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 출근길부터 몇 번을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왔다.
약을 안 먹어서, 우산을 안 챙겨서, 가는 길에 마실 커피 텀블러를 놓고 나와서, 정신없이 나오는라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나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견하고 운동화로 바꿔 신기도 2번이나 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아침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이미 회사는 늦었다.
아 몰라.. 그냥 될 대로 되라지.
반은 포기한 마음으로 지하철역으로 나섰다.
늦은 시간이라 한산할 줄 알았더니만, 개찰구를 지나자마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붐 마이크처럼 생긴 것들이 있고 카메라도 있고 뭔가 촬영 중인가 보다.
안내 표지판으로 지하철영화제 촬영 중이니 카메라를 응시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이런 인디 영화 촬영장을 보면 항상 마음이 설렌다.
취업준비로 마음만 심란했던 대학 4학년이 갓 된 2005년의 봄.
삐걱삐걱 걸어왔다던 내 모습과 마찬가지로 저 멀리 골목 끝에서, 나보다 더 삐걱거리며 걸어오던 그 아이가 그 해 나의 봄이었다.
얼마 전 조회수도 올라가지 않는 인기 없는 싸이월드에 오랜만에 접속했다.
그날은 웬일인지 쪽지함까지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쪽지가 와 있었다. 이미 한 두 달은 지난 쪽지였다.
"혹시 예전에 CGV에서 일하시지 않으셨나요?"
끝.
가타부타 말이 더 없다.
함께 근무했던 사람인지 뭔지... 그래서 답장을 보냈다.
"네, 맞는데 누구세요?"
"아, 얼마 전에 피자헛에서 일하시는 거 보고 얼굴이 너무 익숙해서 아는 사람인데 기억을 못 하는 줄 알고, 명찰을 보고 싸이월드에서 찾아봤어요.
알고 보니 예전에 극장에서 봐서 익숙했던 거였던 거더라고요.
요즘은 피자헛에서 근무하세요?"
"아 네~~ 신기하네요. 네 요즘은 피자헛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도 집이 근처라 아르바이트하고 싶은데..."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한번 만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마감이 끝나고 뒷문으로 나가니 저 골목 끝 어두운 형체가 쭈뼛이 걸어온다.
그의 보폭에 맞춰 그때는 포기 못했던 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갔다.
아직은 추운 겨울 같던 봄이었다.
그 시절 유행이었던 레깅스에 검정 구두,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바둑판 체크무늬의 원피스를 검은색 목폴라에 겹쳐 입었다.
그 골목 중간쯤 어딘가에서 우린 처음 만났다.
그 아이 두 손엔 딸기맛 요거트 드링크를 각각 들고있었다. 사과맛이었나..
우린 알고 있던 이름과 요거트 드링크를 나누었다. 진우..
나이는 나보다 3살이 어렸다. 키도 크고 훤칠한 동생이었다.
우린 동네를 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근처가 집이라는 그 아이의 집 아파트 주변을 거닐었다.
스무 살의 그 아이는 너무 무해한
소년이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이력서를 들고 피자헛 앞으로 찾아왔다.
매니저님께 제가 아는 아이라고 말씀드리고 면접도 일사천리로 보았다.
훤칠한 키에 활짝 웃는 얼굴이라니, 당연히 출근하게 되었다.
장난기도 많고 순수한 진우를 매장 사람들 모두가 좋아했다.
다행이다.
우린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을 하면서 마주치게 됐다.
완연한 봄날이었다.
2.
"오빠 나 신기한 일 있었어!"
".. 뭔데"
만난 지 1년 정도 된 남자친구는 이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시시콜콜 떠드는 이야기에 관심 없는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아니 글쎄~ 싸이월드로 쪽지가 왔는데 나 일할 때 명찰보고 나를 찾아봤다더라~
일하고 싶다길래 소개해줬더니, 면접에 뽑혔어. "
"아 그렇구나~ 아 이제 늦었다 얼른 들어가. "
일찍이 직장생활을 한 그는 항상 피곤하다.
전화도 많이 받고 운전도 많이 하는 기술 영업직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내 동창의 친오빠인 점등 얽힌 관계가 복잡했지만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사귀게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헤어지기 싫어했다.
CGV 저녁 마감을 하면 새벽 1,2시에도 끝났는데 그 시간에도 데리러 와주던 남자친구였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니깐, 학생인 나보다 힘들겠지.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진우는 금방 일에 적응해서 이제는 나보다 알바 멤버들과 친해진 것 같다.
내가 먼저 1년을 여기서 일을 시작했는데
진우 덕에 이제 소외감을 느낄 지경이다.
정작 진우와는 서로의 학교와 수업시간이 다르다 보니, 같은 시간대에 근무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우린 시간을 내 영화를 자주 보았다.
진우는 연출을 꿈꾸는 학생이었다.
이제 갓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였지만 이 친구가 멋진 감독이 될 거란 생각에 의심이 없었다.
이미 너무 빛났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간직해 온 꿈을 이제 막 실행에 옮기는 그 아이가 멋지게 느껴졌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그에 반해 벌써 4학년이 된 나는 조바심이 났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난 다른 꿈이 있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을 위해 랩실 활동을 하는데, 나는 승무원을 하겠다며 이력서에 넣을 경험을 위해 1학년때부터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연출이 꿈이던 그는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녔다.
가끔은 여럿이, 가끔은 둘이 영화를 보기도 했다.
덕분에 나도 영화에 대한 견문도 넓어지고 점점 영화가 좋아졌다.
정작 극장에서 일할 때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 연출자의 시선으로 나에게 종알종알 말해주는 진우가 조금씩 달라 보이기도 했다.
5월이 다가오자 전주 국제 영화제가 시작을 알렸다.
그 친구는 매장에 와서 모두들 놀러 오라고, 자기는 기간 내내 영화제에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매장 멤버들은 덩달아 설레면서, 다들 좋다면서 기차표를 예약했다.
역시.... 다들 뭉치기는 엄청 잘한다.
진우가 들어오고 나서 우리 매장은 활기가 넘쳤다.
이틀에 한 번은 모여서 밤새 수다를 떨고 놀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전주는 처음 가는 건데, 너무 설렜다.
진우가 추천해 주는 몇 가지 영화도 예매했다.
전주 영화제 가는 날,
진우와 나, 매장 동료 두 명이 함께 동반석에 앉았다.
내 맞은편엔 진우가 앉았다.
짧은 그 한 시간 동안 우린 노트 하나를 꺼내 서로 끼적이기를 시작했다.
낙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진우는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