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가을.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기대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자주 만났다.
학창 시절, 서로를 그리워했으면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날들.
그때의 아쉬움을 채우기라도 하듯, 이유 없이 만나고 또 만났다.
“너, 예전보다 말이 많아진 거 알아?”
“그래요?”
“응. 그땐 더 조용했는데.”
“아마 누나가 계속 말을 걸어주니까 그런 걸 거예요.”
그녀는 웃었고,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였지만, 그 웃음 속에 묘한 흔들림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단순한 ‘누나’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를 여전히 ‘동생’으로만 대하는 걸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누나, 요즘 힘든 일 있어요?”
“괜찮아.”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요.”
“넌…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웃었지만, 표정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먼저 제안했다.
“오늘은… 그냥, 한잔할까?”
“술이요?”
“응. 너랑은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잖아?”
조용한 바에 마주 앉았다.
잔이 오가면서, 그녀의 말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아졌다. 그러다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넌 변함이 없어. 늘 내 마음을 살펴주잖아.”
“무슨 말이에요?”
“그냥… 고맙다고. 네가 있어서.”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잔을 내려놓을 때 작게 한숨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멀리 머무르는 듯했다.
“누나, 오늘따라 좀 달라 보여요.”
“내가?”
“네, 평소보다 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담긴 무게를 감히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다.
늦은 밤, 우리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흘러가며 차창에 길게 스쳤다. 버스 안은 조용했고, 낮은 진동만이 발끝에 전해졌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나, 괜찮아요?”
“응…”
희미한 대답.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천천히 내 어깨에 기댔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숨결이 가까이 닿았다.
그녀가 이렇게 기대온 건 처음이었다. 늘 나를 챙기고 앞서 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오늘만…”
그녀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오늘만… 이렇게 있을게.”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대로 그녀의 무게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내 몸을 옮겨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의 흔들림에 맞춰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이어진 불빛과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손끝은 내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이내 풀렸다.
그 짧은 행동 속에서 그녀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미묘한 떨림이 오래 남았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불렀다.
“누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른 숨소리만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 순간, 우리의 균형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 단지 그녀가 곁에 있는 이 시간을 끝까지 붙잡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