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핑크-우주에도 봄이 오나요?

계절이 멈춰 선 나라

by 유니크한J

시간의 달음질에 멀미가 났다.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계절이 그렇게 비정할 수가 없었다. 곁눈질조차 허락하지 않는 성실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우두커니 얼어붙은 나의 시간 위로 세상은 철마다 겉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부지런함 같았다. 마치 계절이 멈춰 선 나라에 사는 사람처럼 나는 한참을 무감각하게 서 있었다.


끝 모를 냉기를 이겨내고 기어이 다가와 기지개를 켜는 기온이, 창문 너머로 내민 손등을 스치고 달아나는 포근함이 야속했다.


얄밉게도 제 시간을 알고 등장한 봄은 온 동네를 쑤시며 나무마다 새하얀 소란함을 매다느라 분주했다. 그렇게 부산스러울 수가 없었다. 끝내 여기저기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고 야단법석이었다.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경쾌함은 내 상황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무심해 보였다.


그 무렵 나는 휴직 중이었다. 망막이 떨어지는 사고 이후, 두 해를 재활하는 시간에 쓰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쉼 없이 달려온 시간 속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준비도 없이 찾아온 공백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재활 공부가 평소보다 일찍 끝난 날이었다.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이동지원 서비스인 부르미콜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 목적지를 말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 길게 느껴졌다.


초짜인 나는 모든 게 어설펐다. 하지만 기사님은 능숙하고 익숙한 포즈였다. 목적지 앞에 도착하자 기사님도 함께 내리셨다. 나는 조심조심 출입구를 찾고 있었다.


“제 오른쪽 팔꿈치를 잡으세요.”


그때 기사님은 내가 선 반보 앞에서 팔을 건네주셨다. 시각장애인 안내 보행에 익숙한 그 손길 덕분에 집 앞 엘리베이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외출하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만 먹으면 이동할 수 있다는 것. 그 당연한 일이 사람을 얼마나 사람답게 만드는지 두 발이 묶여 본 사람은 안다. 당연함이 당연해지는 그 순간, 어쩐지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집 안에 들어와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처음이라는 말은 아주 사소한 일상도 낯설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혼자 택시를 타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그 아무렇지 않음을 도전이라 부르는 일이 내게 이토록 많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창문을 열었다. 집 안의 공기와 바깥 공기가 섞이며 달큰한 향기를 몰고 들어왔다.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아, 봄이었다.


무채색 봄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생소하고 낯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주 저 끝에도 봄이 오기는 올까? 빛이 닿지 않는 별에도 계절이 흐를까? 화성이나 달 뒤편과 같은 곳에서 마주한 봄은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푸석하고 텅 빈 공허가 회색 벌판 같은 시간 위에 가지런히도 펼쳐져 있었다.


큰 만찬을 준비하는 대자연의 부산스러운 손놀림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나에게만 초대장이 오지 않는 봄이었다.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창밖의 기후와는 다른 온도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산다. 멈춰 선 기온과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무채색 시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계절이 되었으니 새 옷을 반드시 장만해야 한다거나 제철에만 나는 음식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부지런함이 없어도 되는 나라. 날씨를 미리 확인할 필요도, 갑작스러운 기후의 변덕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집 안의 오랜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음성 기능이 아빠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마침 휴대폰 보이스오버 기능을 익힌 뒤라 전화도 받고 메시지를 보내고 읽을 수 있게 된 참이었다. 여전히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가 여기가 우주의 끝이 아닌 지구라는 안도감마저 들게 했다.


“오늘은 학교 가서 뭐 배웠어?”


서른이 훌쩍 넘은 딸에게 묻는 질문치고는 너무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런 아빠의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나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또 씩씩할 수가 없었다.


“응~ 오늘은 손으로 점자 읽는 법을 배웠어. 점자를 찍는 건 할 만한데 손끝으로 읽는 건 너무 어렵더라.”


아빠는 열심히 배워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고 했다. 이어서 눈앞에 펼쳐진 봄의 장면장면을 전화기 너머로 자세히 묘사해 주셨다.


“아빠가 있는 여기는 벚꽃이 활짝 만개했어. 팝콘이 팡 하고 튀겨진 기분도 나고, 색깔은 연분홍인데 너무 예쁜 분홍이네.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는데. 길가의 사람들 표정도 환한 봄빛이야.”


“우와~ 그래?? 아빠, 벚꽃길, 벚꽃 흩날리는 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인 거 알지?”


“그럼 잘 알지.”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빠, 내 몫까지 눈에 가득가득 담아줘.”


“...”


잠시 침묵이 끼어들었다. 아빠의 목소리가 멈췄다. 수화기 너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 아빠도 그렇게 가장 낯선 봄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유난히 고운 연분홍으로 물든 꽃잎은 우리에게만 가장 서글픈 색으로 흩날렸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맞는 두 번째 봄 앞에 서 있었다.


무감각했던 나의 계절 위로 봄날의 햇살보다 따뜻한 아빠의 목소리가 하롱하롱 내려앉았다. 그날 얼어붙어 있던 나의 시간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마치 멀리서 봄의 왈츠라도 시작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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