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 회복의 시작

본질은 거의가 엇비슷하다.

by 물 긷는 자 연지신
아직 연락온 거 없지?

벌써 이틀째 둘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다. 문제가 생겼다면, 학교에서 연락을 줄텐데 그조차 없다. 대학 들어간 지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궁금하기 그지없다.


‘시험 준비 하느라 너무 바빴어. 미안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까지 연락 안 되면, 가봅시다.”

“그래요.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둘째는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개 Yes No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자랄 때부터 우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단순히 영어 소통의 문제라기보다 혼자 무언가 생각하고, 책에서 답 찾는 것을 좋아했다. 꼭 도움이 필요할 때만 먼저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뉴욕의 유명 출판사에서 편지가 온 적이 있었다. 주소는 맞는데 수신자가 모르는 이름이라, 봉투를 열어보니 ‘귀하의 출판의뢰서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불가피하게 거절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이런 내용의 답장이었다. 자기가 지은 필명으로 유명 출판사에 ‘책을 내고 싶다’고 출판 기획서를 보낸 거였다.

정치에도 유난히 관심이 커 투표장 자원봉사, 권력이나 폭력에 대한 항의 집회, 인권, 여권 신장, 성소수자, 이민자 권익 등의 행사에 틈나는 대로 참석했다. 얼마 전에는 ACAB (All Cops Are Bastard. 모든 경찰은 악당이다.) 피켓을 직접 만들어 항의 집회에 참석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방문했을 때는, 수업도 빼먹고 참석할 정도였다.

호기심이 많아 한동안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를 조사하더니 쇼핑몰에서 가방을 들고 가는 어떤 부인을 보고,

“저 가방은 가짜 루이비통이야. 앞에 장식이 틀려.”

“어떻게 알아?”

“보면 알아. 약간 달라.”

이런 식이었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박물관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아이였다. 남들이 뭐라든 자기 생각이 먼저였고, 세상의 통념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날 아침이 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둘째한테 다녀올게요. 오늘 갔다가 얼굴만 보고 바로 올 거니까, 내일 출근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 하루 잘 맡아주세요.”


둘째는 올 4월, 스탠퍼드에 합격했다. 지금까지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그 학교엔 자기와 비슷한 학생이 많았는지, 제법 잘 적응하는 듯해 한시름 놓고 있었다.


학교까지 차로 여섯 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무사한 것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중간쯤 가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광고 전화인가 싶어 넘기려다, 지역 변호가 학교 쪽이라 받았다.


“Hello?”

학교라고 밝히며, 딸 이름을 대며 아빠냐고 묻는다.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 애한테 무슨 일 있나요?” 떠듬거리는 영어로 묻자,

뜻밖에 “She is safe. 안전합니다.”라고 말한다.

‘무슨 사고라도 났다는 건가? 당연히 안전해야 하는데... 무슨 일이지?’ 거듭 물어도, 정확한 설명은 없다. 그저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야 합니다”라고 반복했다.

“지금 가는 중입니다. 오늘 오후에 도착해요. 아이 얼굴만 보고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래 비울 수 없어요.”

그러자, “내일 아침 미팅에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도착하면 기숙사 관리 책임자에게 설명 들으라며 전화를 끊었다.

설명은 않고 자꾸 돌려 말하니,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안전하다’는 말이 이렇게 답답하고 두려운 말이 될 수 있었다.


오후 다섯 시쯤 기숙사에 도착했다. 학생 관리 책임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젊은 얼굴로 교수는 아닌 듯했다.

서로 통성명이 끝나자, 그가 다시 물었다.

“학생 부모님이시죠?”

“그렇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포천트리… (Unfortunately)”

미국 사람들은, 듣기 불편한 말을 할 때면 꼭 이렇게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 거리며 제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야…’

그의 입술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Suicide? 내가 잘못 알아들었겠지…’ 이 말에 얼어붙었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천천히 말해 주세요.” 입은 타들어 가는데 침은 자꾸 삼키려 드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3일 전에 기숙사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다, 사감이 알게 됐습니다.

곧바로 학교 경찰에게 인계되어, 지금 대학 정신과 병원에서 보호 중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일 아침 위원회에서 학교의 결정 사항을 부모님께 전달할 것입니다.

내일까지 학생 짐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암을 진단받고 몇 달 못 산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가 우리를 딸의 기숙사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함께 찍은 가족사진과 딸아이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달 전, 내가 직접 옮긴 그대로였다.

