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가진 죄인

팔자 좋은 여편네들- 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14

by 노을

8월 중순

경북 하양의 여름은 무더웠다.

에어컨도 없는 13평 아파트의 여름 나기는 쉽지 않았다.

몸조리 중이니 바람 들면 안 된다며,

엄마는 일하느라 땀을 흘리면서도 문도 못 열게 하셨다.

삼일 만에 아이와 내게 땀띠가 올라왔다.


그리고 삼일 만에 시부모님이 아이를 보러 오셨다.

시동생의 6개월 된 아이까지 데리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동서의 서툰 육아를 대신해 퇴근 후 어머님이 아이를 보셨다.

동서도 마냥 편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그 아이를 막내아들처럼 애지중지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실 줄 알았다.

그렇잖아도 덥고 좁은 집에 사돈이 몸조리해 주는 상황이었으니.

그런데 두 분은 휴가를 오신듯했다.


당연한 듯 엄마가 저녁을 했다.

내 미역국은 방에 따로 챙기셨으니,

늦은 퇴근으로 사위도 없는 사돈과의 식사는 불편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설거지도 엄마가 했다.


달그랄 달그락

밤새 아이와 나를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 엄마가 아침을 하셨다.

딸과 아이와 사위와 사돈내외의 아침밥까지 챙기느라 분주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압력밥솥의 누룽지를 끓여 시어머니 앞에 내미셨다.


'뭐 하는 거야?'

미역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또 설거지를 엄마가 하셨다.

엄마 나이 60세. 시어머닌 엄마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다.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집에 가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버님, 여기 팔공산 갓바위 유명한데 거기나 다녀오세요. 심심하신데."


그렇게 나가시고 엄마가 뒷정리를 했다.

조카를 씻기고 벗겨놓은 옷이 욕조에 담겨있다.

말없이 욕실 청소를 하고 갓난아이를 씻기셨다.


"그 누룽지를 왜 엄마가 긁어다 줘?"

"그럼 어쩌냐? 맛있겠다고 하는데."

"맛있든 말든 먹고 싶음 당신이 떠다 먹겠지.

엄마가 죄인이야? 왜 시어머니 눈치를 봐? 왜 그런 거까지 하냐고? 짜증 나게!"

고맙고 죄송한 맘과 다르게 입이 사나워졌다.


"저녁엔 엄마가 절대 밥 하지 마. 그냥 아버님 입맛에 맞게 어머님보고 하라 해. 알았지?"


뚝딱뚝딱

어머님이 오징어 볶음을 하셨다.

손이 빠르시다.

그런데 엄마가 밥을 안쳤고, 빠른 손놀림으로 가득 찬 싱크대 뒤처리도 엄마 몫이다.

아이 둘을 씻기고 난 욕실정리와 조카의 천 기저귀 빨래까지도.


"그냥 두라니까! 왜 또 엄마가 그거까지 빠냐고!"

"그럼 어째? 아이 챙기고 있는데..."

"그러든 말든

이 방에서 나가지 말고 있어. 모른척하고."


토요일인 다음날,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도 말이 곱지 않았다.

"모시고 가서 바람 쐬고 저녁까지 사드리고 늦게와.

엄마도 힘들다고!"


그렇게 삼일 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셨다.


몸조리를 했을 리 만무했다.

그 시간 내내 몸도 마음도 편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틀쯤 더 몸조리를 해주던 엄마도 농사일이 밀렸다며 돌아가셨다.

딸에 대한 애정과 고생이 땀으로 배어나던 엄마의 뒷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13평 아파트가 텅 빈 듯 허전했다.


엄마도 떠나고 아이가 태어난 지 열흘쯤 되는 그즈음부터,

빛 같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서툴고 어설픈 혼자만의 육아가 시작되었다.



둘째의 출산을 앞둔 두어 달 전부터 어머님께 몸조리를 부탁했다.

