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무어의 <길고 빛나는 강>
마약 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여인이 남긴 두 딸의 삶을 그린, 리즈 무어의 『길고 빛나는 강』(황금시간 펴냄, 2021)을 간밤에 다 읽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 잭슨이 틱톡 영상에서 마약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며 “얘들아, 마약 하지 마”(Don't do drugs, kids)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마약 관련 보도들을 드물지 않게 접하는 실정이다.
『길고 빛나는 강』은 두 자매의 성장 소설이자 연쇄 살인범을 좇는 범죄 소설이다.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범죄의 목표로 삼거나 그 아이들의 외로움과 처지를 이용하는 이들로 인해 아이들의 삶이 한층 고통스러워지는 사회 생태계를 보여주려면, 범죄 소설이 딱 어울린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주요 인물인 두 자매-미키와 케이시-에게 독자가 좀처럼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폴 클리브 지음, 서삼독 펴냄)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에게는 반감마저 드니 주요 인물에 대한 이 정도 거리감이 신선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의 감정 이입을 방지하는 장치들이 이 작품의 주요 메시지 가운데 하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절묘하다.
―나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해. 모두가. (346쪽)
작중 인물 머혼 부인이 어린 토마스에게 한 이 말은 미키와 케이시에게도 해당된다.
미키는 어린 아들 토머스가 밤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 엄마와 함께 자고 싶어 할 때 굳이 제 방으로 돌려보낸다.
야박해 보인다.
하지만 미키가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살지 못한 ‘점잖은 삶’을 토마스가 살게 하려면 자신감과 독립성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자는 이런 장면을 만날 때면 미키를 지지하기보다, 융통성 없는 인물이라고 불평하게 된다.
또한 미키는 두 대학에 합격하고도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유부남의 조언을 따라 대학을 포기한다.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돌아보면, 미성년 시기에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나 또한 대학을 포기했던 열아홉 살에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선택이 이해는 되지만 나의 선택이 겹쳐 오히려 그녀가 답답하다.
케이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매우 사교적이고 쾌활하며 자유분방하다.
매력적이다.
그러나 마약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는 임신으로 배가 불러서도 성매매를 한다.
결국 마약에 중독된 채 태어나 금단증세로 고통받는 아기를 낳는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작가가 이처럼 독자를 주요 인물에게 떨어뜨려 두는 이유가 한 가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인물에 대한 이 거리감과 서로 통한다.
즉, 대부분의 인간은 나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보다 기운 인간이 될 것이냐는,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는 미키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스스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 애쓰는 미키는 누구보다 아들 토마스가 그리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점잖은 행동, 품위, 맨 정신, 안정적인 거주지와 직업”을 누릴 수 있도록 “교육받을 기회”(393쪽)를 주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일이 그리되어 가리라 안심하며 이 작품을 기억 한구석으로 밀어둘 수가 없다.
엔딩 때문이다.
첫 번째 간호사가 여전히 울고 있는 아이를 요람에 눕힌다.
점적기를 내린다. 아이가 그쪽을 향해, (마약성) 약을 향해, (마약성) 약을 갈구하며 고개를 돌린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다.
아이가 입을 연다. 그리고 먹는다. (529쪽, 단어 앞에 괄호 표기된 된 단어는 본 글쓴이가 삽입)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어떤 세상에서 어떤 조건으로 살아가야 할지 작가가 이미 제시했기에 이 엔딩이 독자들에게는 한층 불편하다.
겨울을 버티기엔 너무나 허약하게 느껴지는 평평한 타르 지붕이 있었고, 그 지붕 너머에는 필라델피아를 굽어보는 밤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 너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488쪽)
이처럼 캄캄하고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그토록 허약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가 제시한 답은 이렇다.
어린 시절, 나는 그 기억 덕분에 케이시와 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 늘 나에 대한 엄마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했던 그 상냥한 목소리 덕분이라고. 나를 무엇보다 사랑한 사람이 한때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526쪽)
토머스 생각이 난다. 내 몸에는 안겼던 기억과 안았던 기억이 모두 있다. (528쪽)
작가는 무엇보다 부모, 만약 그것이 불가하다면 다른 누군가라도 '절대적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장차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내는 데 정말 필요한 성장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미키가 “케이시와 내가 겪은 운명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로”(396쪽) 마음먹은 이유는 그녀가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겠다는 그녀의 선택이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 곁의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결단, 그 결단은 우리 곁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까지 지켜낼 수 있는 삶의 충분조건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두툼한 작품이지만 문장들이 짧아 쉽게 읽힌다.
주인공은 알지만 독자는 몰랐던 사실들이 독자에게 하나하나 드러나고, 독자도 모르고 주인공도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둘 밝혀지니, 흥미롭게 읽히기도 한다.
가볍지만 무겁고, 재밌지만 진지한 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버락 오바마도 추천한 소설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