내 딸만 없다.

가슴 깊은 데서 꺽꺽 울음이 올라왔지만, 끈을 놓으면 바로 무너져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둘째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

사람들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어린애 하나가 혼자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밑에 작은 글씨로 ‘Happy people make me miserable…(행복한 사람들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원래 둘째 글씨는 인쇄한 글씨로 보일 정도로 반듯한데, 이 글씨는 휘갈겨 쓴 데다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단어가 점점 작고 왜소해졌다.

일기도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 두려움, 잘하고 싶다는 욕심 등 자기 생각과 감정들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제서 나도 아내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혼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나,

잘하고 있는 줄

그리 믿고 싶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잠자코 있었더니,

먼저, 곁에 있어야 했다.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만일 이게 우리 딸 유품이었다면…’

순간,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마음이

무너졌다.


짐을 정리하며, 큰애한테 전화했다. 큰애는 둘째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었다.

“동생이 자살하려고 했어. 아는 거 있니?”

큰애가 어렵게 대답했다.

“학교에 들어가서 너무 좋았대. 섬머 캠프가 끝날 때쯤 되면서,

친구들이 모두 떠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너무 우울해서, 잠을 거의 못 잤대.

며칠 전에 갑자기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전화했어.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설득했지. 이번 주말에 갈 테니 참으라고 했어. 나도 무서워.”


둘째한테 갑자기 우울증이 왔다. 그 아이에게는 이런 염세적인 기질이 충분했다. 감수성이 예민했고, 쉽게 상처받았다. 자신에게 후하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이 많은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이해되지 않았다.

전말이 대략 그려졌다.


다음날 아침 10시, 학교 관계자들과 미팅을 가졌다. 6명이나 나왔다.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8월 20일 오후 7시경, 따님의 자살 시도를 알게 됐습니다.”

말을 이어갔다. “학생은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워서 친구에게 알렸고, 친구가 곧바로 기숙사 사감에게 신고했습니다.”

“글에 따르면, 여러 곳에서 약을 구입한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먹으면, 며칠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실패하면 다음 단계로 칼로 손목을 긋는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어서 “학교 위원회는 학생의 휴학을 결정했습니다. 학생의 건강을 위해, 1년간 치료받고 다시 복귀하기를 바랍니다.”

일방적인 결정을 통보했다. 우리 의견은 요식 절차였다. 아이가 아직 미성년이라, 부모 동의가 필요했다.


대략 결론은 예상됐지만, 딸아이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 짤막하게 대답했다.

“딸의 의견을 듣고 답변하겠습니다.”


학교 위원회와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딸을 만나고 싶었다. 학교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을 찾았다. 이곳은 이중 철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 안은 매우 추웠다. 저쪽에서 딸이 보였다. 얇은 옷을 입고, 덜덜 떨면서 왔다. 오자 마자, 엄마한테 안겼다.

“여기 너무 추워”

보자마자 처음 한 말이었다.


경찰이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수갑을 채워 짐짝처럼 차에 싣고 이리로 데려 왔다. 병원에서도 아무 설명 없이, 얇은 환자 복으로 갈아입으라 하고 가뒀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그때 딸은 생리 중이었다.


병원에는 중증 정신병자들로 가득 찼다. 하루 종일 웅얼거리는 젊은 여자,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 가끔 비명소리도 들렸다. 이곳에 며칠 있으면 정상적인 사람도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다.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무기력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은 문명사회라고 결코 덜하지 않았다. 더 교묘했다.


“그냥, 답답해서, 글을 써서 알려주고 싶었어. 꼭 그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친구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학교에 신고했어.”

말 끝을 흐린다.


대화하며

내 마음 털어놓고 싶었는데,

힘들고 아프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던 거지.

고개만 끄덕여 주었어도

아무 일 없었을 거야.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어.

안전을 위한다지만,

지들이 불안해서...

요주의로 분류한 것뿐이지.


아내가 딸의 머리를 감겨주고 빗겨주었다. 딸은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나는 딸이 좋아하는 피자와 보바를 사서 면회실에서 함께 먹었다.


다음날 10시 미팅에 참석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내 말을 들었다. 미리 통역을 요청했다. 할 말을 해야겠다 다짐했다.

