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달려가고 있어.
그렇게 예지와 나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예지와의 연애는 너무 행복해 가끔 꿈이 아닌가.
잠에서 깨면 예지가 사라져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예지를 보며 안심했다.
그렇게 우린 사계절 내내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됐다.
연애가 3년 6개월차에 접어들 무렵. 취준생이던 나는 열심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서류에선 항상 당당히 합격했지만, 문제는 최종면접이었다. 최종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진 것이다.
예지는 괜찮다 나를 위로해줬지만, 그때 나는 계속된 취업 실패에 이미 반쯤 미쳐있었다.
계속된 취업 실패와 취준생이라는 신분으로 내 자존감이 바닥날 만큼 바닥난 그때.
예지와 연애 한지 4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내 옆을 지켜주던 그녀에게 해선 안될 말을 하였다.
“예지야 헤어지자. 미안해.”
“오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 말 함부로 하는거 아니야.”
“요새 취업 때문에 힘들지. 좀만 같이 힘내자 오빠. 분명 우리 오빠를 알아봐주는 멋진 회사가 있을 거야.”
“그거 때문 아니야 이제 지겨워서 그래. 그러니깐 나 좀 놔줘라. 예지야 부탁이다.”
“오빠 왜 그래? 오빠 그 말 진심 아니잖아. 아니지? 얼릉 대답해!”
그때였다. 예지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시점이. 눈물이 펑펑 흘렀다.
아마 내 말에 상처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예지에게 더 모질게 굴었다.
“아니 진심이야. 헤어져 주라. 이제 지긋지긋해.”
“흑… 흑…. 오빠 내가 알던 사람 맞아?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무서워. 흑.”
“너가 아는 그 최지훈 맞아. 맞으니깐 제발 헤어져 주라. 이제 나도 다른 사람 좀 만나보자,”
“오빤 진짜 최악이야.”
그게 내가 본 예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말과 함께 예지는 다신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참 잘된 일이었다. 내 옆에 있었으면 분명 불행했을 거다.
이미 바닥날 대로 나버린 내 자존감에 그녀는 불행해졌을 거다.
그때의 난 두려웠다.
항상 빛나던 그녀가 나 때문에 빛을 잃을까 두려웠다.
차라리 내 옆에 있어 불행해질 바엔 그녀를 놓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빛을 잃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4년 동안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던 그녀였다.
너무 사랑해서 지금의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기에.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 생각했다.
“예지야 있잖아. 지난 4년 동안 고마웠어. 나 같은 취준생 말고. 돈 많은 사람 만나.”
“그리고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만나. 어디서든 빛나는 너라면 그런 사람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였다. 내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렀다.
그 뜨거운 무언가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잘 살아 꼭…. 어라? 왜 눈물이 나지?”
예지가 떠나버린 그 공간.
온기가 사라져버린 그 공간.
그 공간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정말이지 난 겁쟁이에 두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비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옆에 있어 준 예지에게만큼은 그랬으면 안 됐다.
그때의 난 겁이 너무 많았다.
이미 바닥나버린 내 자신을 그녀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였을까 4년 동안 사랑한 그녀에게만큼은 바닥나버린 내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일을 생각하며 지훈이는 금세 소주 한병을 비웠다. 그리고 서하에게 티 나지 않게 감자탕을 극찬했다.
“크으. 감자탕 국물 장난 아닌데? 서하야 소주 한병만 더 시키자. 이 국물에 소주 하나 더 안 시키면 실례다 실례,”
소주 3잔에 지훈이의 얼굴은 벌써 빨개져 있었다.
술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무리하는 지훈이가 걱정됐다.
“천천히 마셔. 나 시간 많아. 짠.”
지금 지훈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혼식에는 정말 갈 작정인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지훈이를 보며 서하는 그가 걱정되었다.
“서하야 있지. 그때 나 예지 그렇게 보낸 거 후회한다? 근데 어쩌겠어 이미 다 지나가버렸는데. 그때 그 바보가 다 망쳐버렸는데.”
“그때의 넌 최선을 다했어 지훈아.”
나는 조용히 그때의 지훈이를. 자신이 바보라 칭한 그때의 그 취준생을.
지금 자신의 처지에 사랑하는 그녀에게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던 그때의 지훈이를 위로했다.
“그래서 나 성공해서 뒤늦게라도 예지 잡고 싶었어. 나한테 여잔 예지밖에 없었거든.”
“그때의 내가 놓친 예지를 뒤늦게라도 잡고 싶었어.”
