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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Aug 23. 2024

나의 표류기 (전문)

my drift diary

1


 굴해도는 수십 개 섬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섬에 ‘굴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동굴이 많아서가 아니라 주변 바다에서 굴이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 섬에서 생산하는 자연산 굴이 전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때도 있었다. 물론 굴의 맛과 품질 또한 훌륭하다. 군(郡)의 하고많은 섬 중 유독 굴해에서만 굴이 잘 자라는 까닭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굴해도 굴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섬 곳곳에 얕고 또 넓게 솟아 있는 패총(貝塚)이 그 증거다. 연에 한두 번씩은 도시 대학의 고고학자와 인류학자 무리가 연구를 목적으로 굴해의 조개무덤을 찾아왔다. 학자들은 그때마다 ‘고대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이라거나, ‘피라미드와도 견줄 수 있는 신성한 건축물’이라며 양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섬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주민들은 오히려 조개껍데기를 시멘트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친환경적이면서 부가가치도 창출할 수 있는 이 아이디어는 한때 몇몇 군의원들을 중심으로 심각하게 논의되었으나, ‘역사적 유적의 보존’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만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섬에 살아본 적도 없는 육지 놈들이 도대체 무얼 알고 반대하느냐던 주민들의 볼멘소리도 금세 조개들 곁에 묻히고 말았다.


 내가 도시를 떠나 굴해에 닻을 내린 건 6년 전 여름.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처음 섬에 왔을 때만 해도,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돛을 올려 섬을 떠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빠르면 1년, 아무리 길어도 2년 넘게 섬에 머물지 않을 거라고도.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더라도 잠시 닻을 내린 거라고 말했다. 돛과 닻 모두 떠날 때를 위해 있는 게 아니던가?

 굴을 많이 먹으면 독심술이라도 부리게 되는 건지, 닻을 내리고 얼마간은 ‘그럼 언제 다시 떠날 거냐’는 사람들 물음에 대답하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나의 말과 행동에서 어느 정도 티가 나긴 했겠지만, 이제 막 도착한 사람에게는 분명 적절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조부터 무례했던 몇몇을 제외하면 나는 그 질문이 퍽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섬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옅은 설렘과 희망을 품고서 섬살이를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도시로부터 얼룩졌던 염세와 냉소도 벗어낼 수 있었다.



2


 삶(live)에는 산다(buy)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로부터 세상에 필요한 무언가를 내놓고, 그렇게 얻은 가치로 나에게 필요한 걸 구매하는 일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섬에 닻을 내린 후에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도시에서 애써 획득한 4년제 경영학과 졸업장과 회사 경력은 섬살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창피하리만치 정직하고 소란스러운 위장(胃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영광 따위 없었던 도시의 삶을 그리워하며 우아하고 고상한 척을 했을지 모른다.

 가장 고되었던 일을 꼽자면 역시 굴 양식장에서의 일이다. 여느 초심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주로 청소나 상, 하차 같은 일이 배정되었는데, 몸을 쓰는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매일 새롭고 힘들 수 있을까. 다만, 보수만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나마 몸이 덜 힘든 일은 운전이었다. 상, 하차시킬 필요 없이 제 발로 타고내리는 사람을 실어나르는 일 말이다. 이 섬 굴해에도 어린이집이며 학원 같은 것들이 있었고 아이들을 존경하는 마음과 운전면허만 있다면 누구나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양식장에서 일할 때보다 벌이는 줄어들었지만, 제대로 몸을 써 본 적 없는 내게 운전은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2년 남짓 운전병 경력이 4년제 경영학사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라고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옆 학원 운전기사인 ‘추’와는 아이들의 등, 하원 대기를 함께 하며 친해졌다. 그는 인구가 수십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출신으로 내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굴해에 왔다고 했다.

 추 형은 나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그래봤자 삼십 대 후반이었지만 그보다는 더 연륜이 느껴졌다. 외모 탓은 아니다. 그가 언제나 조바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나른한 뉘앙스로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고, 덕분에 더 쉽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추 형이 아직 미혼인데다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퇴근 후 자주 만나는 이유가 되었다. 미래적이라거나 발전적인 대화는커녕 그저 배와 시간을 적당히 채우고 때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낯선 곳에서 홀로 지내는 서로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그날도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우리의 단골집에는 평소 보이지 않던 이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들려오는 대화들로 유추해보았을 때 아마도 최근에 이 섬으로 발령받은 자들인 것 같았다.



