휘두른 칼에 베이고 말 거야.’
연우는 매장 한쪽 진열대를 정리하며 새로운 회사 제품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이제 렌탈 사업을 해야 돼!
정호는 매월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올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아다녔다. 마침 그는 한국에서 ‘대여 사업’이 열풍이라는 기사에 주목했다.
그는 ‘바로 이거야!' 하며 무릎을 쳤다. 그리고 프리미엄 정수기 렌탈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업에 전혀 경험 없는 생초보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전문가를 찾아 나선 끝에 김진 부사장을 소개받았다.
그는 W 사에서 미 전역에 영업망을 구축하고 운영해 본 전문가였다. 치밀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2년 동안 미국 주요 20개 도시에 조직을 구축했다. 영업 사원들의 그에 대한 신뢰는 회사에 대한 것보다 커서 그가 이동하는 대로 조직이 함께 따라왔다.
그는 오자마자 정호의 기대에 십분 부응했다. 자기가 관리하던 조직을 활용해서, 연우 대리점 지역 잠재 고객들을 공격적으로 잠식했다.
그런데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다. W 사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일쑤였다. 지나친 자기 확신은 다른 사람에게 오만함으로 비쳤다. 당연히 적이 많았다.
그는 영업 조직을 사조직처럼 끌고 다녔다. 회사를 옮기면, 함께 빼갔다. 옮긴 회사는 처음엔 환영했지만, 차츰 경계의 순위를 높였다. 진득하니 오래 다니는 회사가 거의 없었다.
이런 일은 재주 많고 꽤 많은 사람들에게 흔했다.
정호는 사업 경험은 풍부했지만, 이 분야만큼은 생초보였다. 그래서 김진 부사장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성향상, 그들의 결합은 처음부터 불안한 동거였다. 한번 균열이 가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성향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일은 부모와 자식 사이도 흔들리게 만든다. 하물며 그들은 이해관계로 급히 엮인 불완전 만남이었고, 게다가 돈이라는 비정한 변수가 그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진의 1차 공격 목표는 연우였다. 그래서 모든 영업 사원들에게 동일한 세일즈 멘트를 하도록 교육시켰다.
“본사에서 직접 구입하시는 것이 대리점보다 여러 가지 혜택이 많아요.”
“대리점을 운영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겠어요? 한 단계 더 거치는 거예요. 고객한테 불리하죠.”
연수라고 다단계 하는 사람인데,
좋은 제품 소개하고 싶대요.
“그럼. 뭐라도 해야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땐가?”
연우와 정호가 틀어졌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여기저기서 연우 매장에 자기 물건을 입점하려고 손을 뻗쳤다. 그중에서 특히 다단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연우도 틈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나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정호에게 기대할 게 없었다.
며칠 뒤, 연수가 한 여자와 함께 매장에 왔다. 그녀의 이름은 김정화였다.
스스로를 “다단계로 큰돈을 벌려고 미국에 왔어요.”라고 소개했다. 세련된 네이비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짧게 자른 커트 머리였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또렷했고, 단어 하나하나가 가볍게 튀는 공처럼 박자감이 있었다.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첫인상부터 노련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제야 뵙네요. 그동안 꼭 뵙고 싶었어요. 워낙 사업을 잘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해서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우는 별 기대 없이 미소로 답했다. 형식적이었다.
“네트워크 마케팅은 해본 적 없어요. 한국에서 암웨이 한다는 분들 얘기만 들었죠. 멀쩡히 좋은 직장 다니다가 그만두고… 결국 패가망신했다는 말밖에 못 들었어요.”
정화는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갖고 있는 듯했다.
“네, 그런 사례가 많죠. 그런데 정통 네트워크 마케팅은 전혀 다릅니다. 소비자면서 판매자가 되는 ‘프로슈머’ 개념이에요. 광고비 대신 사업자에게 이익을 나누는 방식이지요.”
연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똑같은 소리군…’
손끝으로 커피잔을 돌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보냈다. 대충 자리를 끝내고 싶었다. 그 순간, 정화가 휴대폰을 꺼냈다.
“사장님, 저는 이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6개월 됐어요. 이게 지난달 제 수당이에요. 보세요.”
화면 속 숫자들이 한 줄씩 눈에 들어왔다.
5월 3일 금요일, $4,752.25.
5월 10일, $5,426.05.
5월 17일,...
5월 24일, 5월 31일,...
한 달 총액이 2만 6천 불이나 됐다.
연우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손이 커피잔에서 떨어져 펜을 집어 들었다. 입금된 금액이, 마치 두툼한 현금 다발로 보였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한 달에 이 정도면… 렌트비 내고, 직원 월급 주고도 남겠는데…’
연우는 정화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표정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제 업라인이 뉴저지에 있어서, 도움도 거의 못 받고 이 정도 했는데, 사장님은 이 조직력에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까, 제 수입을 넘는 건 시간 문제지요.
네트워크 마케팅은 업라인의 도움과 제품력이 관건인데요. 이 제품은 세계에서 유일한 제품이에요. 이미 검증된 제품력, 이게 가장 강력한 무기죠.”
정화는 노련하게 연우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연우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꿈틀댔다. 정화에게도 연우의 영입은 커다란 기회였다. 지금까지 여기저기 떠돌이처럼 사람을 만났는데, 그럴싸한 베이스캠프가 생겼으니 날개를 달게 되었다.
연우의 합류는 상징적으로도 대단한 의미였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절실히 필요했다. 사업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마주해야 한다. 관계가 지속되고 굳어지려면 가치나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부모 자식 간이라도 금세 깨지는 것이 돈 문제인데, 정화와 연우는 눈앞의 필요 외에 공유하는 것이 없었다. 배경도 성향도 완전히 달랐다.
사무실 안이 갑자기 웃음으로 가득했다. 밖에 있던 직원들이 사무실 안을 힐끔힐끔 엿봤다. 그들도 함께 안도했다.
이제 연우의 관심은 정화가 소개한 SD제품에 집중되었다. 당연히 정호 회사 제품 판매는 눈에 띄게 줄었다. 매출이 줄었으니, 당연히 수입도 줄었다. 연우는 비용 지출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숨만 쉬어도 다달이 약 25,000 불이 필요했다. 지금 수입으론 이 비용을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이제 대리점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그만둘지 결정해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창밖에는 오후 햇빛이 느리게 기울고 있었다.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매장 안을 채웠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니, 탄식 같은 독백이 나왔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직원들이 인사하며 하나 둘 퇴근했다. 그의 아내도 애들 때문에 먼저 집에 갔다.
이제 매장 안에는 불도 꺼지고, 문도 잠겼다. 매장 뒤쪽 그의 사무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애국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 기업을 크게 해서 일자리를 만드는 사람이야. 운이든, 노력이든, 타고난 재능이든, 성공을 일군다는 건 대단한 일이야. 존경스럽지.’
인사하던 직원들 모습이 떠올랐다.
‘내일 뵙겠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저들은 여기 그만두더라도 잘 살 거야. 다들 제 자리를 찾겠지…’
한숨이 깊어졌다. ‘참 힘들어. 그런데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자책이야. 나에 대한 실망. 지금까지 괜한 욕심을 부린 건가...’
왜 이렇게 반품이 늘었나?
커미션 받자마자, 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우 쪽 매출이 줄자 정호의 장부에도 곧바로 빨간 줄이 그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진 부사장이 끌어올린 매출 대부분이 허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먼저 매출을 올리고, 다음 달 커미션을 챙긴 뒤, 카드사에 환불 처리했다. 닳고 닳은 영업사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정호는 이런 잔기술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오후, 정호는 김진 부사장을 불러 다그쳤다.
그가 짧게 눈을 깜빡였다. “글쎄요. 알아보겠습니다.”
“제품에 하자도 없는데 이렇게 받아주면 어떻게 하나? 이건 당신 선에서 막아야지. 우리가 대기업이야?”
호통이 매장 안에 울렸다. 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 바닥을 잘 모르시네. 영업 사원들은 처음에 다 이래요. 저들은 지금 충성할지 떠날지 시험하는 겁니다.
조금씩 받아주면서 신뢰를 쌓아 가셔야죠. 그릇이 작으시네...’
다음 달, 반품은 현격히 줄었지만 매출도 함께 줄었다. 고객들 수리 요청도 계속 이어졌다. 미국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출시한 것이 화근이 됐다.
대기업에서만 활약하던 진 역시 모든 것이 열악한 곳에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정호와 진 사이도 균열이 점점 커졌다.
서로의 필요에 따른 만남.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바로 적대적이 된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오후 5시, 지금 한국은 오전 9시로 이제 하루 일과가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호는 한참 한국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사장님. 그러면 정 사장님과 함께 오시는 거죠? 네. 잘 준비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정호는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 사장 일행을 미국에 초청해서, 프리미엄 정수기 렌탈 사업에 대해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려던 참이었다. 정 사장은 창업자의 아들로 실질적인 후계자였다.
‘앞으로 대여 사업이 대세가 될 것이 틀림없어. 문제는 3년 정도 버틸 수 있는 자금인데…’
정호가 사무실에서 김진 부사장을 불렀다.
“다음 주 한국 본사 정 사장과 임 사장이 방문하니까 우리 렌탈 사업에 대해 잘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3년 정도면 손익 분기점을 넘어 이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전망치를 내고. 투입 비용은 최소화해서.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야. 철저히 준비하세요.”
진이 야릇한 웃음을 띠며 대답한다.
