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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Jul 19. 2024

나의 표류기 3

3/8

 마음이라는 잔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차오르다가 마침내 범람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쏟아진 마음을 주워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나, 다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방법 하나는 마음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내가 도시를 떠나 이 섬 굴해로 흘러온 것처럼.


 옆 테이블 청년들은 자신들의 운이 모자랐다고 했다. 하필이면 이렇게나 멀고 험한 곳으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름다운 이야기는 섬이나 산골 같은 험지에서 몇 년을 버티어 낸다면, 일종의 이동 점수가 쌓여서 원하는 근무지로 갈 수 있다는 거였다.

 청년들이 경쟁적으로 저마다의 불운과 불행을 늘어놓는 동안 나와 추 형은 소주를 한 병 나누어 비웠다. 그사이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부표처럼 떠오르고야 마는 지난 불운과 불행 같은 것들에.

 한 병을 더 시키려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 형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우리는 금세 자리를 떴다. 청년들은 여전히 잔을 찰랑이며 떠들고 있었다.


 내가 도시와 이별을 결심한 것도 이와 비슷한 풍경의 술자리에서였다.

 대학 동기 ‘서’와는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학과의 유이한 특별전형자인 우리는 외곽에서 태어났다는 불운을 행운으로 바꾼 투사들이었고, 그 덕에 더 쉽고 빠르게 돈독해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되고 또 거듭되어도 도시라는 이기에 물들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서가 변하기 시작한 건 충성을 맹세한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 후였다. 다니던 회사가 투자를 받게 되었는데, 투자사에서 인원 감축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일종의 제비뽑기를 통해 그가 퇴사자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태만이나 잘못이 아니라 회사의 사정 때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며 당당하게 말했지만, 총기 가득했던 투사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정한 불운이란 이런 것이리라.

 설 자리를 한순간에, 그것도 아주 허무하게 잃어버린 서는 좀처럼 부정과 불신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계획이란 무용하며 모든 관계 또한 거래의 일종이라는 믿음마저 품게 되었는데, 이러한 불신은 그가 한동안 그 어떤 회사와도 계약하지 못하도록 부추겼다.

 오늘만큼이나 말수가 적었던 그 날 저녁, 나는 맞은편의 서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새로운 신앙에 동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회의와 환멸도 해일처럼 무겁고 빠르게 찾아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일까. 어쩌면 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태만이 아니라,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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