3


 마음이라는 잔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차오르다가 마침내 범람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쏟아진 마음을 주워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나, 다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방법 하나는 마음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내가 도시를 떠나 이 섬 굴해로 흘러온 것처럼.


 옆 테이블 청년들은 자신들의 운이 모자랐다고 했다. 하필이면 이렇게나 멀고 험한 곳으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름다운 이야기는 섬이나 산골 같은 험지에서 몇 년을 버티어 낸다면, 일종의 이동 점수가 쌓여서 원하는 근무지로 갈 수 있다는 거였다.

 청년들이 경쟁적으로 저마다의 불운과 불행을 늘어놓는 동안 나와 추 형은 소주를 한 병 나누어 비웠다. 그사이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부표처럼 떠오르고야 마는 지난 불운과 불행 같은 것들에.

 한 병을 더 시키려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 형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우리는 금세 자리를 떴다. 청년들은 여전히 잔을 찰랑이며 떠들고 있었다.


 내가 도시와 이별을 결심한 것도 이와 비슷한 풍경의 술자리에서였다.

 대학 동기 ‘서’와는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학과의 유이한 특별전형자인 우리는 외곽에서 태어났다는 불운을 행운으로 바꾼 투사들이었고, 그 덕에 더 쉽고 빠르게 돈독해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되고 또 거듭되어도 도시라는 이기에 물들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서가 변하기 시작한 건 충성을 맹세한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 후였다. 다니던 회사가 투자를 받게 되었는데, 투자사에서 인원 감축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일종의 제비뽑기를 통해 그가 퇴사자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태만이나 잘못이 아니라 회사의 사정 때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며 당당하게 말했지만, 총기 가득했던 투사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정한 불운이란 이런 것이리라.

 설 자리를 한순간에, 그것도 아주 허무하게 잃어버린 서는 좀처럼 부정과 불신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계획이란 무용하며 모든 관계 또한 거래의 일종이라는 믿음마저 품게 되었는데, 이러한 불신은 그가 한동안 그 어떤 회사와도 계약하지 못하도록 부추겼다.

 오늘만큼이나 말수가 적었던 그 날 저녁, 나는 맞은편의 서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새로운 신앙에 동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회의와 환멸도 해일처럼 무겁고 빠르게 찾아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일까. 어쩌면 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태만이 아니라,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는.



4


 굴해에는 이상하리만치 개가 많았다. 경탄스러운 귀소본능을 가진 견공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내다 버린 주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오히려 자유를 되찾은 그들은 고양이며 쥐 같은 들짐승을 사냥하는 들개떼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그들을 버렸다. 고기 맛을 본 개떼가 사람마저 위협할지 모르니 더 큰 무리를 이루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굴해도 공무원들의 중요한 업무 하나는 이러한 들개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임무는, 주기적으로,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겨울 명절이 다가왔다. 굴해에도 다시 활기가 돌았다. 다른 도시에 사는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돌아오는가 하면 피라미드처럼 정교하게 쌓아 올린 스티로폼 택배 상자(굴로 가득한)도 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나와 추형도 오랜만에 긴 휴가를 맞이했다. 연휴에 돌입하면서 학원들이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작은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휴가를 보내면 좋을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마음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단골집에는 추 형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먼젓번 청년들이 앉았던 자리에도 또다시 낯선 무리가 와 있었는데, 아무리 많게 쳐주어도 이십 대 중반을 넘지 않을 풋내기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갈 데 없고 할 거 없는 건 똑같네.” 머리카락이 긴 남자의 말에 다른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바랄 걸 바라야지. 앞으로도 똑같을걸? 그래서 난 굴해로는 절대 안 돌아올 거야. 너도 어떻게든 육지에서 개겨보자고.” 곧 머리카락이 짧은 여자가 합류하면서 무리는 세 명이 되었고, 이후에는 대학 생활과 이성 친구 같은 이야기들이 지겨우리만치 길게 이어졌다.