“아, 굉장히 중요한 미팅이 되겠군요. 철저히 준비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자기에게도 둘도 없는 기회임을 직감했다. 정호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즉시 보고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 자주 하던 시뮬레이션이라, 엑셀 파일에 숫자만 바꿔 넣으면 자동으로 계산돼 나왔다. 그는 최대한 한국 본사 입맛에 맞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한국의 정 사장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 그에게 장문의 이메일과 함께 보고서를 직접 보냈다. 정호를 패싱 했다.
존경하는 정 사장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김진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김정호 사장의 프리미엄 정수기 렌탈 사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내 최대 정수기 회사인 W사에서 미국 시장을 처음부터 개척하여, 현재 연 8천만 달러 매출로 성장시킨 일등 공신입니다.
이 시장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김진호 사장과 함류 했으나, 김 사장이 이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기에, 사업이 진전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사장님께서 허락하시면 직접 뵙고 보고 드리고 싶습니다.
김진 올림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부사장이 며칠간 나타나지 않자 정호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수시로 휴대폰을 켜보며 정호한테 연락 온 게 없는지 확인했다.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진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 됐다.
정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모멸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내가 너를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헛된 기대가 너무 컸어.
아무리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데,
선을 한참 넘었어. 결국 너도 똑같이 당하게 될 거야’
그는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진을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
내일이면 정 사장 일행이 도착하는데 아무 준비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12시, 정호는 공항으로 일찌감치 출발했다. 평일이었지만, 교통 사정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주차하고 나오니, 비행기가 이미 도착했다고 안내판에 불이 들어왔다.
‘1시간 정도면 나오겠지’
기다리는 내내 불안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제, 무슨 말을 하나?’
저만치 임 사장과 정 사장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그들도 정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일정이 이틀밖에 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가방 하나만 들고 단출하게 왔다.
정호가 짐짓 반가운 듯이 인사를 했다.
“아니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 사장은 40대 초반으로 정호보다 한참 아래다. 그는 씩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장님도 그동안 애 많이 쓰셨지요?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바로 가서 렌탈 사업에 대해 이야기 좀 나눌까요?”
정호는 작은 소리로 “네, 그러시죠.” 말을 맺었다.
3시경, 정호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본사 사장이 두 사람이나 왔는데, 아무 준비도 없었다. 정호는 난감했다. 이젠 솔직히 말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사실은 렌탈 사업을 총괄한 김진 부사장이 연락이 안 됩니다. 곧 후임자를 물색해서 이상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임 사장과 정 사장이 서로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임 사장이 표정을 고치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아무 준비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정호가 고개를 숙이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말끝을 흐렸다.
“후임자를 물색해서, 곧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 사장이 한마디 했다. “그러면, 다른 제품들에 대해서 이야기 좀 나눌까요?”
정호는 다른 제품들의 판매 계획 등을 그들 입맛에 맞게 부풀려서 설명했다.
두 사람은 그의 브리핑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끝나자, 정 사장은
“말씀하신 판매 계획 대로 잘 지키시고, 다음 달부터 이에 준해서 오더 넣어 주세요. 이후에 렌탈 사업에 대해 검토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저희도 좀 호텔에 가서 쉬겠습니다.”
정호는 일단 큰 위기를 넘겼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좀 쉬시다가 저녁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마침 저녁 약속이 있어요. 내일도 골프 약속이 있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정호는 이 말을 듣고 왠지 불안했다. ‘무얼까? 뭔가 있나?’
약 1시간 뒤, 한인타운 호텔에 도착했다. 정호는 두 사람과 인사하고 헤어졌다.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업으로 평생 산전수전 경험한 그만의 촉이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무슨 다른 약속이 있나? 누구를 만나는 거지? 나와는 달랑 오늘 미팅만 하고, 더 이상 없는 거야? 뭔가 이상해… 뭐지?’
프리미엄 정수기 렌탈 사업 계획입니다.
호텔 2층 커피숍 한쪽, 유리창 너머로 야자수가 이어져 이국적인 느낌을 더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뿜어내는 수증기 소리, 조용한 피아노 재즈 음악. 조용히 대화하는 사람들 소리가 섞여 분위기는 차분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잠시 정적이 깨졌다. 김진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그의 양손은 단정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두 사람을 향해 웃고 있었다. 임 사장과 정 사장은 그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친 뒤, 무심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진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켜지자, 회사 로고가 나타났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이어서 그래프와 표가 연달아 나타났다. 손끝이 마우스를 미끄러질 때마다, 수치와 곡선이 부드럽게 전환됐다.
“3년 내 손익분기점 달성, 5년 차에 매출 1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표정은 처음엔 무심했지만, 그래프가 상승 곡선을 그릴수록 반짝이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 사장은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메모를 시작했다.
진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얻었고, 손짓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여기에 보시면, 기존 판매망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렌탈 전환율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미국 주요 20개 도시 영업망은 이미 구축돼 있습니다. 제가 직접 관리하는 조직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 사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계획, 정말 가능해요?”
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 사업은 제가 미국 제일 전문가입니다. 바닥에서 기면서 쌓아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릴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정 사장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한번 오세요. 회장님께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순간, 진의 눈동자가 짧게 반짝였다. 세 사람 모두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그들은 다음 날 골프를 함께 했다.
며칠 후, 진은 자신이 관리하던 영업 조직을 통째로 정호로부터 떼어냈다.
그 조직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린 듯 주저 없이 진의 말을 따랐다. 그는 영업인들을 자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잠시 대기시켰다. 정호로 공격 목표를 수정하고 잠시 전열을 가다듬는 거였다.
그는 영업을 총괄하는 최 이사에게 전화했다.
“이사님, 제가 곧 회사를 직접 차려요. 투자자도 확보했고, 한국에서 물건도 먼저 받기로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행동에 나설 겁니다. 이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돈을 쓸어 모아 보자고요. 하하하”
“저야 부사장님, 아이 사장님 말씀만 기다리고 있지요. 아무 염려 마세요. 저희는 사장님이 언젠가 큰 일 하실 줄 알았어요. 파이팅입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몇몇 지인들을 설득해서, 이참에 자기 회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영업 조직은 돈으로 움직인다.
돈은 혈액이다.
돈이 안 들어오면 금세 이탈한다.
한번 이탈하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조급했다. 한시가 급해 서둘렀다.
언제나 조급한 사람이 진다. 기다리는 사람이 이긴다. 예외는 없다.
고장 신고 한지 언젠데..., 당장 환불해 주세요.
정호는 사무실에 홀로 앉아 연일 걸려오는 반품과 불만 전화에 시달렸다. 이것도 진이 영업 사원들을 사주한 거였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갔다. 직원들은 불안한 눈으로 눈치만 살필 뿐 정호를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허탈하게 창밖을 보았다. 컨테이너 차들로 꽉 막힌 거리 모습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했다.
그의 귓가에 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저희는 한국 본사 직영점이에요. 대리점과 우리는 서비스나 가격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정호가 연우를 향해했던 말이, 이제는 총알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불길하게 퍼지는 반품 소식과 점점 쌓여가는 재고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정호는 '내가 무너지면... 당신도 함께 무너져.'라고 연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하며, 마음속에는 연우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이것이 최선'이라는 자기 합리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냉혹한 예언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립무원인 정호에게 강력한 우군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맞아. 김진은 공공의 적이야. 진연우에게는 더하지. 결국 원인 제공자라고 할 수 있어.'
텅 빈 사무실을 뒤로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연우의 매장으로 향했다. '그래,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다면 꿇자.'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어떻게든 살아야 해. 연우를 설득하자.' 지금 그에게 연우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래, 결국 비즈니스는 돈이야. 이것 외에는 모두 비본질이고, 그도 돈이 필요하지. 그것도 절실하게... 감정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미안하다고 무릎 꿇자. 돈으로 해결해야지. 어떻게든 방법은 찾으면 있어.’
연우의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 너머로 새로운 제품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낯선 로고와 화사한 색깔의 제품들이 정호 눈에 들어왔다. 매장 뒤쪽 연우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정호는 잠시 망설이다 벨을 눌렀다. 연우가 사무실 문을 열자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시선은 차가움보다 냉소적인 비웃음에 가까웠다.
'이미 김진과 나 사이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왜 왔는지 이유도 알 것이다.'
정호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안부를 묻는다.
“어때…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요? 내가 할 말이 없어요.” 말끝을 흐리며 울먹울먹 하더니 급기야 눈물을 쏟았다. 연출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 격해지면 가끔 이랬다.
“내가 그놈을 너무 믿었어. 아니 욕심이 앞섰어요. 진연우 씨, 나 좀 살려줘. 이제 나한테 진 사장 밖에 없어.”
“사장님, 저는 다시는 안 본다고 다짐했어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 속지 두 번 속나요?” 그는 처음으로 면전에서 쏴 붙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이었다.
“내가 그 마음 충분히 알지. 정말 미안해요. 진 사장, 내 사정 알잖아요.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한 거야. 한시도 진 사장을 잊은 적이 없어요. 이건 진심이야.”
"........."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필요하신 거예요?”
정호는 잠시 생각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합칩시다. 이 매장을 내가 인수할게요. 그리고 우리 회사 부사장으로 와줘요. 내가 그놈에게 한 대우를 그대로 해줄게.”
연우 입장에서는 고민이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자존심이냐 생존이냐?’ 이것만 남아있었다. 그는 갈등했다.
