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부(中部) ⁵타카야마
신칸센만 타다가 오랜만에 특급열차를 탄다. 나고야에서 타카야마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이른 아침 열차라 그런가 승객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좋지.
나고야가 워낙 큰 역이라 그런지 기념품도 많이 팔고 에키벤도 많이 팔길래 고심 끝에 에키벤을 샀다. 기차 이동 시간이 약 세 시간. 배가 고플 테니 간단하게 하나씩. 미소카츠와 텐무스. 차가운 상태로도 먹을만해야 하는 에키벤은 연구가 많이 필요하겠구나. 먹을 때마다 느낀다.
사이타마에 있는 일본인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응접실에서 마실 것과 센베를 받았다. 에비센베라고 하길래 신기해서 한 입 물었다가 세상에 나랑 짝이랑 박수를 쳤지 뭐람. 그 자리에서 다섯 개는 금방 꿀꺽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센베는, 나고야에서 유명한 유카리(ゆかり)라는 센베라고 했다. 그리고 그 유카리를 나고야에서 만났다. 한국에 가져가서 나도 집에 놀러 오는 손님들에게 간식으로 내야지. 이렇게 또 짐이 늘었습니다.
사실 타카야마는 무리해서 일정에 넣은 곳이다. 동네 자체가 조용하고 골목골목이 한적하니 고즈넉하고 좋길래 꼭 날 좋은 때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는데. 바람과는 달리 츄부지방에는 전날에도 비가 왔고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열차 액자도 내내 비 내리는 풍경이었다.
타카야마는 기후현 북부에 있는 곳이다. 오사카부(大阪府)나 카가와현(香川県)보다도 크기가 넓고 도쿄도(東京都)와 면적이 비슷할 정도인데도, 면적의 90% 이상이 숲과 산이라 규모에 비해 인구는 많지 않다고 한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다 보니 역의 규모도 크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여행을 하며 역무원이 직접 개찰구에서 표를 확인하는 것을 처음 봤다. 애초에 JR패스는 기계에 표를 넣거나 태그 해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역무원에게 보여줘야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가웠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만 역무원을 찾아가 표를 보여줘야 했는데, 이번엔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호텔에 짐을 두고 비 내리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일단은 배를 채우러 가야 하니 뒤집어쓴 우비를 바스락거리면서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즈음 나타난 감나무. 붉게 변한 감잎들 사이에 전구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귀여웠다. 비에 젖어 더 선명하게 주홍색이었다.
히다규(飛騨牛)가 유명한 타카야마에서 명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야키니쿠는 너무 무거울 것 같으니 조금 더 가벼운 건 없을까 찾다 알게 된 쿄우야(京や)는, 히다규가 들어간 요리를 정식으로 내는 곳. 나이 지긋한 어머님들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친근한 느낌의 가게였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손님이 일본인이었고,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가게 내부의 작은 구전동화가 시작된 것처럼 입에서 입을 타고 우리의 존재가 알려졌다. 저 아이들이 한국에서 왔대.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대. 여기에 한국인이 있대. 전달이 되며 조금씩 바뀌어가는 문장들이 들려서 웃으며 주문한 요리를 기다렸다.
쿄우야의 간판 메뉴인 듯한 호우바미소정식(ほうば味噌定食). 호우바는 박(朴)의 잎을 말하는데, 주로 기후현에서 향토 요리의 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 히다규가 들어간 정식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비를 맞아 축축하니 따뜻하게 나베도 하나 먹자 해서 야키샤부정식(焼しゃぶ定食)도 함께 주문. 요리는 기대한 것처럼 무척 맛있었다. 덕분에 타카야마의 처음을 맛있게 잘 시작한 기분.
배를 채웠으니 이제 걸어야지. 한적한 길목 중간 즈음에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거리가 있다. 타카야마시산마치전통거리보존지구(高山市三町伝統的建造物群保存地区). 보통 산마치 거리라고 많이 불리는 곳. 비가 와서 그런지 상점 안에 사람이 많았다. 구경할 곳도 많고 먹을 곳도 많은 분주한 상점가.