“어제 딸과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딸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우울증이 왔습니다. 자살할 마음보다 그저 자기 마음을 알리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전문가 소견으로 따님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안전을 위해 치료에 전념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모님을 만나 안정적인 상태지만, 혼자 있으면 다시 불안정해져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치료받은 후에 다시 복귀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딸은 학교에 대해 무척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상태가 더 심각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수업을 병행하며 치료받도록 해주십시오.”

간청했다. 학교는 거절했다.


병원에서는 '지금 퇴원할 수 없고 준비되면 연락해 줄 테니 그때 딸을 데려갈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의 선택권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하고 정당하니 단지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권유의 모습을 한 강요였고 폭력이었다. 권력의 본성은 언제 어디나 비슷했다.


가장 힘든 것은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생명을 빼앗기는 것에 버금가는 고통이자 분노였다.

사람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상실보다 폭력이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올게. 따뜻하게 하고 잘 있어. 모든 게 잘될 거야. 일 년 휴학한다고,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 아무것도 없어.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푹 쉬어. 오히려 잘됐어. 알았지?”

“응. 알았어.” 짧게 대답한다. 제발 마음에 더 큰 상처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차갑고 낯선 병원에 딸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나보내는 마음, 두고 떠나는 마음 모두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최악은 면했다는 안도감에 위로가 됐다.


9월 첫 토요일, 노동절 연휴를 맞아, 아침 일찍 딸을 보러 떠났다. 평일에는 면회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으로 제한되지만, 휴일에는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육중한 철문 너머 –

사랑하는 딸이 기다린다.

문이 열려야

안을 수 있다.


저 철문으로

마음이 더 가까워졌다면,

잘된 일일까?

가로막혀야,

소중한 것들이 보인다.

그제서,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3일간 연휴 기간 동안 먹고 싶은 것 함께 먹고, 하루 종일 휴게실에 같이 있었다.

TV도 없고, 스마트폰으로 볼 것도 별로 없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했다.


나와 아내가 없어도, 가게는 아무 일없이 잘 돌아갔다.

평소 문제로 생각했던 것들이 이때는 작아 보였다.

노동절 연휴 이틀뒤, 병원에서 ‘딸을 데려가도 좋다’고 연락이 왔다.


딸이 오는 차 안에서 “아빠, 고양이 키우고 싶어.”

지금까지 절대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흔쾌히 승낙했다.

'네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니?'


큰애도 둘째를 돌본다고 휴학하겠다고 해서 집에 왔다.
가족이 다시 완전체로 모였다.

겉으론 완전체였지만,
부서진 조각들이 겨우 맞닿아 있는 정도였다.

아이들은 이미 부모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자랐고,
대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터였다.
부모는 아직 달라진 아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비가 오고,
땅이 굳어지려면,
마땅한 수고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
우울증에 대해서 낯설었다.
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은 정도로 여겼다.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째는 집에 돌아와 점점 더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 모든 원망과 분노를 가장 가까이 있는 내게 쏟아냈다. 갑자기 울며 통곡하다가 소리를 지르곤 했다.

“무슨 얘기야? 뭘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 차근차근 말해봐.”

“어렸을 때, 엄마가 나한테 ‘넌 왜 이걸 이렇게 해?’ 했잖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잘못을 고쳐주느라 그런 말 한 적이 있었겠지. 그게 상처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 아득히 잊어버린 그 일을 꺼내며 분노하고 있다.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한 채 예전처럼 반응했다.

“그게 언제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 그래? 그리고 그럴 만하니까 그랬겠지.”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큰애와 막내까지 둘째 편을 들었다.


“엄마가 그때 내 머리를 한 대 쳤어. 기억나? 내가 애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아빠는 항상 그렇게 말해. 제발 좀 가르치려고 하지 마.”


말도 칼이 됐다. 예리하게 마음을 도려내며 상처를 냈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몇십 년이 지나도 낫지 않고, 도질 때가 많다. 나는 지금 당장의 갈등보다, ‘이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으면 어떡하지?’ 이 생각에 더 두려웠다. 나와 남편, 그리고 세 아이는 두 패로 갈려 점점 더 등을 돌렸다.


백 번 양보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발버둥 치며 사는데, 알아주기는커녕 원망이라니. 속으로 ‘니들이 배가 불러 그런 게지…’ 하는 생각에 내 자식이지만 서운하고, 괘씸했다. 이제 사리분별할 나이도 되었건만, 왜 그렇게 자기밖에 모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오만 정이 뚝 떨어졌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정말 자식이라도 안 보고 살겠구나.’