“..................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정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요. 이해해 줘서 고맙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잘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일은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합시다.”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
연우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생존 앞에서 자존심이 무슨 소용 있나? 또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을 수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살아남아야 해. 가장 비참한 것은 속는 게 아니라 죽는 거야. 직원들은 어떻게 하나?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정화와의 일은 어쩌지?’
연우는 자기 생각을 노트에 하나씩 하나씩 적었다. 이것은 그의 오랜 습관으로, 생각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무심코 손이 움직이며 이렇게 적었다. ‘그래, 이 방법 외에는 없어!’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이제 남은 일은 서로 불편하지 않게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진과의 싸움에도 중요했다.
며칠 후, 연우는 정호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에선 이미 그들의 화해를 알고 있었다. 정호는 은근히 자기 리더십을 과시하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연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우는 진의 약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다.
‘그는 큰 회사에서만 일한 사람이야. 큰 조직에서만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조직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지금 돈이 턱없이 부족할 테지. 이제 물건도 팔 만큼 팔았어. 앞으로는 처음 같지 않을 거야. 우린 온갖 풍파를 겪어온 잡초 같은 사람들. 3개월만 버티면 이긴다.
지금은 최대한 줄여야 해.’
연우는 가장 먼저 LA 메인 매장을 없앴다. 그곳에 들어가는 임대료만 한 달에 2만 달러 이상이었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건물주에게 읍소하며 양해를 구했다. 로랜하이츠 매장도 문 닫았다. 가능한 한 직원들은 모두 외주나 커미션제로 전환했다. 마른 수건을 짜듯 비용을 줄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비용 절감의 효과는 그다음 달부터 바로 나타났다. 장부 숫자가 달라지자, 정호의 표정도 달라졌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움직임이 빨라지고, 성과도 눈에 보였다.
그 무렵, 연우는 뜻밖의 기회를 잡았다. 항구에 하역된 진의 제품이 보관된 창고가, 오랜 지인의 소유였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어려운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들어온 제품, 회사 이름이 ‘CS’ 일 거예요. 그 회사 제품 출고 현황을 알려주시면… 네, 맞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짧은 침묵 뒤, 지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 내 챙겨줄게요.”
이후, 연우는 진의 회사 제품 입출고 기록을 날짜별로 훤히 꿸 수 있었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그래프가 눈앞에 그려졌다. 초반의 급등 곡선은 어느새 완만해지더니, 곧 추락세로 접어들었다.
'전형적인 초기 오픈 효과… 곧 무너진다.'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예상대로 진의 회사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주문한 물건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고, 배송·설치·서비스 처리에서 줄줄이 문제가 터졌다. 영업 사원들의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진은 자기 사업을 한 적이 없는, 큰 회사에만 있었던 온실 속 화초였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한 배가 파선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며칠 뒤, 정호가 환하게 웃으며 연우에게 다가왔다.
“진 부사장, 김진이 대금 지급을 못해서 이제 곧 물건을 못 받을 거래. 그놈,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수고 많았어요.”
연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한 한 수가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곧 한국 시장이 오픈됩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예요.
정화의 다단계 사업은 날로 세를 불렸다. 사무실에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몇 명이 힘을 합쳐 단독 오피스를 얻었다. 연우의 아내도 힘을 보탰다. 매장을 정리 뒤라 그녀의 표정에 여유가 보였다. 가시적인 성과까지 뒤따르자, 자주 웃었고 말도 밝아졌다.
환경과 여건이 마음의 날씨를 결정했다. 어쩔 수 없다.
어느 토요일 오후, 정화는 핵심 사업자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시간 싸움이에요. 먼저 한국에 들어가서 사업자를 모집해 라인을 구축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저는 이 달 말에 한국에 갑니다. 함께 가실 분은 말씀해 주세요.”
사람들 눈빛이 반짝였다. 기회의 문이 열리는 순간으로 보였다. 사무실 안은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연우가 퇴근하고 돌아오자 아내가 주저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정화 사장이 곧 SD 제품이 한국에서 오픈한대요. 벌써 한국은 난리예요. 다단계는 타이밍이라잖아요. 이달 말에 여럿이 한국에 들어간다네요. 우리도 들어가면 좋겠는데… 나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어떡하면 좋을까요?”
연우는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국에 들어가면 최소 몇 달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은 접어야 하고…’ 기회와 위험이 얽혀 머릿속에서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이제 김 사장 사업에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 획기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 하지만 다단계는 생소하기만 하고, 한국에 라인은커녕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연우는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자는 동안 계속 아내의 말이 떠나지 않았다.
'갈등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일지 몰라'
‘그래 한번 해보자. 기회라고 생각되면 어떻게든 해보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없지. 김 사장에게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이 일은 지금 아니면 안 되고...
출근하면 사표를 내자. 떠나려면 지금이 좋아.’
김 사장과의 인연이 하나씩 정리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집 안을 정리한 뒤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정호는 이미 출근해서 회의실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우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한다.
“어, 일찍 왔네요. 커피 한잔 합시다.”
“사장님, 이제 제가 할 일도 거의 다했고, 이제 저는 제 갈 길을 가렵니다.”
정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제부터 진 부사장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타주 진출 계획도 세워야 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게 많이 커졌어요. 이 달 말에 한국에 두 달 정도 가야 해요.”
한국에 두 달을 가있어야 한다는 말에 정호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컨테이너를 실은 차들로 붐빈다. 그는 늘 자기 물건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 트럭들이 그의 창고를 분주히 오가는 것을 꿈꿔왔다. 평생 꿈을 좇았다.
“그래요. 참 아쉽네. 진 부사장 하고는 평생 같이 하고 싶었는데…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연우는 모든 것을 반납하고 회사를 나왔다. 결정하기 전에는 설렘이 컸는데, 현실이 되니 두려움이 앞섰다.
'다단계. 대부분 자본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쪽에서 한참을 버티다 나온 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단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거지야. 돈이 없어. 거긴 무조건 돈으로 움직여.”
‘과연 그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호와 정화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정호는 거칠고 말은 함부로 했지만, 비교적 순진하고 정직한 면이 있었다.
반면 정화는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사람.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마음 터놓을 상대도 없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세계.
경험 하나 없이 발을 들였다.
곧 한국에 간다.
거기서는 더더욱 혼자였다.
진 사장님의 풀타임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연우가 본격적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은 정화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거리였다.
대부분 여성인 조직 안에서, 대기업 출신 마케팅 전문가가 합류했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정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연우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연우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 팀에 든든한 기둥이 생겼어요. 앞으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몇몇은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정화를 바라봤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지만, 이익은 고스란히 정화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녀의 지시를 충성스럽게 따를 뿐이었다. 겉으로는 모두 ‘독립 사업자’였지만, 실상은 정화에게 줄을 잡힌 채 흔들리는 꼭두각시 인형들이었다.
2019년 12월 10일, 염우는 정화와 다른 사업자 8명과 함께 2주 일정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에 내리자, 찬 공기가 얼굴을 베었다. 기온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일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부근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정화와 그녀의 최측근 두세 명은 미국 본사에서 호텔비와 경비를 충분히 지원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든 비용을 자비로 감당해야 했다. 이런 불공평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어떻게든 정화의 인맥과 영향력에 기대, 자신들도 안정적인 수입원을 마련해야 했다.
정화는 이런 ‘절실함’을 읽어내고, 이것을 어떻게 써먹을지 아는 본능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아닌, 돈을 위해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로 인정됐다. 정이나 의리는 사치품이었다. 이곳은 없는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어느 순간 정화는 그 집단에서 교주가 되어갔다. 그녀의 한 마디는 부자로 가는 경전이었다. 교주가 신뢰를 잃는 순간, 즉시 그에 대한 경외심은 저주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게 된다.
정화는 도착하자마자 1층 커피숍을 사무실처럼 사용했다. 커피숍은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들로 갑자기 북적였다. 정화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성을 기울였다.
“사장님, 저희의 가장 큰 장점은 제품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사업자를 위한 보상 플랜이에요. 그리고 미국과 원라인으로 연결돼 있어요. 수당 상한선이 35%로 제한되지 않아요. 미국은 매출의 60%까지 수당이 지급됩니다. 좋은 자리를 몇 개 마련해 놨어요. 사장님 쪽에선 몇 명이 가입하시나요?”
정화는 노트에 그림과 숫자를 그리며 능숙하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쑥 빠져들고 있었다. 연우는 멀찍이 이런 광경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화 곁에는 연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과는 형식적인 몇 마디 대화밖에 없었다.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정화가 던져주는 먹이가 없나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다. 정화는 이를 간파했다. 며칠 뒤, 정화는 지방을 돌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녀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하루는 “제가 너무 피곤해서 어금니가 두 개 빠졌어요. 사장님들도 아무리 바쁘셔도 건강 꼭 챙기세요. 이제 많이 알려졌으니, 사장님들 모두 꽤 바빠지실 거예요.”
어디나 있는
부익부 빈익빈.
없는 곳에서 더 잘 보였다.
절박하기 때문에
더 쉽게 당한다.
이용하기도 한결 쉽다,
광고 마케팅으로 잔뼈가 굵은 연우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지금, 감정이 앞서면 그대로 나락으로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돈 안 쓰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자료를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려는데, 전에 유튜브와 페이스북 마케팅으로 크게 효과 봤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무릎을 쳤다.
‘그래, 유튜브를 해보자.’ 그때까지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돈이 안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즉시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채널명은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되니, 최대한 직설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사업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돈. 미국 제품이라는 내용도 강조했다.
‘미국에서 온 SD 네트워크 마케팅 - 부자 되세요.’
