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망가지는 날이죠?”

[소통의 타깃]

by 오세용


난 K-팝을 참 좋아한다. 1980년대 한국인 누구나 그랬듯 조용필, 이문세, 김수철, 들국화를 즐겨듣고, 1990년대는 입대 전후로 서태지와 아이들, 패닉에 열광했다. 이승철, 이승환에 이어 故 신해철의 음악을 솔로 2집 때부터 넥스트, 노땐스를 거쳐 비트겐슈타인까지 즐겨 불렀다. 인디 신에서는 윤도현(밴드), 크라잉넛, 델리 스파이스, 국카스텐, 혁오를 일찌감치 발견해 주위에 알렸고, 소위 ‘아이돌’ 그룹에서도 빅뱅, 투애니원, 블랙핑크, 데이식스, 이찬혁의 진가를 누구보다 설파했다. 그 옛날 회식 코스인 노래방을 최신곡 주크박스로 만들었고, 지금도 두 달에 한 번꼴로 ‘차트 100’을 체크하고 음원을 산다. 최근엔 BTS, 라이즈, 소수빈, 이영지, 아이들, 아이브, 에스파 등의 음악을 따라가며 들어본다.


*이 대목에서 지디와 이찬혁을 모두 만난 2025년을 기념하며 최고의 퍼포먼스라 생각한 뮤비 두 개를. :)

G-DRAGON - TOO BAD (feat. Anderson .Paak) (Official Video)

이찬혁 (LEE CHANHYUK) - ‘비비드라라러브’ M/V


굳이 이토록 장황하게 대중음악 사랑 얘길 꺼낸 이유는… 2001년 국회의원 비서관 시절의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당시, 지상파 3사 가요순위 프로그램은 순위 선정방식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지속적인 지적을 받고 있었다. 가수의 TV 출연 여부가 음반 매출량을 좌우하던 시절이었기에 그 결정권을 지닌 방송사(제작진)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워낙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던 나는 시민단체 문화연대와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함께하기로 하고 모시던 정범구 의원님께 보고했다. 이후 다른 국회의원, 몇몇 음악인과 팬클럽들이랑 국회 세미나를 연달아 개최하는 등 ‘연대 사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K-팝이라 불리는 한국 대중문화예술 장르가 더는 서열화, 수직계열화되지 않고 다양한 음악으로 풍성해지길 바랐던 거다. 그땐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가 없던 때라, TV가 독점하던 ‘대중과 뮤지션’의 만남에서 ‘더 많은’ 신인과 음악적 색깔이 ‘더 잦은’ 기회를 얻길 소망했던 거다.


그 운동에 동참했던 음악인 중에 ‘블랙홀’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시나위, 백두산 등과 함께 헤비메탈 장르의 붐을 끌던 팀이었다. 어느 날 자기들 공연에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에 동참하는 두 국회의원의 영상 메시지를 요청해왔다. 당시 정 의원님의 언론 기고문, 연설문, 정책 질의 등 메시지 대부분을 맡고 있던 나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행사 현장에서 축사 영상을 보신 적 있는가. 사실 어느 행사의 어떤 축사 영상도 참석자들에겐 그저 교장 선생님 조회 말씀처럼 하품을 유발하기 마련. 분량마저 늘어나면 욕먹기 딱 좋다. 그런데 공연 중에, 그것도 하드록(Hard Rock) 공연 중에 정치인의 영상 메시지라니. 달아오른 ‘록 스피릿’에 찬물을 끼얹을 게 뻔했다.


하지만, 잘 살리면 기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범구 의원님은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젊은 감각의 소유자다. 나는 단박에 영상 메시지 초안을 쓴 뒤 보좌관님께 맡기고 도망치듯 퇴근했다. 토요일이었다. 주6일 근무 시절이라 평소 같은 오전 근무에 더해 야근까지 했겠지만, 막상 의원님 얼굴을 보면서 매우 도발적(?)인 내 초안을 보고할 자신이 없었던 거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날 만큼 위험했던 그 내용을 적어보자면 대충 이런 식.


“안녕하십니까, 국회의원 정범구입니다. (지역구 소개부터 과감히 삭제!)

저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우리 ‘블랙홀’이 앞장서고 있는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지지하면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운동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토요일이죠? 토요일은 원래 망가지는 날이잖아요?

지금부터 다시 ‘블랙홀’ 공연을 즐기면서 주위 눈치 보지 말고 다 같이 망가지기 바랍니다!


그날 저녁 늦게 사무실에 들른 의원님은 영상 메시지 초안을 보고받고는 “오 비서관이 썼지?”라고 웃으며 물었단다. 본인이 조금 격식 있게 수정한 뒤 영상 메시지를 촬영했고. 우리 보좌진들의 가장 관심사였던‘망가지는 날이죠?’ 멘트는 살아남아 공연장에서도 그대로 상영됐다.


내가 집중했던 건 그저 헤비메탈 공연장 ‘관객의 마음’이었다. 그들이 영상 메시지의 ‘소통 대상’, 즉 ‘타깃’이었으니까. 메시지의 공급자는 자기 PR를 하고 싶겠지만, 그 불타오르는 공연장에서 잠시 음악을 멈춘 채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니니까. 오히려 2001년 그날의 관객들은 우리 국회의원에 대한 이미지가 더 좋아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숙한 국회에서 그렇게 하나의 ‘파격’이 통과됐다.


*헐, 대박! 유튜브를 뒤져 보니 블랙홀의 2001년 공연을 찍은 직캠 영상을 발견!

블랙홀 - 깊은 밤의 서정곡#2001년 블랙홀 문화혁명 단독콘서트


“맘카페에서 소통해보겠습니다.”

2014년, 문체부 대변인실 홍보전문관으로 일하던 나는 당시 박근혜정부의 직제 개편으로 인해 다시 채용 공고에 응시해야 했다.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다가온 면접일. 일하다 뛰어가 봤던 면접에서 한 심사위원이 했던 질문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만약 응시자가 정책의 타깃이 학생층인 교육 정책을 홍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홍보 전략을 세우겠습니까?”


난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초등학생인가, 중고교생인가를 확인하고 맘카페나 입시 전문 사이트에서의 홍보를 알아보고 추진할 것”이라고 답했다. 질문을 던진 그 심사위원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부에 근무할 땐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의 노골적, 일방적 홍보는 이후에도 계속 주의했지만. 심사위원의 질문은 정책소통의 타깃을 묻는 것이기에 타깃 맞춤형 채널을 고민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국회의원의 짧은 영상 메시지에서도 보듯 소통의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 홍보 전략은 절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정부 정책 PR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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