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겨울. 그녀와의 마지막 날
그녀는 가정형편이 몹시 어렵다고 했다.
꿈도 포기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야 했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자신이 가족들을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처음엔 그 말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아주 태연한 척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이미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걸.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늘 내게 보였던 경계심의 이유가.
버스에서 그녀가 내게 기대어 잠들었던 그날 이후,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일부러 나와의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며 지냈지만, 그녀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했다.
계절은 언제나처럼 빠르게 흘렀다.
가을은 금세 저물고, 차가운 겨울바람은 우리 사이에도 스며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꽤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잘 지냈어요?”
“그럼. 넌?”
“네, 뭐… 그럭저럭이요.”
우리는 전처럼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딘가 멀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작은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그저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저녁이 깊어갈수록 그녀는 점점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히 피곤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웃었고, 가끔은 내게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억지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늘,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힘든 일 있어요?”
“아니야...”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전철에 올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창밖으로 스쳐 가는 흐릿한 불빛들. 모든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 무심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사소한 순간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기울어지던 그녀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차창에 비친 얼굴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 오래 눌러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낮게 말했다.
“나… 조만간 결혼해.”
그 목소리는 조용했다. 너무나 덤덤하게,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대사처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좋은 사람이야.”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그 어설픈 변명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부정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의 벽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나는 그 거짓말을 깨뜨릴 용기가 없었다.
“잘 가.”
전철문이 열렸다.
그녀는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눈물을 삼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멀어지는 뒷모습. 닫히는 문. 떠나가는 전철.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이 지나갔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내 첫사랑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