“그래서 2년 지나고 예지에게 달려갔다? 시간 좀 내달라고. 할 말이 있다고.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음을 바라면서.”
나는 가만히 지훈이의 말을 들었다.
내가 위로받은 그 붕어빵 가게에서 배운게 한가지 있었다.
최고의 배려는 조용히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지훈이의 술잔을 부딪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근데 이미 많이 늦었었다? 예지의 옆에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예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어.”
“뭐? 예지랑 단 둘이 만난게 아니라, 그 남자친구분까지 삼자대면 한 거야?”
“응. 그 남자친구분 있지, 되게 듬직하더라.”
“와…. 그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예지도 너무 했다.”
“그게 한때 나를 사랑했던 예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던거 같아. 자신을 이제 그만 놓으라고. 자신은 내가 바랬던 것처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깐.”
“그리고 그때 예지 웃고 있었어. 그 남자 옆에서 정말 행복해 보였어. 그래서 깔끔하게 인정하고 포기했어. 내가 낄 틈이 안보이더라 두 사람 사이에.”
지훈이는 애기가 홍삼 캔디를 잘못 먹은 것처럼 씁쓸한 미소를 짓었다.
“그날 생각하니깐 갑자기 소주 땡기네.”
“지훈아 짠 하자. 짠!”
내가 지금 생명의 은인인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술 잔을 부딪혀 주는 것이다.
붕어빵 사장님이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지훈이가 방해받지 않고 그녀를 생각할 수 있게 배려했다.
지훈이에게 있어 예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결혼식만큼은 꼭 가려고. 내가 바란 예지의 행복의 결말을 보고 싶어.”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어. 나의 20대를 함께한 그녀를. 이제는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보며 웃는 그녀를.”
“박수까지 칠거야?”
“누구보다 열심히 쳐야지. 예지의 행복을 바라면서.”
지훈이는 소주 한잔을 더 마시곤 나를 응시했다.
“서하야 너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 일 있어?”
“나…? 나는….”
나는 괜히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 대신 침묵으로 대답했다.
지훈이는 내 침묵의 의미를 눈치챈듯했다.
“서하야 난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가끔은 안되는 게 있더라.”
“늦는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난 너가 나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훈이의 말에 웃음을 짓었다.
정말 내 생명의 은인다운 말이었다.
지훈이와 나는 그 이후로 소주를 두 병을 더 마셨다.
그리고 라면 사리와 볶음밥까지 먹고 나서야 우리의 술자리는 끝이 났다.
“내 생명의 은인. 너의 선택을 응원한다.”
“킥킥. 조심히 들어가. 서하야 그리고 직진해!”
간만에 낮술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술기운에 피곤해져서 서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지훈이의 말을 생각했다.
“후회하는 일? 있지. 당연히. 지난 4년 동안 후회한 일.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은 일.”
서하는 자신이 후회하는 일을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급해졌다.
이대로 자면 안될거 같았다. 마늘과 쑥으로 인간이 된 곰의 정신 따윈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영주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았다.
지훈이의 말처럼 아직 늦지 않길 바랬다.
영주의 프로필을 누르고 메신저 창을 열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니? 아니야. 보고 싶다? 제발 떠올라라!”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 제발.”
회사에서 아이디어 상까지 받은 서하였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주에게 뭐라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서하와 영주에게 4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서하의 마음이 초조해져 갈 때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밤은 9회 말 2아웃 풀카운트였던 상황이었다.
그때 상황을 반전시킬 홈런이 터졌다.
서하의 만약에가 이뤄진 것이다.
‘보고 싶다. 이서하.’
서하는 그녀의 문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토록 서하가 원하던 그녀의 문자였다.
자그마치 4년. 4년을 기다린 문자였다.
그 문자에는 서하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잠깐 눈을 깜빡였을까.
영주의 문자는 삭제되어 있었다.
서하는 그런 영주가 귀여웠다.
그녀에게 장난치고 싶었지만 장난쳤다간 혼자 이불킥을 할 그녀를 위해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서하가 4년동안 영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도 보고 싶어.’
지훈이의 말처럼 어쩌면 늦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초조했었다.
하지만 붕어빵 가게 사장님의 말처럼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나는 아직 영주가 좋다.
그래서 그녀를 놓칠 수 없다.
나는 이제 얽힌 인연의 실을 풀고, 그녀에게 갈 것이다.
다신 영주를 놓치지 않을 거다.
‘지금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