워낙 사람이 많으면 기가 빨리는 터라 일단 일보 후퇴. 사람들 틈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한적한 거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괜찮아 보이길래 들어간 카페 soeur(スール). 스루라는 이 카페에서는 직접 구운 간식거리의 냄새와 커피 향이 솔솔 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은 곳에 들어온 것 같아서 기분 좋게 안쪽으로 들어가 착석.
어딜 가도 이렇게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는 것은 안 바뀌려나 보다. 하지만 스루의 구석 자리는 명당이다. 바깥이 바로 보이는 환하고 답답하지 않은 구석이었다.
따뜻한 커피와 밀크티를 주문하면서 고심 끝에 카보챠치즈케이크(かぼちゃのチーズケーキ)를 함께 주문했다. 단호박이 들어간 치즈케이크라니 반은 궁금하고 반은 예상이 가는 맛. 결과는 대만족. 너무 맛있게 먹었다. 오랜만에 먹은 맛있는 케이크였다. 일본의 예스러운 거리에 있다가 잠시 빠져나왔던 시간.
산마치 거리에는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곳도 많고 이렇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파는 곳도 많다. 고기가 들어가는 음식들엔 모두 히다규가 들어갔다. 니꾸망에도 꼬치에도 고로케에도 멘치카츠에도. 그 지역의 특산물을 잘 활용하는 것은 여러 의미로 좋다고 생각하기에, 나도 그 흐름에 올라타주는 것이 그 지역을 즐겁게 즐길 수 있어 좋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드디어 비가 그치고 조금씩 해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거리가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은 담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이지 않은가. 점점 더 여행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해가 나기 시작하고 회색 하늘을 열고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 즈음되니, 온갖 나무와 풀들이 각기 제 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눈이 닿는 곳마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더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멀리서 보이던 노란 은행나무가 자꾸만 눈을 사로잡길래 나도 모르게 그 은행나무를 따라 발을 옮겼더니 히다고쿠분지(飛騨国分寺)가 나타났다. 이 안에 은행나무가 있나 하고 쭈뼛쭈뼛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노랑의 향연.
사진에는 다 담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은행나무의 노르스름을 감상하는 시간.
흐릴 날씨 탓에 선명한 단풍을 담진 못 했지만, 정말 절경이었다. 이렇게 쉴 틈 없이 눈이 즐거운 곳이라니. 고즈넉하고 잔잔한 동네가 주는 깜짝 선물이 굉장하다.
숙소에 돌아왔을 땐 이미 아주 맑게 하늘이 갠 상태였다. 저녁엔 우비나 우산이 없어도 돌아다닐 수 있겠구나. 조금 안심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준비했던 비닐 우비가, 우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닐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닐 우비가 아니라 그냥 비닐 같았다. 그걸 다시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은 마음.
저녁은 낮에 봐둔 이자카야 야슈우(居酒屋 夜集)에 왔다. 나도 그렇고 짝꿍도 그렇고 괜히 여행 짝꿍이 아니다. 우린 둘 다 관광객이 많거나 유명한 곳보다는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작은 가게를 좋아한다. 특출 나게 뛰어난 퀄리티가 아니더라도, 대단히 맛있거나 놀랍지 않더라도, 그 지역의 분위기나 맛이 묻어있는 그런 가게에서 배를 채우고 나오면 만족감이 더 큰 편. 가게를 나와 동네 어귀를 걸어가면서 콤비니에서 산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숙소까지 돌아가는 길도 즐겁다.
짧았지만 알차게 채웠던 타카야마의 아침이 밝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아침이라 이른 시간부터 숙소를 나왔는데 바닥이 전부 말라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하루만 더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은, 유독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날 때마다 고개를 디민다. 짤막한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아쉬움.
여행이 길어질수록 아쉬움이 커지는 것 같다. 아직 갈 곳이 더 남아있음을 알면서도 욕심이 나버리곤 한다. 그 욕심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기다리는 것. 지금은 이렇게 아쉽게 인사하는 이곳에, 언젠가 다시 지금과는 다른 마음으로 찾아와 그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이번에는 놓쳤던 것을 얻어갈 수 있도록. 그날을 기약하는 것. 아쉬운 마음이 클수록 기다리는 시간은 애틋하겠지만 확신에는 힘이 더해질 테다. 기다림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아쉬운 타카야마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