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R _ 사라지지 않는 상처의 잔여

상처가 멎은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

by Evanesce

Residue [ rezɪduː ]

1. 나머지, 찌꺼기, 잔유물


상처는 끝났다고 믿는 순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피가 멎고, 살이 아물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자리에는 묘하게 다른 질감이 느껴진다. 손끝으로 그 자리를 더듬어 보면, 이미 고통은 사라졌는데도 이상하게 낯설고 거친 감촉이 남아있다.


그것은 아마도 상처가 남긴 흔적이자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감정의 잔여인 듯하다. 사람들은 모든 고통이 결국 시간 속에서 희미해진다고 말하지만, 어떤 아픔은 그렇게 단순히 흐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다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residue, 감정의 잔유물일 것이다.


상처를 받는 일은 아프지만, 상처를 남기는 일은 그보다 더 오래 아프다. 누군가의 마음에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 혹은 외면으로 지나쳐 버린 순간 하나가 오래도록 내 안을 파고들어,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받은 상처는 결국 기억 속으로 흩어지지만, 내가 남긴 상처는 내 양심의 층에 가라앉아 고요하게 남는다.


때로는 죄책감의 형태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무게로 남아 천천히 짓누른다. 누군가의 눈빛을 외면했던 순간, 그 침묵 속에 깃든 상처가 내가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상처의 진정한 시작이 된다.


오랫동안 상처란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삶의 숙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남긴 상처가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얼마나 무겁게 만들었는지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상처는 주는 사람의 마음에도 묵직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피를 흘리는 것은 상대일지라도 내 내면에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피보다 느리게 번지고 훨씬 오래 남는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남긴 상처를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상처는 기억의 문제가 아닌 감각의 문제이기에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그 순간의 공기와 눈빛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미처 사라지지 못한 감정의 잔여가, 그 흔적이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와, 마치 내가 받는 벌처럼 내 안을 서서히 채워나간다.


피가 멎는 데에는 몇 분이면 충분하지만, 흔적을 지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상처의 본질은 통증이 아니라 흔적이기 때문이다. 살은 다시 붙을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단단하게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상처가 남긴 그 흔적은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잊는 법을 배우는 대신 기억의 모양을 바꿔버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눈빛, 어떤 장소, 어떤 계절이 이유 없이 서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로 마음이 이미 결정한 잔여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슬픔 속에서 성숙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상처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기에, 다시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 책임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흔적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남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흔적이 남아있기에, 다시 조심해지고, 타인의 마음에 닿을 때 조금 더 조심하며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처는 언제나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 잔여는 우리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든다.

keyword
이전 18화P _ 세상의 줄 서기 앞에서 할 수 있는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