나의 모성애라는 것도 결국 내 위주였다. 자식이 옳게 반응하지 않으면, 이상적인 엄마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랬다.


TV 장식장 위에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에서는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다시 웃을 수 있을까? 그날이 올까?’


둘째를 보살핀다고 휴학까지 한 첫째도—

하루 종일 친구들만 만나러 다닌다.

'휴학은 대체 왜 한 거니?‘이럴 줄 알았다니까…’

걱정이 하나씩, 현실이 되어갔다.

그것도,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때,

남편이 '수정 씨한테 연락해 보는 게 어떨까?' 의견을 물었다.

수정 씨는 남편 대학 친구의 아내였고, 대학 병원 간호사였다. 지금은 이혼하고 딸과 단둘이 산다.

그녀의 전남편, 그러니까 남편의 친구인 태수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천재와 자폐의 경계에 있던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웠다.


남편 말로, 고등학교 시절 인성 검사를 받았는데, 맞는 직업이 지구에 없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넌 화성에서 살아야겠다”며 혀를 찼단다.

그는 한때 오토바이에 미쳐서 나사 하나까지 분해해서 방 안에 죄다 늘어놓고, 다시 조립하고 또 분해하기를 반복했다. 기억력도 탁월해서, 한번 보면 마치 사진처럼 다 외웠다.

대기업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잘 다니다가, 어느 날, “더는 비전이 없다”며 퇴사하고는, 샌디에이고의 유명 골프 스쿨에 등록했다. 수정 씨는 집을 팔아서 학비를 댔고, 혼자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학교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며 집을 나갔다.

몇 달 뒤,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돌아왔다. 태수는 늘 이렇게, 자기 기분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주변에 많았다.


남편이 수정 씨한테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둘째가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 와 있어요.

우울증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서로 대화가 이어지더니,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녀와 함께 근무하는 선배 정화 씨도 함께 나온다고 했다. 수정은 정화를 ‘언니’라 부르며 따르는 선배 간호사였고, 나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우리 집 근처에 살았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막막하기만 했는데,

‘찾으면 길이 있다’는 말처럼,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말을 마치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어요.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화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둘째도 그랬어요. 아빠하고 갈등이 말도 못 하게 심했어요. 나중엔 아빠를 사람 취급도 안 했다니까요. 휴대폰에 아빠 이름을, 세상에 sperm donor(정자 기증자)라고 했으니...”

그녀의 남편은 미국 생활이 싫다며 한국으로 돌아갔고, 가끔 영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들를 때마다 가족들과 부딪쳤다.

“결국, 애가 학교를 아예 자퇴했어요.

‘이렇게 사느니 죽겠다’고 유서를 써놓고,

연락도 끊고 나가버렸어요.

나중엔 거의 폐인처럼 됐죠.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해결돼서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요. 벌써 내년에 졸업하네요.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고개를 설레 설레 젓는다.


이번엔 수정이 말을 이었다.

“우리 딸도 비슷해요. 고등학교 때는 미국 탑 10 안에 드는 골프 유망주였고,

대학도 좋은 데 갔고요. 그런데 슬럼프가 오더니, 엔트리에서 계속 빠지는 거예요.

이게 계속되니까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어요.

출근하면서 ‘이 아이가 오늘 무슨 일을 저지르진 않을까’

매일매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전화로 확인 전화도 자주 했어요. 혹시 무슨 일 있지나 않을까 해서…’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텍사스의 작은 대학으로 옮겼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 ‘부모 상담 교육’을 권했다.

“그게 도움이 많이 돼요. 저도 교육받으며, 아이를 더 이해하게 됐어요.”

다행히 교육 장소는 집에서 가까웠다.

그들과 헤어진 뒤, 곧바로 등록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6개월 간 진행되는 교육이었다. 이민자 가정의 갈등을 다루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었고, 비용도 받지 않았다.

찾으면 길이 있었다.


상담 첫날, 담당 선생님과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은 첫마디부터 강조했다.

“지금까지 가지고 계셨던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긴 미국이에요. 애들도 힘들어요. 어쩌면 부모님보다 더 힘들지 몰라요.”

그 말을 들으니 속에서 뭔가 불쑥 치밀었다.

‘지들이 왜 힘들어요. 힘들면 내가 힘들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다.


선생님은 계속 말했다.

