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절정기 주말 혼잡을 피해 금요일을 택해 설악산으로 향했습니다.
9시쯤 미시령 터널을 통과했는데 오른쪽 울산바위 아래로 펼쳐내린 설악산 자태는 마치 울긋불긋한 인디언 추장의 머리 장식처럼 위엄이 철철 흘러넘칩니다.
작년엔 절정기를 놓쳐 아쉬워했었는데 올해는 잘 왔구나 싶었습니다.
설악산 진입 초입은 차량이 적어 주차장까지 뻥 뚫렸겠거니 했었는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주차장 훨씬 못 미쳐서부터 지체가 시작되었지요.
30분이나 서다 가다를 반복하다가 겨우 이면 주차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면 주차로 차가 긁힌 적이 있어 집사람은 심히 꺼리는데, 본인이 평일은 주차공간이 넉넉할 거라 장담했기 땜에 오늘은 아무 말이 없군요.
상풍객이라 해야 하겠지요, 들뜬 얼굴들을 한 사람들로 신흥사 진입로는 매우 흥성거렸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외국인들이 참 많습니다.
모름지기 50%도 넘을 것 같았습니다.
설악산이 세계적 명소의 하나로 자리 잡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약간 쌀쌀하여 몸을 덥히고 올라가기로 했지요.
신흥사 아래에 있는 전통찻집에 들러 대추차를 시켜 놓고 금강굴과 울산바위 어디로 갈까 집사람과 의논했습니다.
며칠 전 허리를 삐끗하여 나는 금강굴 쪽, 집사람은 그래도 단풍은 울산바위 쪽이라며 다투다가 내가 졌답니다.
울산바위행 준비 마지막 단계로 신흥사 해우소를 들렀습니다.
여긴 정말 해우가 되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느 호텔 화장실 못지않게 정갈하게 관리가 되고 있어서지요.
또 여길 오면, 고향에 있는 고운사 해우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어릴 때 소풍 가서 본 그곳 해우소는 계곡을 끼고 세워져 있었는데 해우물(?)이 바로 개울로 떨어지게 설계되어 있었지요.
말하자면 자연 수세식 화장실인 셈이었지요.
게다가 통나무로 얽고 가림막도 얼기설기하여 안, 밖 구분이 안 돼 사용자가 훤히 보이는 그야말로 개방화장실이었답니다.
그때의 고운사 화장실을 떠올렸는데, 오늘은 금년 봄에 산불로 타고 있던 고운사 장면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빨리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기를 빌어 보기도 했습니다.
산길로 접어들며 보이는 나무들은 단풍이 절정인 것도 있지만 아직인 것도 있고 이미인 것도 있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이미 고운 빛깔을 잃고 있었습니다.
좀 아쉽긴 해도 고운 단풍나무를 기웃기웃 찾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집사람과 나는 번갈아 가며 '이것 봐', '저것 봐' 감탄하며 즐거웠습니다.
얼마간 갔나요.
길가에 다람쥐가 마중을 나왔네요.
가지고 있던 사과와 배를 내밀었더니 도리도리합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주는 호두과자를 맛있게 먹는군요.
호두를 잘라 주자 날름날름 받아먹어 먹성이 대단한 것 같았는데 알고 봤더니 양 볼따구니에 얼른얼른 저장하는군요.
등산객들에게 길들여져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나서야 숲속으로 내달립니다.
다람쥐가 사라질 때까지 지나는 등산객들 모두 넋을 놓고 구경하고, 사진 찍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연과 하나 되어 정말 즐거웠습니다.
흔들바위까지 올랐는데 삔 허리가 오히려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왼쪽 골반과 허벅지 근육이 아팠는데 오른쪽 골반과 허벅지를 계속 마사지하면서 '아프지 않다. 튼튼해졌어'라고 내면 소통하며 올라온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플라세보효과를 노린 것이었지요.
잠깐 쉬면서 아래쪽을 내려다봤습니다.
붉거나 샛노란 단풍잎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칙칙한 누런 색깔의 단풍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고 시야는 시원합니다.
눈을 들어 울산 바위를 쳐다봤습니다.
그 위용은 역시 우람합니다.
한두 번 오른 곳은 아니지만 늘 새롭게 보입니다.
지난여름에 왔을 때는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군요.
계절과 날씨 탓인 것 같습니다.
날씨는 더욱 흐려져 빗방울도 듣습니다.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집사람은 '내년에 또 온다는 보장 없으니 정상까지 가자'고 합니다.
비 예보가 없었던 터라 몇 방울 듣다가 개겠지 생각하며 위로 향했지만, 집사람 말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져 걸었습니다.
매사를 '처음인 것처럼'과 '마지막인 것처럼' 대하는 것이 행복감을 키우는 방법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집사람 말을 들으니 행복감이 드는 게 아니라 서글퍼졌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은 심장병과 뇌출혈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몸 상태거든요.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내년에 올 수 없는 운명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심각한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마지막처럼'의 느낌은 다를 것 같습니다.
행복 감각 키우기로 '마지막처럼'은 다시 생각해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위쪽-울산바위/ 아래쪽-강산제일 나한석굴
우세가 더 거칠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갤 기미도 없이 계속 비가 내립니다.
정상을 100여 미터 앞두고 집사람을 설득하여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한두 번 오른 곳도 아니고, 올라가 봐야 운무만 보일 뿐이고, 반면 길은 점점 미끄러워지니 낙상이 염려된다는 이유를 댔지요.
그리고, 내년엔 정말 단풍 절정기를 잘 맞추어 오겠다 약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