 나와 추형은 이번에도 조용히 소주만을 나누어 마셨다. 지난번과 다른 게 있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두 병을 비워냈다는 것이다. 내일과 내일의 내일까지도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 탓이려나. 그러나 엿들려오는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어쩐지 자유와는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세 번째 병을 고민할 무렵 대학생들은 자리를 떴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귀동냥거리가 사라진 건 아쉬웠으나 그들처럼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단골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제 자리를 지켰다. 대학생들이 떠난 자리에는 아무도,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5


 상처 입은 이들이 섬으로 모여드는 것인지, 아니면 섬이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하나는 섬이 온갖 상흔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아무개는 사람들이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가 ‘공간과 물건에 슬픔이 묻어있지 않아서’라고 했다. 섬이 이처럼 누더기가 된 것도 어쩌면 슬픔이 빠져나갈 통로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연휴가 끝나고는 기묘한 한 주를 보냈다. 수년 전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가 오는가 하면(받지 않았다),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도시 친구의 연락을 받기도 했다(이 또한 수년만이었다). 무엇보다 앞선 두 사건이 하루 새 연달아 벌어졌다는 것이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주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학원 차 통풍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반 뼘만 한 지네가 튀어나온 것이다. 발 빠른 녀석은 내가 손써볼 틈도 없이 금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고, 한동안 차에 오를 때마다 나는 검고 재빠른 불안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이들이 내리고 혼자 있을 때 일이 벌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추 형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섬에서 그런 일은 아주 흔하며 벌레는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오히려 자동차 내부로 숨어드는 새끼 고양이를 더 조심하라고 말했다. 재수가 없으면 피떡을 보게 될지 모른다며. 그는 마치 경험이라도 있는 듯 말했고, 그 덕에 나는 불안 리스트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기묘했던 일주일로부터 며칠 뒤, 추 형이 교통사고를 냈다. 들고양이를 피하려다가 다른 차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는 감동적인 사연이었다. 아이들이 타고 있지 않았고, 운전자도 조금의 타박만 입었다는 건 다행이었으나, 이 일로 추 형은 직업을 잃게 되었다.

 돈벌이가 사라졌다고 해서 추 형이 단골집에 출근하는 횟수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우리는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만났고, 소주도 더 많이 비워냈다. 새로운 술버릇도 생겼다. 옆 테이블 이야기에 노골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언제나 그들이 우리보다는 더 즐거워 보였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에게도 안줏거리가 되었다.


 흐르는 시간은 마침내 범람하고, 우리를 후회와 슬픔으로 젖게 만든다. 나와 추 형에게도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모호한 하루들이 지나갔다. 어김없이 흘러가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불투명한 날들이었다.



6


 떠나는 자의 반대말은 남은 자가 아니라 남겨진 자다. 그리고 섬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산다. 떠나려는 자와 떠날 수 없는 자. 어쩌면 섬과 섬사람의 슬픔이란 또다시 남겨졌다는 쓸쓸함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 봄이 도착하지 않은 계절의 어느 날. 평소보다 늦게 단골집에 도착한 추 형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르면 다음 주, 늦어도 이달 안에 굴해를 떠난다는 거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어째서인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깃발을 드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일 거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리라.

 한편 추 형의 돛은 육지를, 그것도 대단지 아파트가 올라갈 신도시의 건축 현장을 향하고 있었다.


 “몸은 되겄지. 그래도 돈은 꽤 될 거여...”

 “언제 한번 놀러 와. 맛난 거 사줄라니까.”


 잘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하지 못한 채 소주만 들이키는 내게 추 형은 언제나처럼 별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약간 들떠 보였다. 돛을 올려 신도시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도 삶도 단단히 뿌리를 내릴 거라 믿는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옆 테이블에서는 청년들이 환송회를 벌이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굴해를 떠나 도(道)로 갈 예정이라고. 잔뜩 들떠 있기는 그녀도 마찬가지다. 잠시 후 그녀가 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여러분 덕분에 몇 가지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니 꼭 놀러 올게요.”


 단골집을 나온 추 형과는 부둣가에서 몇 잔을 더 마시고 헤어졌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그의 눈에는 이제 처음 보는 연민까지 서려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욕은 가까스로 참아냈지만, 나는 그때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고 범람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후의 기억은 부서진 조개껍데기처럼 남아 있다. 단골집으로 돌아갔고, 환송회 테이블에 시비를 걸다 쫓겨났으며, 다시 부둣가로 돌아와, 비틀비틀, 발목을 심하게 삐었고, 바다에 오줌을 뿌리다가 휘청, 그리고 풍덩.

 명백한 사고였다. 하지만 바다를 조금 들이키자 술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갈증과 불꽃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한 가지 쓸쓸한 사실이 떠올랐는데, 나라는 인간이 수영을 조금도 할 줄 모른다는 거였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소리쳐 봤지만 나를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힘 빠지게 했다. 나는 곧 나비처럼, 속절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닥은 상상했던 것보다 차갑고 어두웠다.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떠오르는 것도 있었다. 지네, 고양이, 조개들의 무덤, 섬 곳곳에 흉물스럽게 버려진 녹슨 닻과 헤어진 애인들의 얼굴 같은. 그들이 전부 사라진 후에는 나른한 졸음이 찾아왔다. 어쩐지 마음도 편안해졌다. 드디어 꿈이 없는, 잠다운 잠을 잘 시간이었다.