“의식적으로, 애들한테 ‘많이 힘들지?’

처음엔 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세요.

놀랍게 생각이 바뀝니다.”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주에 뵐게요.”


정말 그랬다. 갈등은 대부분 ‘내가 너보다는 더 힘들다.’에서 시작됐다. 물론 내가 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상대방도 힘들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했다.


선생님은 또 하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춘기 애들은 맹수예요. 자기 영역에 무단 침입하면 처음엔 으르렁거리다,

결정적인 순간엔 물어뜯어요. 상대가 부모든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말도 함부로 했다.


한 번은 너무 괘씸해서, 쿠션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둘째가 말했다.

“엄마, 아동 학대로 신고할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래! 신고해. 신고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정말 신고했다.

5분도 안 되어,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경찰 두 명이 권총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들은 신도 벗지 않은 채ㅡ 방 안을 쭉 훑어보고, 둘째에게 물었다.

“네가 신고했니? 나이가 몇 살이지?”

미성년자인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음을 파악하자, 짧게 말했다.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 마음이 있는 대로 황폐해졌다.

‘신고한 전화기도, 이 집도… 다 내 건데.

네가 무슨 권리로…

염치가 있다면,

이럴 수 없는 거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

분노, 회의, 자책, 원망...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되고 부정당하는 느낌.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아픔.


‘내가 지금까지 왜 살았을까?’

나도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먼지가 되어 어디론가 흩어지고 싶었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온전히 부모 탓으로 돌렸다.

걸핏하면, “그때 그랬잖아. 그래서 이렇게 됐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 지들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고, 모든 게 내 탓 내 잘못이었다. 내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집 애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루 종일 짓눌려 심신이 너덜너덜해졌다. ‘폭풍이 언제 지나갈까? 지나가기는 하는 걸까?’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둘째의 일탈적인 행동은 끝없이 계속 됐다. 하루는 일하고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오니, 부엌이 온통 어지럽혀 있었다.

처음엔 좋게 이야기했다.

“얘, 한 가족이면 서로 배려해야지. 이렇게 어지럽히면 어떡하니? 엄마가 집에 와서 이런 거 보면 너무 힘들어.”

역시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이니까 나도 여기를 쓸 권리가 있어. 내 일이야. 상관하지 마.”

“여기는 내 집이야. 그런 얘기하려면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자기 고양이를 데리고 정말 나갔다. 황당했다.

‘가면 어딜 가? 곧 돌아오겠지.’


일주, 이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큰애를 통해 사정 사정하니 그제야 들어와 줬다.

매사 이런 식이었다. 같이 붙어 있으니 갈등은 좁혀지기는커녕 더 깊어졌다.

이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무조건 항복! 방법이 없다.

자식은 내게 가장 큰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가장 큰 아픔과 고통도 주었다. 자식은 원래 존재 자체가 그랬다.


나한테 거슬리는 행동, 말 그리고 내가 애들을 고쳐보려는 시도, 도움 되는 말, 심지어 위험해 보이는 것 무엇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애들에 대해 죽기로 했다.


아이들도 부모 잔소리가 잘되라는 말인 줄 안다.

문제는 항상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데 있었다.

마음 상하면 문을 닫는다.

한번 닫힌 마음엔 어떤 말도 들어가지 않는다.


옳고 그름,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옳은 말도 잘못 전달되면 폭력.

이게 본질이었다.


병든 곳을 알아야 치료된다.

내 잘못 -

내가 다른 사람을 고칠 수 없고, 바로 잡을 수 없다.

항복하고 포기.

마지막 선택지.


참는 게 사랑이고 신뢰였다.

조금씩 평화가 왔고,

회복이 시작됐다.


학교로 돌아갈 무렵, 둘째는 복학 등록 절차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다.

‘학교의 도움으로 저는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의 정상이라는 전문의 소견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고양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고양이는 제게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학교에 복귀해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제 학업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학교는 둘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 대학원생들에게 제공되는 단독 스튜디오를 대학 4년 내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조치했다.


학교에 돌아간 뒤, 가끔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온다. 전에는 드문 일이었다.

며칠 전에는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 여권을 가져다줄 수 있어? 인턴 하려는데 여권이 필요해.”

남편은 그날로 운전해서 가져다주고, 바로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피곤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

내가 죽으니 그제야 끝났다.

겉모습은 제 각각이라도 속내,

본질은 거기서 거기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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