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 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12
얼마 전
딸이 여단 체육대회에서 자기네 대대가 우승을 했다고,
그래서 이틀이나 포상 휴가를 받았다고 좋아한다.
딸은 군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점심은 어떻게 했어?"
"푸드트럭 들어왔는데."
"와! 부대로 푸드트럭이 들어와?"
남편이 8년 전 연대장을 할 때만 해도 푸드트럭은 상상 못 했다.
그런데 연병장에 푸드트럭에 커피차라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 시절 체육대회는 간부나 사병들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참여와 눈물 나는 노력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연례행사였다.
부대의 체육대회에서 가족들은
음식을 장만해 부대원들에게 먹여야 하는 식당 아줌마이기도 했고,
테니스나 가족축구팀, 가족 달리기 선수이기하고
열렬한 응원단이기도 했다.
솜씨가 좋은 가족들은 음식을 준비했다.
연병장 주변에 대대별 천막들이 쳐지고 테이블이 세팅되면,
전이며 순대, 떡볶이, 어묵탕 등 분식집 버금가는 간이식당이 차려졌다.
대대 간부들 뿐 아니라 사병들의 간식까지 거기서 책임지는 것이다.
외부 손님들과 윗분들이 앉을 단상에 놓을 음식은 별도로 신경 써서 준비했다.
과일과 떡뿐만 아니라 식혜, 약밥, 구절판 등 대대별로 한두 개씩 장만해서 올렸다.
경험이 많은 주임원사 가족이나 과장 사모님 지휘로
중대장가족들, 부사관 가족까지 총출격이 이루어진다.
음식준비며 설거지 서빙에 뒷정리까지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야 하니,
사실 가족들의 전투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과장 사모쯤 되면
약밥이나 식혜는 기본이고, 메인 요리 하나쯤 자기만의 필살기를 가지게 된다.
보통 여단 체육대회는
개인뿐 아니라 우승 대대에도 휴가포상이 주어졌다.
가족들의 참여 성적이나 응원점수까지 합해지기도 하기에,
병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대우승에 일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기본으로 장착한다.
음식 맛이며 성적등
어쩔 수 없는 부대별 비교에서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는
승부욕도 잊지 말고 챙겨야 한다.
군인 가족의 맘가짐은 이미 군인 그 이상이다.
음식 준비 와중에,
선수로 차출된 인원은 혈전을 치르러 가야 한다.
그중 하나가 테니스다.
중대나 대대별 대표선수가 출전해 토너먼트로 순위가 먹여지는데,
몇 주 전부터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테니스를 잘하는 가족은 음식을 장만하는데 열외의 대상이 됐다.
부부대항 테니스 대회가 열리고 회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선수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회식 준비요원으로
전을 부치고 음식을 차렸다.
전 부치기 싫으면 테니스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군인가족에게 테니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기도 했다.
친한 후배는 부대별 테니스 대회에 나갈 선수가 없다고,
라켓도 잡아보지도 못했는데
등 떠밀려 대표선수가 됐다.
자기네 대대만 참가 안 할 수도 없으니, 기본만 배워서 라켓만 들고 서있기라도 하라고.
그날부터 테니스장 구석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아이를 놀게 하며,
뙤약볕에서 물주전자로 테니스장 라인을 그려가며,
테니스병에게 원하지도 않는 테니스를 배워야 했다.
5킬로 가족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승리한
그 후배의 또 다른 이야기는
한동안 부대에 전설처럼 회자됐다.
남편이 인사과장으로 근무할 때 연대별 마라톤 선수가 필요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다들 못하겠다고 하니
결국 남편은 당신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내가 어떻게 하냐?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5킬로나!"
못한다는 말에
"그럼, 누가 해? 우리 연대만 사람이 없는데...." 부탁과
"알았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짜증과
"당신이 달리기는 잘하잖아. 정말 안 할 거야?" 회유로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마라톤 선수가 되었다.
그날 하필 연대는 모든 경기에서 전폐를 했다.
마지막 마라톤 마저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맘에,
어깨가 짓눌리는 부담감으로 가슴까지 뻐근해졌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발은 점점 무거워지는데,
뒤에 따라오는 화학장교 가족과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그 남편의 '저벅저벅'하는 군홧발 소리가
심장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선두를 물려 뒤에서 따라갔다.
다리가 풀리고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것마저 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기를 쓰고, 이를 악물고 뛰었다.
저 멀린 피니시라인이 보였다.
마지막 구간에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끝내 앞으로 치고 나갔다.
군인보다 더 강한
군인가족의 정신 승리였다.
간발의 차이로 역전이 되는 그 순간,
연대 사병들의 함성은 흡사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연대의 잔다르크가 되었다.
그 잔다르크는 지금
"정신이 나갔지! 왜 그렇게까지 하고 살았는지 몰라. 미쳤어. 미친 거지!"
라며 그때를 회상한다.
과도한 승부욕은 화를 부르기도 했다.
대대별 가족 축구시합 중이었다.
한 중대장 가족이 승부욕에 심취해
상대팀 선수한테 뭐 하냐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하필 그분이 상대 과장 사모님이었다.
시합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신경전이었으나 체육대회가 끝나 후,
그 가족은 사모님께 불려 가서
죄송하다며 사죄를 해야 했고
그 후로 그녀는 성질 못되고 억센 싹수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얼마 전 만난 선배한테
체육대회 하면 뭐가 생각나냐고 물으니,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열이 오르고 짜증이 나!" 한다.
체육대회날 아침, 앞에 가는 단장님 내외를 보긴 했다.
그런데 두 분이 팔짱을 끼고 서로 정답게 대화중이라
인사하기도 애매하고 상황도 어색해서
그냥 천막 쪽으로 갔다.
전 부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과장 사모님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단장 사모님께서 찾으신다고 빨리 관사로 가보라고.
"지금요?"
"어. 지금 당장"
서둘러 도착한 관사에서
사모님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있었고,
먼저 도착한 두 명의 중대장 가족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과장 사모님의 곁눈질에
결국 본인도 모르게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들은 도대체 뭘 배운 거야?
윗사람 보고 인사하는 예의도 없고.
날 무시해서 그러는 건가?"
로 시작되는 일장 연설에 죄송하다고 머리를 몇 번이나 숙여야 했다.
돌아와 전을 부치는데 뿌연 김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 이야기를 듣고도 온전히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한테,
당신 때문에 내가 이런 꼴까지 당해야 하냐며
결국 부부싸움을 하고 말았단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이 난리가 날 텐데. 그 단장도 모가지고.
그땐 왜 그러고 살았는지 몰라?
난 그래도 임신하고 애 낳았다고 열외 되기도 했는데."
"임신했다고 열외 해주면 그나마 윗사람 잘 만난 거지!
내가 그때 일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을 쓸걸!"
"그래서 나도 글로 쓰고 있어."
"진짜?"
그 후로 한참을 오랜만에 소환된 옛 기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선배는 예전으로 가라면 다시 가고 싶어?"
라는 물음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미쳤냐? 생각만 해도 이렇게 열받는데!"
"크크크,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