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제는 조금 용기 내도 될까.

나의 절친 지훈이의 이야기.

by 박하준

영주가 서하를 그리워하는 일주일 동안 서하는 야속한 운명과 열심히 싸웠다.

다시 그 가게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하늘은 둘의 인연을 이어주고 싶었을까.

그래서 잠깐 심술을 부린 걸까.

아니면 서하의 노력을 알아준 걸까.


불토.

영주가 선아를 만나고 택시 타 집에 가던 길.

서하에게 메시지를 보낸 그날이 되었다.


사건 당일 오전.

그날 밤 그토록 바라던 서하의 만약에가 이뤄질지 모른 채.

오랜만에 지훈에게 연락이 왔다.

지훈이와 밥만 먹으려 했지만, 낮술을 하게 되었다.


어느새 아저씨가 돼 버린 걸까.

아니면 메뉴가 감자탕이여서 일까.

둘 중 어느 쪽이 맞든 오랜만에 만난 지훈이와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나와 영주 지훈이는 모두 대학교 동창이다.


그래서 지훈이는 우리 커플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다.

엔딩의 결말까지도 모두.

하지만 오늘의 화제는 내가 아닌 지훈이.

정확히는 지훈이의 전 여자친구였다.


“예지 이번 달에 결혼한대. 나한테 청첩장 왔다?”

“켁켁…. 뭐라고? 청첩장?”


정말 오랜만인, 그것도 지훈이의 입에서 나온 전 여자친구 실명에 나는 소주를 뿜었다.


“너 설마 거기 갈건 아니지…?”

“나. 거기 가려고. 미쳤지?”

“뭐어???????”


지훈이 커플은 자그마치 4년을 사랑했다.

둘의 이야기는 대학생 때로 돌아간다.

복학 후, 3학년인 지훈이. 그리고 1학년인 신입생 예지.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소녀라 불린 예지는 독서 동아리를 가입 했다.

거기서 지훈이를 만났다.

지훈이의 첫인상은 머리 짧은 그저 그런 오빠였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동아리 신입 부원 환영 회식 날.

고양이 보단 강아지상에 가까운 귀여운 말티즈를 닮은 그녀는 어디를 가든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날도 당연히 예지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가득했다.


“예지야 인스타 맞팔하자.”

“예지야 너 진짜 이쁘다. 연예인 누구 닮았단 소리 들어?”

“예지야 이거 진짜 꿀 교양이야. 이거 들어봐.”

“예지야 시험 족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예지야 내일 같이 점심 먹을래? 뭐 좋아해?”


남자들의 과한 관심이 지겨울 쯤.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짧은 머리의 그저 그런 오빠가 궁금했다.


왜 말없이 술만 마시는지.

원래 말이 그렇게 없는지. 예지는 지훈이가 살짝 궁금했다.


“지훈 선배는 원래 말이 없어요? 아니면 원래 과묵한 편이에요?”

“응? 그건 아직 우리가 안 친해서…”

지훈이의 뜬금포에 예지가 빵 터졌다.


“킥킥. 뭐야. 선배 저희 아직 어사에요? 어사면 친해져야겠네. 선배 인스타 해요?”

“응…. 근데 거의 안 해…”

“큭큭. 거의 안 하는 건 또 뭐에요! 선배 폰 줘봐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훈이는 처음부터 예지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처럼 쑥맥이었던 지훈이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얼어붙었다.

그래서 그날 말 없이 술만 마셨다.


예지와 지훈 둘 사이의 묘한 기류가 생겨갈 때쯤.


이 상황이 마음에 안드는 예지를 짝사랑 중인 독서 동아리의 꼰대 선배는 예지를 취하게 만들기 위해 소주 맥주 비율을 1:1로 폭탄주를 제조했다. 그리고 환영주라며 그녀에게 마시라 강요했다.


“마셔라! 마셔라!”

“아 싫어요! 제가 왜 마셔야 해요!”

“환영주니깐 꼭 마셔야 돼! 안 마시면 안돼.”

“아 싫다니깐요!”

“어허 마셔야 된다니깐! 그게 룰이야 규칙이고!”


꼰대 선배의 계속되는 술 강요로 예지의 눈살이 찌푸려질 때쯤.

그저 그런 오빠가 개입했다.


“내가 흑기사 할게.”

지훈이는 그 말과 함께 폭탄주를 원샷 했고 그날 장렬히 전사했다.

“선배!! 지훈 선배 괜찮아요!?? 눈 떠봐요!”


예지는 자신 대신 흑기사를 해준 특징이라곤 짧은 머리뿐인 그저 그런 오빠가 달리 보였다. 멋있었다.


예지의 첫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말티즈를 닮은 그녀는 지훈이가 어디에 있든 따라다녔다.

그리고 틈만 나면 지훈이에게 시간이 있냐고 물어봤다.


“선배 이번 주 토요일 날 시간 돼요? 시간 되면 나랑 영화 봐요!”

“이번 주 토요일은 안돼. 조별 과제 있어.”

“치. 선배 너무해요!”

지훈이의 거절에 말티즈가 시무룩해질 때쯤. 지훈이는 3루타를 날렸다.


“대신 일요일에 보자. 일요일은 시간 돼. 오전 오후 언제든지.”

지훈이의 말에 말티즈는 환하게 웃었다.

얼마나 환한지 마치 봄날의 햇살 같았다.


연극을 보고 자연스럽게 밥을 먹은 후.

둘은 함께 낙산공원을 걸었다.

그날 서울의 밤 야경은 어찌나 예쁘던지 주변의 커플들은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걸 보고 나도 예지의 손을 잡고 싶어 고민하던 중.

말티즈를 닮은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예지야 할 말 있어? 뭔가 되게 지금 낑낑대는 강아지 같아.”


예지는 처음 봤을 때보다 이제는 머리가 조금 더 자란 지훈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위해 흑기사를 해준 이 사람.

저 야경을 보며 같이 손잡고 싶은 이 사람.

예지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다.


“선배. 그…. 있잖아…. 좋아해…. 좋아 한지는 조금 됐어.”

그녀는 또박 또박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무척 서툰 고백이었지만 서툴러서 더 사랑스러웠다. 지훈이는 눈앞의 사랑스러운 말티즈를 보며 말했다.


“좋아한 걸로 치면 내가 더 오래됐을걸? 나 너 처음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부터 좋아했어.”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네. 나도 좋아해.”

나는 예지를 처음 본 순간부터 품었던 마음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제야 혼자 낑낑대고 있던 말티즈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예지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매우 작아 꽉 잡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그날의 기억.

기억 나는게 있다면 그날 낙산공원에서 본 서울의 야경이다.

그리고 그 야경을 같이 본 사람이다.


내 옆에 예지가 서 있었다.

오늘부터 여자친구라 할 수 있는 예지가.

서울의 야경만큼 아니 더 예쁜 예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