순식간에 채널 이름에 걸맞은 5-6분 분량의 원고를 작성했다.
원고를 마치고 노트북을 접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자, 가슴이 뛰었다.
연우는 근처에서 휴대폰용 소형 마이크와 삼각대를 구입해서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은 10분도 채 안 돼 끝났다. 촬영을 마친 뒤, 2-3시간 동안 편집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첫 번째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해시태그, 키워드, 제품 및 회사 소개와 자기소개도 시청자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부터 효과가 있든 없든 채널을 꾸준히 관리하며 새로운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날 아침 유튜브 채널을 열어보니, 불과 하루 만에 500 뷰를 넘었다. 손끝이 떨렸다. 생전 처음 보는 유튜브 채널에 이 정도 시청자가 있다는 것은 폭발적인 반응의 예고였다.
부랴부랴 다음 영상을 준비했다. 전편에서 회사와 제품 소개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장점을 부각했다.
“저는 네트워크 마케팅을 난생처음 해봅니다. 그래서 선입견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열심히 돕겠습니다. 저와 함께 하실 분은 이메일이나 전화로 연락 주세요.”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만나자는 전화가 여럿 걸려왔다. 연우는 다음날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러 다녔다. 때로는 지방으로 다녔다. 바깥은 한 겨울 날씨로 꽤 추웠지만, 그의 마음은 온기로 가득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젠 뭔가 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뿌듯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연우는 유튜브 운영과 사업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오기로 했다. 한국에 온 지 2주 후인 12월 24일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카톡 보이스폰이 울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진연우입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백정수라고 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중년 여성 목소리였다. 목소리 톤으로 봐서 꽤 사업 수단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미국에 가는 길입니다. 일단 들어가서 몇 가지 일을 정리한 후, 다시 오려고 해요.”
“아, 그러시군요. 언제 다시 한국에 들어오세요? 제가 좀 급한데…”
“1월 중순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어쩔 수 없네요. 미국에 돌아가셔서 계속 연락해요.”
‘어쩌면 대어인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공항으로 들어섰다.
미국에 돌아와서 2-3일에 한 번씩 부지런히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콘셉트는 ‘신뢰 가는 사업자'와 ‘돈 되는 사업’이었다. '이제 곧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였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서 2시간이면 동영상 1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연우는 ‘지금이 그간의 광고 경험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네. 돈 한 푼 안 들이고. 세상이 참 많이 바뀌고 있어’ 혼자 중얼거렸다. 세상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이런 노력으로 연우는 한국과 미국에서 꽤 많이 알려졌다. 문의도 계속 밀려왔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아침부터 밤늦도록 사람을 만나며, 조직을 구축해 갔다. 이 업종은 잠시도 쉬지 못했다. 특히 연우처럼 초기 사업자는 더욱 그랬다. 서로 사람을 빼가는 것도 흔했고,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바로 등 돌리기 일쑤였다.
자본이 투입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은 더 필요했다. 잠시라도 활동하지 않으면, 금세 무너지는 것이 이 업계의 생리였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성향상 특히 더 심했다.
2020년 1월 15일, 연우는 미국 쪽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자마자 백정수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호텔은 삼성역 인근, 창밖으로 겨울 빛이 묵직하게 깔린 오후였다.
짐을 풀고, 곧장 선릉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호선 선릉역, 역삼역 일대는 ‘대한민국 다단계의 메카’였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커피숍마다, 둘씩 셋씩 모여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노트를 펼쳐 무언가를 그리고, 화살표와 원을 그리며 설명하는 손짓. 또한 그들 특유의 옷차림과 분위기가 있었다. 대부분 다단계 하는 사람들이었다.
연우는 이젠 웬만하면 알아볼 수 있었다.
목소리 톤, 시선이 머무는 방식, 상대 반응을 끌어내는 타이밍.
‘나도 이제 이 바닥 냄새를 맡을 줄 아는구나.’
자부심이 아니라 씁쓸함이었다.
정수의 사무실은 선릉역 2번 출구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빌딩 11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 반쯤 열린 유리문 너머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두드리자, 화사한 옷차림의 50대 초반 여성이 직접 나왔다.
짙은 립스틱과 선명한 액세서리, 외모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다섯 명의 남녀가 테이블 둘레에 앉아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정수가 먼저 입을 뗐다.
“여기 미국에서 오신 진 사장님이에요. 유튜브에서 보셨죠?”
그녀는 잠시 멈추고,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이제 우리가 스폰서를 정해야 하는데… 그동안 정화하고 일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 믿을 수 없어요. 자기 실속만 챙기고 전혀 도와주지 않아요. 완전 꾼이에요.”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더 늦기 전에 바꿉시다. 진 사장님은 제가 직접 이야기 나눠봤는데, 무엇보다 믿음이 갑니다. 사장님들도… 같은 생각이죠?”
정수는 그들 사이에서 회장님으로 통했다. 다단계 쪽에서 조금 큰 조직의 우두머리는 모두 회장님으로 불렸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연우에게도 회장님이라 불렀다. 이 소릴 들으면 그는 낯이 뜨거워 손사래를 치며 기가 막혀했다.
“저희야 뭐 다 회장님을 따라야죠.” 그중에서 제일 젊은 여자가 말을 꺼냈다.
부산 사투리를 쓰는 젊은 남자는 “우리 한번 멋지게 잘해 보입시데이” 하며 웃는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연우의 자신감과 기대도 점점 더 커져갔다.
정수는 이 업계에서 알아주는 큰손이었다. 그녀는 인맥도, 말솜씨도 탁월했다. 정화와는 여러모로 많이 달랐다. 세련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정수는 자기 차를 직접 운전하며 연우와 함께 본거지인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연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설명했다. 미팅이 많은 날은 하루 열 번이 넘었다. 정수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성과는 즉시 나타났다. 연우의 통장에 들어오는 수당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렇지만 이에 비례해서 비용도 함께 늘어났다. 이런 구조는 다단계 업종의 태생적 한계였다.
USDT 테더로 결제하면 안 돼요?
어느 날,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수가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예요?”
정수가 잠시 옆을 흘끗 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세요? 달러랑 1대 1로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 테더. 이 바닥에선 다 이걸로 결제해요. 누가 현금을 직접 주고받아요? 추적도 쉽고…”
연우는 숨을 고르며 정색했다.
“회장님, 저는 코인 같은 건 잘 몰라요. 이 일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정수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하시긴… 하긴, 그게 내가 사장님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죠. 그런데—”
잠시 말을 끊고, 도로 위 신호등을 바라봤다.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색이 깜빡이더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주행 신호는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 이제 이런 건 아셔야 해요.”
그 말이, 신호등 불빛처럼 연우의 뇌리에서 계속 깜박였다.
그가 조금만 시선을 돌리자, 강남 거리는 코인으로 잠식당했다.
카페 한쪽에서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노트북 화면의 차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고, 옆자리에서는 휴대폰 두 대를 번갈아 보던 여자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전철 안에서도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코인 관련된 모습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단위가 달랐다. 0이 몇 개는 더 붙었다.
그 업계 사람들과 마주 앉아 설명하면, 대부분 피식 웃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물류 다단계는 재미없어해요. 관심도 안 가집니다. 괜한 헛수고죠.”
말을 마치면 어김없이 자기가 한 달 만에 번 금액을 보여줬다. 순서가 거의 똑같았다.
이후 연우는 짬이 날 때마다 코인 관련 세미나에 얼굴을 내밀었다.
호텔 연회장은 늘 화려한 조명과 값비싼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기서 쏟아지는 말들은 대부분 낯 뜨거운 거짓과 과장이었다. 알면서도 속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이길 간절히 바라는 염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건 미국 ○○주에서 공식 인가를 받은 프로젝트입니다!”
강사는 번쩍이는 액자를 들어 올렸다. 액자 속 문서 하단에는
주지사 사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물론, 위조였다.
연우도 똑같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걸 믿으라고?’
세미나 장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지팡이를 세워두고 스마트폰으로 연실 촬영하며, 유모차를 밀던 젊은 엄마는 화면 속 그래프를 확대했다. 옆자리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세미나가 끝나자 참석 자들이 힘차게 손뼉 쳤다.
그 광경이 오히려 연우를 숨 막히게 했다. 모두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최고 도시 서울 한복판 강남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 돈—인간 본성의 민낯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연우는 호텔 방에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동안 물고기가 없는 곳에서 그물질했어.
그러니 아무리 밤새 그물을 던져도, 빈 그물만 건져 올렸지. 어쩌다 운 좋으면 잔챙이 한 두 마리 올라오고.’
창밖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강남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사기꾼은 돈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지.
사기꾼이 많다는 건 그곳에 돈이 모인다는 뜻이야.’
잠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쪽 공부를 해보자. 사람들을 만나보고, 어차피 이것이 대세라면, 더 늦기 전에 빨리 준비해야지.’ 마음이 급해졌다.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비트코인’을 입력했다.
연우의 눈은 화면 속 낯선 용어를 쫓았다. ‘디지털 자산’… ‘발행량이 정해져 있다’ -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듯했다.
시선은 다시 창밖의 강남 거리로 옮겨갔다.
네온 불빛 사이로 흘러 다니는 돈 냄새가 창문 너머에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다음 목표가 정해진 눈빛이었다.
연우는 사업을 접으며 ‘왜 망했을까? 밤낮없이 열심히 뛰었는데, 무엇이 잘못이었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곧 두 개의 답으로 돌아왔다.
