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사이에 싸울 일이 뭐 그리 많을까 싶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대부분 미혼일 것이다.
전래동화중에 동전 하나를 넣으면 두 개가 되어 나오는 마술 항아리가 있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다.
다툼거리 한 가지가 금세 다른 두세 가지를 끌고 온다.
도통 줄어들 기미가 없는 게 부부싸움이다.
그중 가장 자주 부딪히는 건 역시 아이들 문제이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
살아온 삶의 흔적도 다르다.
살아갈 삶의 키를 같은 방향으로 맞추기 위해 수없이 부딪힌다.
그러나 여기에 ‘아이’가 개입하면 부딪히는 걸로 그치지 않는다.
육아에 관련한 문제로 다툼이 불거지면 어떤 때보다 더 치열해진다.
왜냐하면 육아에 대한 내 가치관만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옳은’ 가치관을 포기하면 내 자식이 제대로 클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남편의 육아관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도 나의 육아방식에 대한 불만이 있다.
늘 얘기하지만 나는 소위 이 영역의 전문가인데도 말이다.
남편은 요즘 사춘기가 시작된 첫째에게 불만이 많다.
다행히 예전처럼 욱하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
어릴 땐 쉬이 소리치고 매섭게 눈을 뜨고 명령어로 다그쳤다.
지금의 다정한 말투, 그건 분명히 노력의 결과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예전과 마찬가지로 솟구치는 화를 꾹 누르는 능력이 생긴 것뿐...
터지지 않은 화는 표정으로 작은 행동으로 비집고 나왔고 아이는 눈치를 봤다.
화를 버럭 내지는 않지만 다정한 말투로 일방적이고 반복되는 잔소리는 나까지도 답답했다.
이해라는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도 겉핥기식일 뿐이다.
여러 번 설명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지적보다 경험이라고.
스스로 불편을 느껴봐야 옳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통해 비로소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가진 힘을 믿고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아이는 그 마음에 부응하고자 어제보다 더 멋진 하루를 보내며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당장 자신의 눈앞에서 개입하지 않는 것을 ‘방치’라고 불렀다.
그날도 비슷한 일이었다.
나는 집에 늦게 들어왔고, 집 안에는 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음 날, 남편에게서 긴 카톡이 왔다.
자기는 화내지 않았다고 했다.
화가 났지만 꾹 참았고, 노력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 걱정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구나.’
나는 편안한 상황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학교 생활 열심히 하는 건 엄마가 보니 잘 아는데, 요새 뭐 힘든 건 없어?”
아이는 고민도 없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빠.”
아이의 입장에서 그날의 이야기는 남편이 말한 것과 같은 듯 달랐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엄마가 일이 늦는다고 하니 출출하다는 동생들에게 첫째가 간식을 만들어주었다.
내심 동생을 챙겨서 기특하다는 칭찬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부엌을 가리키며 “이거 누가 했어?”라고 물었다.
대놓고 화는 내지 않았지만 불만이 가득한 말투에서 아이는 벌써 마음이 상했다.
아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툭툭 정리를 했다.
남편은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왜 툴툴거리냐고 잔소리를 했다.
딸은 자신의 하루는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잘못한 것만 찾아서 잔소리한다고 느꼈다.
딸에게 아빠는 자신이 뭘 잘못하는지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음이 이만큼 닫히고 있었다.
물론 아이의 말을 들으며 공감을 했다.
남편과의 대화에서 늘 내가 느끼는 답답함이 있다.
마치 입만 있는 벽에 대고 끝없이 이야기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그런데 어린 딸아이가 그런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니 너무 미안했다.
내가 조금 더 남편과 잘 대화를 했더라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나처럼 하다 하다 안되니 입을 닫았다.
부딪혀서라도 소통하려는 노력은 다 포기한 상태였다.
질려버린 것이다.
걱정이 되었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가 더 멀어지게 둘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전했다.
나는 어른이라 남편의 의도와 마음을 알지만 상대는 아이라고.
아이의 입장에서 이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아이는 아직 어리다고.
부모가 이해하며 가르치는 게 더 옳지 않겠냐고.
그 말에 남편은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아이 편을 든다고, 자기를 꾸중한다고 느낀 것 같다.
자기가 보낸 카톡을 제대로 읽었냐며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다그치는 남편 앞에서 입이 꾹 닫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돈독한 부녀는 못되더라도 사이가 나쁜 부녀가 되진 않게 하겠다고 나름 뒤에서 버둥대고 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아이에게는 부모인 우리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말했다.
남편은 가르치지 않는 게 괜찮은 거냐고 말했다.
나는 가르치는 방식에 잔소리만 있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말만 해서 다 되는 것 같으면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고..
중학생이 된 아이에겐 더더욱 그렇게 다가가는 게 좋지 않다고 말해도 남편의 귀는 꾹 닫혀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까지 굶고 우리는 대차게 부딪혔다.
아이가 사이에 끼니 양보하기도 힘들었다.
‘그래 내가 아이를 좀 혼내볼게.’
라고 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마음이 한번 닫히면 다시 여는 데는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는 시기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엄마의 노력을 이해한다.
가끔씩 진지하지만 짧게 툭 던져주는 잔소리가 엄마의 사랑이란 것을 안다.
그래서 딸은 마음의 문을 열고 안정감을 가지고 사춘기의 사회생활에 열정적일 수 있다.
하루가 더 지났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다툼을 몰랐다.
그런데 아빠에게 다가가보겠다고 했다.
자신이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하고 노력하면 아빠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말할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졌다.
우리는 졌다.
아이가 훨씬 어른스러웠다.
우리는 화해랄 것도 없이 아이의 지혜로움에 그저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다짐을 전하자 남편은 나에게 사과했다.
내 말이 머리로는 다 이해되는데 인정이 안 됐었다고 한다.
나는 말했다.
머리로 알겠으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지켜봐 달라고.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하는 딸을 누가 키웠냐고.
스트레스로 헬스장에서 그리 달리게 만들었던 그날의 다툼은 지나갔다.
여전히 나에게는 의문이 남아 있다.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과 다른 소통방식은 아이와도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바꾼다고 해결될 일일까?
여전히 답은 모른 채로
무수한 물음표를 가지고
다행히
우린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