모내기 철이라 친정엄마가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기도 했지만,

큰 아이 때의 일로 다시는 친정 엄마에게 몸조리를 부탁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 때문이기도 했다.


IMF로 급여는 동결되고 타지에서 어떤 도움도 없이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빠듯한 살림이었다.

언감생심 산후조리원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보험 설계사이신 어머님이 시간을 많이 못 내신단 말씀에도

딱 일주일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둘째라 출산이 빨라질 수도 있다는 말에 예정일 닷새쯤을 앞두고 어머님이 내려오셨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이불을 욕조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만삭의 배를 붙들고 열심히 이불을 밟고 또 밟았다.

'빨리 나와라! 빨리'


예정일을 하루 앞둔 날.

어머님은 할 일이 있으시다며 짐을 챙기셨다.

오일동안 출산이 임박한 며느리가 해준 밥을 드시다가 결국,

예정일을 하루 앞둔 그날.

그렇게 어머님이 가버리셨다.


그날은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경양식집 돈가스로 우리만의 조촐한 축하의 시간을 가졌다.

두 살 된 아들이 혼자서도 제법 잘 먹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뒷일이 걱정인 나는 돈가스가 명치에 걸려서 내려가질 않았다.


다음날 새벽,

드디어 진통이 시작되었다.

두 시간도 안돼 참을 수 없는 진통이 몰려왔다.

9시 20분, 분만실로 들어간 지 두 시간 만에 소금 같은 아이가 태어났다.


큰 아이는 삼일동안 진통 끝에 죽을고 비를 넘기고 태어났는데,

둘째는 세 시간 반 만에 3.4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정말 다행스럽고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런데 나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병원 복도를 지나 병실까지 들려왔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무도 없다는 말에 결국 엄마가 오시겠다는 말로 전화를 맺었다.

또 엄마만 힘들게 만든다는 생각에 맘이 편치 않았다.

큰아이를 친한 후배집에 맡기고 남편이 출근을 했다.

이쁘고 건강한 아이를 얻은 기쁨도 잠시,

홀로 병실 천장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뒷일을 고민해야 했다.


모내기도 집어던지고 부랴부랴 엄마가 오셨다.

봐주시고 있던 다섯 살 된 조카아이를 데리고

밤늦은 시간에.


엄마의 얼굴을 보니 죄송함을 뒤로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퇴원을 했다.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후배가족이 임신한 몸으로,

본인의 아이에 우리 아들까지 봐가면서 끓여 논 미역국이었다.


가슴에 뜨겁게 차오른 감동과 고마움이

왠지 모를 서러움이 되어

뜨거운 눈물로 떨어졌다.

닷새쯤 몸조리를 해주시던 엄마가 더는 있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때를 놓쳐 모내기를 못하면 일 년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도 안돼 짐을 싸 친정으로 향했다.

그런데 친정간지 삼일 만에 엄마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사고가 터졌다.

오른팔에 깁스를 하게 된 엄마는

농사는커녕 밥을 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내가 밥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일주일뒤쯤,

깁스한 팔로 뭐라도 해주시려 애쓰는 엄마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몸조리도 제대로 못해줘 미안하다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머지 한 손을 흔들고 계셨다.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눈물이 콧물이 되고

닦아낸 코가 쓰리게 아프도록

도무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옆에 앉은 아들이 울먹이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꼭 쥐어본 아이의 손이 너무 따듯했다.


포대기에 싸인 둘째 아이를 꼭 안아 봤다. 딸아이가 배냇짓을 하는지 씽긋 웃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나는

19개월 터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6시간을 달려

인적 없는 과수원을 지나 산속의 달랑 한 동 있는

특공부대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랬던 엄마가 치매를 앓고 있다.

기억이 사라지고 추억이 왜곡되고

우리의 엄마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 계신다.

이제 엄마는 아무리 말해주어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무너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내 맘도 한없이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