‘돈을 몰랐다. 그리고 세상 흐름을 읽지 못했다.’
큰 물결을 타지 못하면, 아무리 힘껏 노를 저어도 배는 앞으로 전진하기는커녕 뒤로 밀려난다.
그날 이후 연우는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돈 공부’에 매달렸다.
한 권의 책이 그에게 강하게 말했다.
“주식을 한 주라도 사라.”
그는 자신이 늘 가던 맥도널드 매장을 떠올렸다.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이 회사도 망하지 않겠지.’
생애 처음 주식 거래창에 맥도널드 한 주를 매수했다.
스마트폰 화면 안의 숫자가 자신의 손끝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코스트코, 홈디포, 테슬라, 엔비디아, 팔란티어…
자신이 알고, 믿을 수 있는 종목만 골랐다.
마침 미국 증시는 불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화면 속 그래프는 매일 푸른빛을 더했다.
연우의 주식 자산은 차츰 속도를 더하며 늘기 시작했다.
그는 호텔 방에서 바이낸스 USA와 코인베이스 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생애 첫 비트코인을 매수했다. 1개—8,600달러.
화면에 찍힌 숫자가 낯설고 묘하게 친근했다.
석 달 뒤, 한국 생활이 끝나가고 미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이미 정화와의 관계는 형식적이었다. 그녀는 겉으로만 뻔한 인사를 주고받을 뿐,
온 신경이 자기 몫 챙기기에 쏠려 있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도, 마음도 없어 보였다.
그 무렵, SD 사업은 잇따른 악재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마케팅 신문 1면 톱기사였다.
“미국 SD 사업자, 정부 승인 없이 불법 사전 영업”
대표 사업자로 정화가 지목됐고, 그녀의 얼굴이 큼직하게 실렸다.
게다가 그녀는 가족 명의로 여러 개의 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드러났다.
업계의 불문율—‘복수 계좌 금지’를 깨뜨린 것이었다.
이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 ‘사업자’에서 ‘다단계꾼’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녀의 최측근들조차 등을 돌려 미국 본사에 투서를 넣었다.
결국 미국 본사에서 ‘김정화의 사업자 자격 박탈’과 “한국에서의 영업 전면 중단”이라는 철퇴가 떨어졌다. 여기에 세관까지 움직였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SD 제품을 전량 회수하고, 엄청난 세금을 얹어 부과했다.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혔다.
연우는 문득, 정호가 전부터 반복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진연우 씨, 사업은 정부와의 동업이야.
이걸 잊으면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사람 동업자하고 틀어져도 사업이 힘들어지는데,
정부와 불편하면 어떻게 되겠어?
절대 잊지 마요. 사업은 정부와의 동업이야.”
백 번 지당한 말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요행에 기댔다.
법과 절차는 뒷전, 눈앞의 이익만 좇아 정직하지 못했다.
결국 불나방처럼 정화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무지한 욕심이,
스스로 날개를 불태운 셈이었다.
연우는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왔다. 와서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했다.
독감 같은 거라잖아. 곧 괜찮아지겠지
코로나19 - 연우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는 전례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모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뉴욕, 시애틀, LA 병원에서 환자와 사망자가 폭증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대형 마트에는 휴지와 물, 통조림을 사재기하려는 인파로 뒤엉켰다. 진열대는 순식간에 텅 비었고, 계산대 앞은 전쟁터 같았다. 브로드웨이는 불이 꺼지고, 월가 사무실도 텅 비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몇 블록씩 줄을 섰고,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 집계’가 올라갔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마음을 흔들었다. 가까운 지인들의 사망 소식도 심심챦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서로를 잠재적인 숙주로 여기며 경계했다.
불안, 두려움, 공포, 경계, 의심. 가까이 말고 거리 두기 - 이 단어들이 사람들 마음을 점령했다.
“얼마나 계속될까?”
“세상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두려움도 함께 자란다. 세상은 점점 더, 경험하지 못한 공포에 휩싸였고, 재생산되며 확대되었다.
정부는 마비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긴급 지원을 쏟아냈다. 연준은 금리를 0%까지 낮추고,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국민들에게는 ‘스티뮬러스 체크(Stimulus Check)’라 불린 현금이 직접 지급됐다.
돈이 눈에 보이지 않는 폭포처럼 시중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오래전 IMF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젊었고, 세상이 끝나는 듯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길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났던 그 시절—그 공포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모두가 공포에 빠졌을 때, 그때가 바로 기회였구나.”
그날 밤, 연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LA 한복판. 네온사인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거리는 텅 비었다.
공허한 풍경 속에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모두 공포에 떠는 이때가 기회다.”
돈이 이렇게 풀리면, 자산 가격은 반드시 오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슬라 그리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몇몇 우량주를 차례차례 사모으기 시작했다. 2020년 하반기, 세상은 얼어붙었지만 차트 화면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비트코인은 이미 10배가 넘게 치솟았다. 이더리움도 따라서 폭등했다. 연우가 믿고 사 모았던 주식들도, 불가능할 것 같던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거의 7배. 그는 숫자를 보는 눈을 떼지 못했다. 계좌에 찍힌 잔고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단위를 넘어섰다.
“이게… 현실이 맞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문 투자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훗날 그는 알았다.
혹독한 겨울을 몇 번 겪어야 비로소 겸손해진다는 것을. 겸손함은 어떤 순간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기본 덕목이라는 것을.
연우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세상은 반드시 디지털 자산으로 간다. 돈은 이곳으로 모인다. 빨리 선점해야 한다.’
창밖 불빛 너머로, 그는 광산의 검은 갱도를 떠올렸다.
록펠러도, 정주영도 광산에서 시작했다.
앞으로의 광산은, 석유도 석탄도 철광도 아니다.
디지털 광산, 즉 코인 채굴이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자료를 모았다. 채굴 컴퓨터 사진, 전기 사용량, 데이터 센터 구조도…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해가 쌓일수록 확신은 강해졌다. 지식은 믿음을 강화했고, 믿음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제, 나는 디지털 광부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디지털 광산업을 시작한다.'
여러 코인 가운데, L코인을 선택했다.
대중성을 확보했고, 진입 장벽이 높아 아무나 쉽게 뛰어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케일을 비롯한 대형 투자기관에서 포트폴리오로 보유하고 있어 신뢰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승산 있어.’
2021년 8월, 그는 이 분야에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X회사 대표와 미팅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즉시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 백신 접종 증명서, 입국 허가서를 꼼꼼히 확인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만약 양성 판정이 나오면 모든 일정이 물거품이 된다. 서류 하나하나를 몇 번이고 꼼꼼히 확인했다.
회사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했다. 곧바로 회사 대표 황 회장과 직원 몇 명이 함께 들어왔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키가 컸다. 머리칼은 거의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엔지니어 출신답게 외모에는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이 더 신뢰를 주었다.
그보다 믿고 싶은 마음이 생각을 이끌었다.
그가 연우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아이고, 멀리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황형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저희 직원들입니다.” 그가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인사가 끝나자 황 회장이 직접 회사를 소개했다.
대형 TV 화면을 켜니 ppt 자료가 나타났다. 황 회장은 손끝으로 TV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술적인 용어를 섞어 설명했다. 달변가였다.
“제가 몇 년 전 처음 시작했을 때, 저쪽 구석에서 컴퓨터 두대 갖고 시작했어요. 이쪽이 한번 탄력 받으면 무섭게 큽니다. 이제 때가 무르익는 것 같아요. 하하”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잘 진행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자기 회사 영업을 해주겠다고 찾아왔는데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회의를 마치자 그가 직접 공장을 안내했다. 공장 안에는 수많은 컴퓨터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한 겨울이지만 컴퓨터가 뿜어내는 열기에 실내는 후끈했다.
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저 컴퓨터들이 제 직원들이에요. 하루 24시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합니다. 월급도 필요 없고, 노조도 없죠. 전기랑 에어컨만 켜주면 돼요. 참 재밌지 않습니까? 하하!”
그 말에 연우의 가슴이 짜릿했다.
‘그래, 이게 바로 디지털 광산이야… 내가 찾던 바로 이거야. 이번에는 기필코...' 연우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다음 날 오전, 협약식이 열렸다. 뒤에는 회사 로고가 새겨진 현수막이 걸렸고, 직원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황 회장과 연우가 나란히 서서 악수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 군데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행사 후 사무실로 돌아와 공급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대로만 진행되면 아무 문제없을 것처럼 보였다.
연우는 미국에 돌아와서, 윌셔가에 있는 공유 오피스에 작은 사무실을 계약했다. 회의실을 거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딱 맞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블록체인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LA 한인 타운은 블록체인 불모지였다. 아무런 인프라도 없어서, 연우는 밑바닥부터 혼자 공부하며 배웠다. 처음 그는 거래소 개설, 간단히 코인을 보내는 것, 사고파는 것 등 모든 게 낯설어 어려움이 컸고 실수도 많았다. 도전 정신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이런 필요가 절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코인 사업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 확보라고 믿었다. 여기에는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에게 블록체인 아카데미는 비즈니스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알려야 하겠다는 책임감도 작용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위장된 공명심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 블록체인에 대한 기초 강좌였다. 강좌의 내용은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 코인이란? 비트코인과 코인 채굴, 거래소 개설 방법. 지갑 만들기, 코인 보내고 받기, 사고팔기 등 기초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이 관심 가질만한 내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블록체인과 관련된 책을 한 권 정해놓고,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도 만들었다. 이를테면 중급반이었다.