7


 아포가토(affogato)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얹어 먹는 디저트다. 뜨거운 에스프레소의 공격에 설산 같은 아이스크림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 이탈리아어 ‘affogato’에 ‘물에 빠진’, ‘익사한’, ‘익사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름부터 서사까지 빠짐없이 완벽한 디저트라 할 수 있겠다.


 나를 구한 건 휴가차 굴해에 와 있던 낚시꾼 ‘위’였다. 노련한 낚시꾼인 그는 파도가 치거나 물고기가 튀어 오를 때와는 다른 파문이 이는 것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새벽의 어둠, 생경한 풍경, 불안정한 시야. 모든 것이 모호한 상황에도 위가 경찰에 신고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자신의 느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낚시는 그에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도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경험은 감각을 날카롭게 제련했다. 그리고 추처럼 가라앉던 한 인간을 바닥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병원에서는 나라는 의식이 이틀하고도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돌아왔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사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혼수에서 흔히 경험한다는 환상이나 유체 이탈 같은 체험도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감각은 목이 몹시도 마르다는 것, 그리고 전보다 어깨가 가벼워졌다는 것뿐이었다.

 병실에는 웬일로 아버지가 찾아와 있었다(그는 지금껏 섬에는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위’와 함께 나의 입원 수속을 도운 추 형은 내가 깨어나기 몇 시간 전 신도시행 버스를 탔다고 했다. 별로 서운하지는 않았다.

 사고를 빌미로 아버지는 나를 도시로 불러들이려 했다. 어머니가 떠났을 때, 그리고 내가 도시를 등질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던 그로서는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저 해야만 하는 자신의 역할을 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것도.

 의사는 나에게 좀처럼 보기 드문, 말하자면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했다. 익수자 대부분이 폐 또는 뇌에 크거나 작은 손상을 입는데, 내 경우에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의사라는 종족은 낚시꾼과 달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이들이다.

 의사는 알지 못했지만(아니 알 수도 없었겠지만) 나라는 세계는 사고 이후 크게 바뀌어 있었다. 오직 나만이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돛을 올릴 때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내 안에서 솟아오르려 부단히도 애를 썼던 희고 널찍한 그 천을.



8


 삼각돛은 가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역풍이 부는 날에도 전진 또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모습과 과정이라는 것은 지그재그, 순풍이 불 때보다 지난하고 험난하지만.


 퇴원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굴해에서 나라는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곤란을 겪었을 학원과 전에 없는 진상을 부린 단골집에는 정중히 사과했다.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며칠에서 몇 주씩 일자리를 내주었던 양식장에는 심심한 감사를 전했다. 셋방 주인 어르신께는 고급 소주를 한 병 선물했는데 퍽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위대한 휴가를 마치고 자신의 도시로 돌아간 은인 ‘위’에게는 문자로 소식을 전했다. 그는 특유의 건조하고 따뜻한 문체로 나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는 최후의 최후까지 답례를 사양하면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모두와 인사를 마쳤음에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언젠가 한 번은 꼭 오르리라 다짐했지만, 지금껏 미뤄왔던, 고대의 유적에 오르는 일이었다.

 가장 크고 또 높은 패총은 섬의 서쪽 끝에 있었다. 조개껍데기와 토양이 한데 어우러져 퇴적층을 이룬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치 어제 버려진 듯한 새 껍데기들도 뭉텅이째 쌓여 있었다.

 껍데기 동산의 정상에 오르자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잠시 후 오늘의 해가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다. 일몰의 환희와 슬픔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없을 것이며, 성공하지 못한 사고는 결국 사고로만 남을 뿐이라는 걸.

 반도의 동쪽으로 향하는 버스는 하루 한 대뿐. 굴해 사람이 그 버스를 타려면 아침 일찍 배를 타야만 했다. 그렇게, 바다를 건너, 수년 만에 돌아온 시외버스 터미널은 여전히 낡고 시끄러웠다. 수없이 도착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문득 무언가와 터미널이 몹시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버스의 연착 소식이 들려왔다.

 10분 남짓 늦는다고 했던 버스는 30분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승객들의 볼멘소리도 세 배 정도 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의 조급함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줄 버스는 오로지 한 대뿐이며, 침착하게 기다리고 알아차리는 것만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는 여전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나의 표류기(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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