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억되느냐!
형님, 지금 출발해요.
청량리 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처가댁으로 향했다. 겨울 중앙선 철도 여행은 20대 초 설렘 가득한 시절로 데려갔다.
차창 밖은 온통 흰 눈 - 양평을 지나면 탁 트인 한강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살얼음이 있고 그 위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여길 지날 때면, 대학 시절 MT와 캠핑 다니던 기억에 잠기곤 했다.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발라드 가요와 같은 두근거림.
꿈도, 시간도 많던 도무지 지칠 줄 모르던 시절.
‘시간을 헛되이 의미 없이 보낸 것은 아닌가?’ 잠시 우울해진다.
지금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애들 키우며, 먹고 산 것 외에 특별히 의미 있고 보람된 기억이 없다.
그저 사는데 쫓겨-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새 제천 역에 도착했다. 생전 변할 것 같지 않은 시골 소도시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 고층 아파트가 꽤 많이 들어섰다. 역 청사도 새로 단장돼 깨끗하고 주변도 한결 깔끔하다.
처남이 차를 몰고 마중 나왔다.
“이 서방, 고생 많았네. 어서 와. 애들하고 갸는 잘 있지?” 동생인 아내 안부를 묻는다.
처가댁은 제천 역에서 청풍 방향으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길이 빙판이지만, 처남은 능숙하게 운전한다. 전에 휴가 와서 들리곤 했던 골프 연습장이 아직 있다.
"저기 아직도 있네요."
"요새 여기도 골프가 난리여. 그때보다 훨씬 잘돼."
당시엔 만원 내고 하루 종일 쳤다. 중간에 밥 먹으러 다녀와도 사장님이 인심 좋게 다녀오라고 했다. 맥주 한 캔 들고 와서 골프채를 휘두르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도착하니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두 분 모두 많이 야위시고 쇄약해 보였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친어머니를 만났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이것은 오랜만에 재회한 그리움 때문도, 두 분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만도 아니었다.
내 모습을 봤다. 지난 세월의 흔적.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나에 대한 자책과 안타까움이었다.
장모님의 치매 증세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나를 알아보시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둘째 아는 대학 들어갔어?”
전에 둘째와 외할머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할머니, 이게 뭐야?”
“냄비 방석.”
이렇게 수도 없이 반복됐었다.
그때는 할머니와 손녀의 오가는 정으로 따뜻하고 뭉클했지만, 지금은 두 분의 외로움, 고달픔에 가슴 시렸다.
오이 농사는 그만두고, 지금은 소를 키우고 계신다. 소 키우는 것이 훨씬 손이 덜 가기 때문이다.
‘애들이 저 소들을 가까이 보면 참 좋아하겠다.’
‘두 분도 참 우리가 그리웠겠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때, 오이를 따서 정리하던 농기구 창고도, 밖에 옥수수 밭도 그대로 있었다.
장인어른이 저녁 식사 중에 말씀하셨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안 되는데, 먼저 죽게 생겼으니 큰일일세.”
이제, 장인어른은 아픈 장모님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 산소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어 일찍 떠났다. 아쉬워하시는 두 분께 인사드리고 집을 나섰다.
장모님은 시장에서 시루떡을 한 말 주문하셔서, 어머니께 전해 드리라고 건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여름이라면 찰 옥수구라도 드릴 텐데.”
좀 더 주고 싶은 마음. 진심은 언제나 울컥함이 있다.
광명에 도착하니, 동생이 벌써 와있었다. 어머니와 셋이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돌아가신 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멈춰 서있는데, 한해 한해 숫자가 늘어난 데 대한 죄책의 무게인가? 그 빈 시간에 대해 이렇다 할 기억이 없어서인가?
산소에 도착했다. 아버지 산소는 선산 입구 초입에 있다. 연배 어른들 중에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돌아가셨는데, 이제 그분들 모두 이곳 어딘가 흩어져 계신다.
봉분이 꽤 낮아진 것 같다. 이 또한 세월의 무게인가?
동생한테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애들이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챙길 것 같지도 않고”
“그러게, 더 늦기 전에 손 써야 할 텐데...”
내가 태어난 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미국에 온 지 벌써 11년이 흘렀으니, 얼마 지나지 않은 빠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세대만 해도, 밥 굶은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는 짧은 시간 안에 정말 큰 일을 해냈다.
해방을 겪었고, 태평양 전쟁, 625 전쟁, 419 학생혁명, 516과 월남전, 80년 민주화 시절과 최근에는 IMF까지 온몸으로 겪었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시절을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게 지나올 수 있을까?
지금 나와 우리 애들이 누리는 혜택은 아버지 세대가 이룬 결실이었다.
너무 힘들 때,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이 간절했다.
비록 병들고, 힘없어도
‘지금, 죽을 만큼 힘들어요.’
맘껏 토해낼 수 있을 텐데,
그저 내 말 들어주기만 해도
그것으로 족하다.
아버지는 내 삶에서 감사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계속 남아서 의미가 되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되느냐’였다.
내 삶도 그리 의미 없지는 않겠구나…
마음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췄다. 우울감도 저만치 물러가고 있다.
학교 다닐 때, 자주 암송하던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떠나기 전, 아버지 산소를 돌아보니,
설악산에서 내게 손짓하던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