강좌 마지막 시간에는 L코인과 코인 채굴에 대해서 소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계획이 서자 바로 신문광고로 알렸다. 신문광고가 나가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연우는 취지를 설명하며 믿음을 심어줬다. 반응은 뜨거웠다.
연우는 광고 전문가의 직감으로 ‘이건 된다.’하는 믿음이 들어왔다.
첫 강좌에 20명이 등록했다. 만족할 만한 성공이었다. 멀리 오렌지 카운티에서도 여러 명 참석했다. 사람들 면면은 의사에서 주부, 학생까지 다양했다.
사람들은 강의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그를 붙잡고 질문을 이어 갔다.
“지갑을 잘못 만들면 코인이 사라진다던데요?”
“채굴이 실제로 가능한 건가요?”
“각국 정부가 코인을 모두 사기라고 하는데, 비트코인은 괜찮을까요?”
강의가 이어질수록, 등록자는 늘어났고 결국 저녁 강좌를 따로 열어야 했다. 오렌지 카운티에도 분교 같은 강좌가 생겼다.
계약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전에 했던 사업과는 단위가 달랐다. 마지막 자릿수 영이 몇 개 더 붙었다. 3개월 정도 흐르자 계약 물량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당초 약속한 채굴 수량보다 현격히 숫자가 줄기 시작했다. ‘아, 이쪽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약속을 헌신짝처럼 무시하나?’
황 회장에게 수차례 전화를 해도 “알았습니다.” 말 뿐이었다. 담당 이사와 통화하면 “이건 정확해요. 웹사이트에 보시면, 현재 국제 평균 수량이 나와있어요. 그 기준대로 합니다. 그리고 계약서에도 그렇게 돼있어요.”
“아니, 계약에는 그렇게 돼있어도 회장님이 우리는 1년 정도 특별히 예외로 해주시기 했잖아요? 이렇게 하시면 저희가 장사를 못하지요. 경쟁력도 없고…”
소귀에 경읽기였다.
다급했다. 황 회장 말만 믿고 고객들에게 약속한 수량이 있는데,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신뢰가 생명인 블록체인에서 신뢰에 금이 가는 치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고객들의 불만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황 회장에게 변변히 항의할 수 있는 입장도 안 됐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거리도 문제였지만, 연우가 독자적으로 L코인을 채굴하기에는 자본도 기술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슨 일이든 장벽을 만난다. 중요한 것은 벽의 '높이'가 아니라 '깊이'였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데, 문제는 탐욕이라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연우의 시름도 깊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중단하기에는 떡이 먹음직스럽고 좋아 보였다. 그의 욕심도 컸다.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욕심에서 비롯된 오기는, 대개 자존심이 섞여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된다. 결말이 좋을 리 없다.
‘그가 하는데, 나라고 못하란 법 있나? 사실 기술이야 오픈 소스니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거잖아. 컴퓨터 기술자 한 명만 있으면 할 수 있지. 언젠가 직접 할 건데 시간이 좀 앞당겨진 것뿐이야. 자본은 투자받으면 되고. 한번 해보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너무 아까워.’
지인들에게 수소문해서 컴퓨터 기술자를 소개받았다. 30세 정도로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2세였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 예스 노가 분명한 것이 똑똑해 보였다. 컴퓨터에 파묻혀 사는 친구 답지 않게 사교성도 있어 보였다.
연우는 L코인과 관련된 자료를 건네주며, “네가 할 수 있겠어? 기술은 모두 오픈돼 있어. 스터디해 보고 다음 주 말까지 네가 할 수 있는지 알려줘. 만일 할 수 있다면 바로 시작할 거야.”
며칠 뒤에 그에게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메일이 왔다.
다음 날, 오렌지 카운티의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묻는데, 확실히 할 수 있겠어? 네 대답으로 중요한 일이 결정돼.”
“네. 할 수 있어요. 어렵지 않아요. 채굴은 여러 번 해봤어요.”
연우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음 스텝은 뭐지?”
“L코인을 채굴하려면, 인터넷 속도가 초당 1기가 이상돼야 해요.
GPU는 RTX 3090급 이상,
HDD는 16기가나 32기가짜리 24개 필요합니다.
나머지는 일반 컴퓨터랑 비슷해요.”
“좋아. 조립은 할 줄 알지?”
“그 정도는 기본이죠.”
“우선 한 대를 만들어 테스트해 보자.
비용은 얼마나 들까?”
“이베이에서 사면 조금 싸지만, 사기 위험도 있어요.”
“인터넷은?”
“제대로 하려면 데이터 센터로 들어가야 해요.
가정용은 속도도, 보안도 불안하죠.”
“좋아. 우선 한 대부터 만들어 움직여 보자.”
일부 부품은 중국에서 오기 때문에 채굴용 컴퓨터를 조립하는데 2주 정도 소요됐다. 컴퓨터가 조립됐어도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원격 조정 설치, L코인 채굴에 요구되는 각종 규정과 관련 파일들을 작동시키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마침내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연우는 숨을 멈춘 채 그 장면을 지켜봤다. 동시에 오류 메시지가 떴다.
프로그램 설치는 생각보다 복잡했고, 오류 메시지를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오류가 떠오르는 일이 계속됐다. 그때마다 연우의 머릿속에는 같은 의문이 맴돌았다.
‘내가 괜한 짓을 벌이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거 아니야?’
한편에선 ‘다른 사람들 모두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없지. 끝까지 하다 보면 반드시 길이 나올거야.’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갔다.
약 4개월 여의 천신만고 끝에 2022년 5월에 드디어 채굴에 성공했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팬이 돌아가며 낮게 ‘윙—’ 하는 소리가 울렸다. LED 불빛이 켜지고 모니터에 첫 화면이 떴다. 연우는 숨을 죽였다. 몇 번의 오류와 재부팅 끝에, 드디어 화면에 숫자가 찍혔다. 긴장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L코인 0.0001 채굴 완료.”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됐다… 드디어 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밖에 없는 직원과 하이 파이브를 하며 얼싸안았다. 네 달 동안의 피와 땀, 그리고 불안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코인 시세가 출렁였다.
시작할 당시만 해도 80달러에서 맴돌던 L코인은 좀처럼 20달러 선을 넘지 못했다. 비트코인조차 3만 1천 달러 선으로 미끄러지며, 이달에만 16%가 빠졌다.
결정타는 루나-테라 사태였다. 하루아침에 시가총액 수십조 원이 증발하며, 코인 커뮤니티는 비명과 저주가 넘쳐났다. 설상가상으로 정부까지 칼을 빼들었다.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다시 크립토 윈터가 왔다. 기나긴 겨울이 시작됐다.
2022년 11월에는 세계 2위 거래소인 FTX 파산으로 이어졌다.
연우는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블록체인 아카데미는 뉴욕과 뉴저지까지 진출해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었지만, 고객들은 지켜보며 관망하고만 있었다. 돈은 한 달 한 달 물먹는 하마처럼 빠져나갔지만,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대형 컨설팅 회사에서 암호화폐 거래소 리서치를 담당하는 큰 딸의 말이 생각났다.
“아빠,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 다들 도덕적으로 엉망이에요.
특히 L코인 임원들, 지난번 싱가포르 콘퍼런스에서 보니까 휴가 나온 사람들인줄 알았어요.
가격이 오를 수가 없어요. 자기들이 보유한 물량을 계속 팔고 있거든요. 수익 모델이 형편 없어요.
아빠… 빨리 그만두세요.”
제가 이번에 자산운용 회사를 시작했어요.
연우의 고민이 깊어갈 무렵, 백 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아이고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황 회장 하고는 여전하죠? 저도 그 사람 때문에 미치겠어요. 약속은 왜 그렇게 밥 먹듯이 어기는지…”
“회장님은 요즘 어떠세요? 코인 쪽은 당분간 힘들겠죠. 저도 고민이 커요.”
"요즘 은행에 돈 넣어봐야 이자도 쥐꼬리잖아요. 그런데 제가 운용하면, 한 달에 30% 정도는 불려드릴 수 있어요. 제가 곧 미국에 가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연우는 잠시 망설였다.
사람이 쫓기거나 조급하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때 연우가 딱 그랬다.
“예, 회장님 오시면 당연히 봬야 죠. 언제 오실 계획이셔요?”
“최대한 빨리요.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사장님이 사람 몇 분 모아주시면 좋고요.”
전화를 끊고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백 회장은 다단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아무리 새 옷을 입어도, 그쪽 특유의 냄새는 지울 수가 없다.
‘금융 다단계라면… 그건 백 퍼센트 사고 나지. 나면 크게 터지고.’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손은 이미 백 회장과의 약속 날짜를 적고 있었다.
일주일 뒤, 백 회장이 웬 젊은 남자와 함께 미국에 왔다.
그녀는 여전히 화사한 옷차림으로 호텔 로비를 환하게 밝혔고, 최우수라 소개한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다. 큼지막한 에르메스 가방, 롤렉스 시계, 구찌 벨트까지. 한눈에 봐도 “돈”을 과시하는 차림이었다.
한인 타운의 호텔 커피숍. 최우수가 노트북을 열자 화면에 회사 소개서가 나타났다. 본인과 직원들 프로필을 보니 모두 내로라하는 증권사 출신 펀드 매니저였다. 약간 의심이 걷혔다. ‘이 정도 경력이라면, 적어도 사기 치지는 않겠지.’
다음 페이지부터 알록달록한 그래프와 숫자가 빼곡히 떠올랐다.
“사장님, 저희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AI 자동 거래 시스템은 네 가지 포트폴리오로 운영됩니다. 고위험 고수익, 중위험 중수익, 저위험 저수익,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적절히 섞은 균형형 상품이죠.”
그는 능숙하게 화면을 넘기며 이어갔다.
“지난달 저위험 상품의 수익률만 25%였습니다. 은행 이자가 몇 퍼센트죠? 1% 남짓이잖아요. 그런데 저희 시스템은 최고 월 40%까지 수익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한국의 몇몇 투자자분들은 1년이 지나지 않아 이미 원금의 두 배를 돌려받으셨습니다. 이건 실 계좌입니다.”
연우는 화면 속 그래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곡선은 마치 미끄럼틀을 타듯 매끄럽게 위로 치솟고 있었다.
연우가 웃으며 물었다. “이게 가능해요? 월가에서도 연 수익률이 30% 이상이면 베스트인데. 한 달에 그 정도라면, 너무 심하게 과장하시는 것 아니에요?”
최우수가 화면을 넘기며 웃었다.
“사장님, 저희 고객님들 가운데 현역 국회의원도 계시고, 로펌 파트너 변호사, 대학병원 교수도 있습니다. 이건 일부 명단인데—”
그는 엑셀 창을 띄워 이름과 직업이 적힌 리스트를 스쳐 지나가듯 보여주었다. 몇몇 항목은 모자이크 처리돼 있었다.
“보세요. 제가 이런 분들 상대로 장난쳤다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코인 쪽은 다르잖아요. 잘 아시잖아요?”
연우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래프의 곡선은 비현실적으로 매끄러웠다.
‘월 40%라니… 말도 안 돼. 그런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당당한데… 혹시 진짜라면?’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성은 ‘절대 안 돼’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다른 한쪽에선 ‘이쪽이라면 충분히 가능해’라고 속삭였다.
연우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고, 길증이 났다. 물컵을 몇번이나 비웠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그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선물 옵션은… 몇 퍼센트로 운용합니까?”
최우수는 기다렸다는 듯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
그래프와 숫자들이 빼곡히 깔린 화면 위에 굵은 곡선이 완만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저희는 다섯 가지 포트폴리오로 나눠서 관리합니다. 변동폭은 30% 이내로 제한하고, 자동 리스크 알람이 떠요. 그때 저희 트레이더들이 즉시 대응하죠. 일일 청산 리포트도 다 나옵니다.”
연우는 그래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흠… 최소 투자금은…?”
“없습니다.”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해하실 필요 없고요. 우선 저희 성과를 지켜보시고, 확신이 서면 그때 결정하시면 됩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백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 나도 몇 달 지켜봤는데 잘해요. 우리 딸 돈, 형제들 돈—다 맡겼어. 선물 옵션이 좋은 게 뭐예요? 가격이 내려도, 올라가도 돈 버는 구조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개미들만 털리는 거지. 결국 다 세력들이 그러는 거잖아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덧붙였다.
“돈 버는 것도 다 때가 있어. 이때 아니면… 기회는 사라져 버려요. 제가 광주에서 강남으로 올라올 때도 그랬어요.”
그 말에 연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고개가 끄덕여질 뻔했다.
‘가족 돈까지 넣었다고? 그 정도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야. 일리가 있어… 혼란스러울 때 과감한 사람이 결국 기회를 잡는 거잖아.’
그러나 가슴 한쪽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도 월 40%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백 회장이 허술하게 속을 사람은 아닌데, 그리고 거짓말로 사기 칠 사람도 아니고’
백 회장 남편은 강남에서 꽤 오랫동안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꽤 젊잖은 신사였다. 그 생각에 이르자 그의 마음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우에게 넌지시 한마디 툭 던졌다.
“아는 지인 분들 함께 자리 좀 만들어 보세요. 나머지는 내가 최 부장하고 알아서 할게요. 틀림없이 나중에 다들 고마워할 거에요.”
“네. 일단 피곤하실 텐데 좀 쉬시고, 저녁에 다시 통화하시죠.”
연우는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이유는 뭘까? 이럴 때는 움직이면 안 되는데…’
집에 돌아온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보… 코인 선물 옵션 거래에서, 월 40% 수익이 가능할까?”
그의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며 별관심이 없다는 듯 “가능은 하지요. 하지만 잃는 것도 말도 못 하게 많아요. 투자에 보장이 어딨어요? 보장한다고 하면, 거의 다 폰지지.”
순간, 연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폰지…’
두 글자가 망치처럼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동시에 낮에 들었던 백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우리 딸 돈, 형제들 돈 다 넣었다니까요. 사장님, 이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연우는 마음을 좀 추슬러 보려고 샤워를 했다. 그런데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아내 말이 맞아. 세상에 공짜는 없어. 폰지라면 끝장인데…’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속삭임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혹시 진짜라면? 내가 이번만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몰라.’
“여보, 식사해요.” 연우는 아내가 식사하라는 소리를 듣고 식탁으로 갔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코인하려면 선물 옵션이 뭔지는 알아야지요. 이건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한번 빠지면 정신 못 차려요. 아마 미국하고 한국에선 일반인들은 아직 선물 옵션 거래를 못할걸요.”
밥을 대충 마치고, 연우는 집 밖으로 나섰다. LA 저녁 바람은 싸늘했고, 낮과 밤의 온도 차가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래… 코인 사업을 하려면 선물 옵션이 뭔지는 알아야 해.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지.
경력도 화려한 친구들인데, 설마 그런 짓을 하겠어?
그래, 조금만. 아주 조금만 해보는 거야. 나는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어떻게든 버텨야 해 이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
연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침을 삼켰다.
“여보세요? 회장님, 내일 6시에 오늘 그곳에서 만나요.”
목소리는 최대한 담담했지만,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다음날 저녁, 약속 장소에 연우 혼자만 나갔다. 그는 아직 다른 사람을 소개할 자신이 없었다.
정수는 상냥한 목소리로 “고민이 많으셨죠? 처음엔 저도 그랬어요. 이런 거 없이 어떻게 돈을 벌겠어요?”
연우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 천천히 대답했다. “회장님 믿고, 조금만 넣을게요. 계약서 좀 보여주세요.”
연우는 최우수가 꺼낸 계약서를 쭉 훑어보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트코인 두 개를 보냈다. 약 5만 달러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백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장님, 잘하셨어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슬쩍 제안을 덧붙였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저희가 광고를 좀 할까 하는데… 사장님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돈은 우리가 다 낼게요. 사장님은 그냥 전화 오면 연결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떠세요? 내가 알아서 챙겨드릴게.”
“광고까지 하시게요?”
“미국은 광고가 쉽잖아요. 지금 아니면 늦어요. 지금 애틀랜타는 난리예요. 서울에서도 이제 다 그리로 직접 들어간다니까. 게다가 광고는 최 부장이 다 준비해 왔습니다. 이 친구 능력이 보통이 아니에요. 사장님, 이거 잘못되면 무서운 미국 감옥 가야 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뭐가 아쉬워서 이러겠어요?”
그 말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당신은 잃을 게 많은 사람이잖아. 감옥 갈 위험을 감수할 만큼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연우의 마음은 거의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돈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고, 가진 자일수록 더 깊은 탐욕에 사로잡힌다.
백 회장과 최 부장은 다음 날 곧바로 광고 계약을 마쳤다. 신문, TV, 라디오—한 달 동안 전방위로 광고를 내기로 했다. 후속 관리와 응대는 연우가 맡기로 하고, 며칠 뒤 그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첫 광고가 지면에 실렸다. 굵은 글씨가 신문 전면을 장식했다.
“AI 자동거래, 월 수익률 30% 보장!
당신의 자산, 이제는 AI가 불려드립니다.”
TV 광고는 더 요란했다. 번쩍이는 그래프가 화면을 가득 채웠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행 이자는 이제 잊으십시오. 월 30% 수익률! 이미 수많은 투자자들이 두 배, 세 배 수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반응은 싸늘했다.
신문을 본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고, TV 광고를 본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걸 믿으라고?’
광고는 사람들 불신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우의 오래된 고객들만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님, 광고 보셨어요? 그거 진짜예요?”
연우는 짧게 대답했다.
“네, 뭐 조금 알고 있습니다.”
몇몇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연우는 그들을 백 회장에게 연결시켰고, 몇 사람은 계약까지 맺었다. 계약서를 쓰며 그들은 같은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사장님 같은 분이 하셨으니 믿습니다.”
연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얼마 전 백 회장에게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회장님이 하셨으니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이 말은 어김없이 바뀐다.
“당신 믿고 했는데…”
사람은 언제든지 상황이 바뀌면 돌변한다. 가까울수록, 액수가 클수록 더하다.
백 회장과 최우수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처음엔 사소한 문제처럼 보였다. 배당이 이틀, 사흘 늦춰졌다. 그러더니 일주일, 보름… 차일피일 이유만 대며 지급을 미뤘다. 전화를 걸어도 “지금 회의 중입니다”라며 받지 않거나, 이내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연우 마은 점점 무거워졌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면서도 그는 또다시 2차로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욕심과 불안이 동시에 그를 밀어붙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이었다.
그놈이 끝내... 사고를 쳤어요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떴다.
“백정수 회장”
연우는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저예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흐느낌에 젖어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 꽂혔다.
‘터졌구나.’
“회장님,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세요?”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정수는 한숨 섞인 울음을 토해냈다.
연우는 귀가 멍해졌다. 마트의 소음이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렸다.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며칠째 배당을 늦추고, 연락도 끊고, 사무실에도 안 나오길래 수소문했지요. 그런데…”
정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음주운전으로 잡혔대요. 이번이 세 번째라 삼진아웃… 구치소에 있습니다.”
연우는 숨이 막혀왔다. 정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는 박종현이를 붙잡고 다그쳤지요. ‘바른대로 말 안 하면 너도 감옥 보낸다.’ 족치니까… 결국 다 털어놨습니다.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숫자도, 성과도, 전부 조작이었어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하게 흔들렸다.
곁에서 함께 카트를 밀던 아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술만 파르르 떨릴 뿐, 목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빨리 한번 들어오셔서 의논해요.” 이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이제는 정말 끝인가?’ 연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헛디뎌 잠시 휘청거렸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 그는 가장 빨리 가는 한국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공항까지 데려다준 그의 아내는 남편이 차 문을 열고 나서자 함께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여보, 나 혼자 어떻게? 무서워요. 당신 너무 불쌍해…”
‘이런 상황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니…’ 연우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책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8월의 한국 날씨는 끔찍하게 더웠다. 그런데 연우 마음은 서늘했다. 숨 쉴 때마다 가슴에 찬 공기가 흡입되는 것 같았다.
백 회장 사무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가장 먼저 고함을 친 건 그녀의 오빠.
“아니, 일이 이렇게 될 동안 아무도 몰랐단 말이여? 이게 말이 되는 것이여?!”
주먹이 탁자 위를 세차게 내리쳤다.
“아무리 그려도 그놈을 빼내서 붙잡아놔야지. 돈을 어디로 얼리 빼돌렸는지 확인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여!”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고, 각 사람의 말이 꼬리를 물며 흥분만 더해갔다. 누구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말은 돌고 돌았다. 분노와 허탈만 가득했다.
정수가 입술을 깨물며 정리했다.
“내일 그놈 면회 날이에요. 같이 가요.”
그 말로 회의는 끝났다.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했지만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때 불현듯,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허무가 솟구쳤다.
“죽고 싶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힘들어서 죽는 게 아니구나. 희망이 안 보여서 죽음을 택하는구나.’ 깊은 우울감이 몰려오며 무기력해졌다.
의욕을 상실하니 잠은 금세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섯 명이 경기도 의왕에 있는 서울 구치소로 최우수의 면회를 갔다. 그는 아직 미결수 신분이라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신분을 확인하고, 사진 촬영과 녹음은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휴대폰은 보관함에 맡겼다. 얼마 후 그가 나왔다. TV나 영화에서 본 죄수복을 입지는 않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그의 모습을 보니 분노보다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한심하고 나도 한심하다. 다 똑같지 누가 누굴 뭐라 하겠나’
정수 오빠가 욕을 하며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재촉하자 그가 유창하게 대답한다.
“제가 나가면 모두 갚을 수 있습니다. 이미 돈이 들어오기로 약속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제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모두 중단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러니까 고소는 하지 마시고요. 일단 제가 나가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그래 광고를 봤던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떠나자. 이제 무슨 미련이 있겠나.
다음날, 연우는 바로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정리합시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아내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 앞에서 여자는 더 강해지고, 현실적이 된다. 그것이 연우에게 제일 큰 힘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다행히 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파트타임 자리를 구했다. 이력서를 내자마자, 바로 다음날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연우는 얽히고설킨 매듭들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고객들과의 정산, 미뤄둔 약속, 남아 있던 계약서들… 모든 걸 마무리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가진 것을 모두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가족뿐이었다.
이후 연우는 한인 택시 운전을 하고, 쉬는 날에는 우버를 했다. 아내 역시 주 7일 카페에서 일했다. 기술 없는 노동이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활이 유지되지 않았다.
택시 일을 하며 연우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알래스카에서 온 손님들이 자주 탔다.
“손님, 알래스카 춥지 않아요?”
“사람들이 알래스카 하면 얼음뿐이라 생각하는데, 날씨 좋아요. 요즘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예전보다 훨씬 따뜻합니다. 거기 들어가서 열심히 하면 누구나 돈 벌어요. 특히 원주민 마을에선 뭐든 하면 됩니다.”
순간 연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서 택시로 버티느니, 차라리 알래스카로 가는 게 나을지 몰라…’
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알래스카로 떠날까? 난 택시 운전하고, 당신은 카페하고.”
아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 정말이에요?”
“그럼. 알래스카에서 온 손님들이 한결같이 살 만하대.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더 늦기 전에, 우리도 뭔가 새로 해야지.”
택시는 우버나 한인택시 모두 전혀 돈이 안 되는 구조였다. 기사는 모든 것을 오롯이 책임져야 했다. 사고나 교통 단속에 걸리기 일쑤였다. 연우는 어떻게든 이런 먹이사슬 구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알래스카로 떠나기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텍사스 오스틴에 사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요즘 뭐 하세요? 사업은 잘 되시고요?”
“망했다. 요즘은 택시 운전해. 알래스카에 갈까 생각 중이야.”
“지금 이때, 관광이요?”
“관광은 무슨 관광이냐. 아예 살러 가는 거지.”
후배가 잠시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 여기 텍사스가 딱이에요. 마침 괜찮은 카페가 하나 나왔어요. 주인이 다음 달 급히 루이지애나로 이사 가면서 판다네요. 저한테 권했는데, 전 그냥 월급쟁이가 좋아서 패스했어요.”
연우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내가 돈이 어딨냐. 이제 하나도 안 남았어.”
“형님, 걱정 마세요. 그 사람 워낙 급해서 할부로 해준다니까요. 날짜별로 수표만 끊어주면 돼요. 제가 아는 사람이니 그렇게 해줄 거예요.”
순간 그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알래스카 대신… 오스틴? 이건 또 뭔가?’’
어둠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맞는 말이었다.
카페 계약을 마쳤다. 아시안 마켓 안에 있는 테이크아웃 위주로 하는 작은 카페였다. 카페 이름은 아이들이 만들어 주었고, 로고 디자인은 막내가 했다. 그리고 작은 1 베드룸 아파트를 구했다. LA의 반값도 안 됐다.
연우는 승용차에 짐을 잔뜩 싣고 아내와 함께 운전하며 오스틴으로 향했다.
카페 명의는 모두 아내 이름으로 했다, 연우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 사업할 수도 없었지만, 이젠 그럴 자신도 없었다.
아내와 차를 오스틴에 두고, 그는 비행기를 타고 LA로 돌아왔다.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다음 해 5월까지 약 8개월 정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택시 운전을 계속하며, 캘리포니아의 삶을 정리했다. 두 달에 한번 정도 아내에게 필요한 카페 재료들을 차에 잔뜩 싣고 다녀왔다.
왕복 약 3,000 마일 정도 되는 긴 여정이었지만, 아내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이 좋았다. 차에 싣는 짐이 갈수록 많아졌다. 카페는 점점 활기를 더해갔다.
아내는 실로 오랜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면 아쉬워했고, 남편이 올 때엔 틈나는대로 전화로 “어디쯤 와요?” 궁금해했다.
2025년 5월 1일, 연우는 캘리포니아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아내가 있는 텍사스 오스틴으로 떠났다.
LA에서 텍사스로 오는 길에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진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이 저 멀리 지평선 위에 점으로 찍혀있다. 길 옆에는 웬만한 건물 크기의 바위들이 불규칙함 속에서 규칙을 이루며 조각상처럼 퍼져있다. 거친 들이 나왔다가, 소와 말이 풀을 뜯는 광경도 지나친다.
마치 미술관에서 하루 동안 수채화, 유화, 수묵화, 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루트 66.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려고 개척자들이 지났던 길. 연우도 같은 심정으로 이 길을 지나고 있다.
그는 긴 시간 이 길을 통과하며 상념에 잠겼다.
'인간은 절대성의 토대 위에,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세워 놓고, 상대적으로 반응하며 사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들이 상대적으로 반응하여 세운 모델 하우스인 거야.
겉은 화려하고 그럴듯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지. 그런데 거기서 살 수는 없어. 단지 구경만 하고 다시 돌아가야 해.'
'사람은 이렇게 쭉 뻗은 절대성의 도로 위를 운전하며 가는 거야. 도로 곳곳에 보편성이라는 표지판이 길을 안내하고,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운전하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그래... 나는 지금까지 이런 원칙을 무시했어,’ 후회가 몰려왔다.
약 1,500 마일! 30시간을 운전해야 도착하는 꽤 먼 거리지만, 목적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LA에서 보면 떠나는 거지만, 오스틴에서는 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절대성 위에서 보편적 가치를 세워놓고 상대적으로 반응하며 살고 있다.
LA에서 오스틴은 누가 봐도 꽤 먼 거리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힘이 났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거리는 멀지만,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지나 보니 그랬다.
내 생각과 느낌은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매번 달라져 믿을 것이 못됐다.
나 왔어.
12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지치고 힘들었다. 기다리던 아내가 환히 웃으며 나를 꼭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때 나는 아내의 아들이 되었다.
스토브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다. 편안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애들도 다 컸고, 당신 혼자서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오늘 자다가 떠나도 별 아쉬움은 없네”
아내가 대답했다. "난, 당신 불쌍해질까 봐 먼저 못 죽어. 당신,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푹 쉬어도 돼. 내가 먹여 살릴게"
아내의 얼굴이 내 눈에서 흐려졌다.
아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이런 분위기는 조금 낯설었다.
"밥, 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