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5월 5일. 호외가 발행되었다.
<신익희(申翼熙) 유세차 기차로 이동 중 뇌일혈로 사망>
윤의 결혼식이 있고 한 달 후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민주당의 신익희 (申翼熙) 선생과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 선생은 비밀 회동을 가졌다. 그 이후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선거를 열흘 정도 남긴 5월 초 대통령 후보는 민주당의 신익희 선생으로 부통령 후보는 진보당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신익희 후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한강 백사장 연설에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로 아이들도 환호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몰아 선거를 10일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전라선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하였다. 이에 참모진들은 이리역에 내려 신익희 후보를 등에 업고 이리역전의 호남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했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열차 안에서 이미 숨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 국민들 역시 누구에게 표를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급기야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사람들은 사표(死票)를 각오하고 이미 사망한 신익희 후보에게 표를 던져 180만이라는 소중한 표가 사라지게 된다. 신익희를 대신해 야당 후보로 나온 조봉암 후보는 유효투표의 30%인 210만 여 표를 받음으로써 이 두 수가 한데 모아졌다면 500만 표를 얻어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을 위협할 만한 수치였다. 한편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張勉) 민주당 후보가 큰 차이로 자유당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선거가 끝나자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는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신익희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을 받았던 우리 신문사는 신익희 후보의 사망으로 와해된 세력들이 흩어지면서 그 후원도 점차 줄어들게 된 것이다. 특히나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으로 더 많은 힘을 얻어 신문사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고, 민주당 출신의 부통령 장면과는 뜻을 달리 하다 보니 곳곳에서 정치적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문사의 내부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일을 하고도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한 달 여쯤 지나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 되었다. 초심을 잃은 정치와 신문사의 재정 상태가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스런 아내의 임신 소식이었다. 임신 소식을 알기 일주일 전부터 먹으면 자꾸 체하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아내와 함께 한의원을 찾은 토요일 아침에 진맥을 하는 동네 의원으로부터 태기가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다. 아내 역시 긴가민가하여 말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달째 월경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을 핑계로 아내에게 무심했던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처갓집에 먼저 알렸다. 장인어른과 할머님의 너무나 기뻐하셨고 큰 처남과 작은 처남 역시 크게 기뻐하며 아내의 임신을 축하해 주었다.
"그간 내가 회사를 핑계로 당신을 살피지 못했오. 미안하오. 그리고 고맙소."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신데유.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는디요. 지는 그 맘 다 아니께 걱정은 붙드러 메구 신문사 일에나 신경 쓰셔유. 당장 아이가 태어나면 돈 쓸데도 많아질 건디 열심히 버셔야 헐거구만유."
"여부가 있겠소. 내 개미같이 부지런히 열심히 벌테니 당신은 몸 건강하고 태교에만 잘 신경 쓰면 되겠구려."
나는 아내의 걱정이 앞설 것 같아 회사의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아내와 함께 근처에 있는 창경원 나들이를 나가야겠다. 창경원에서 코끼리와 호랑이 등을 보고 온실 속 식물과 연못의 큰 고니들에게 먹이도 줄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걸어가면 서울대 문리과대학 맞은편에 새로 개업했다는 다방도 가 볼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들이를 위해 일찍 아침을 먹고 아내와 함께 창경원을 가는 전차를 탔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서 너 정거장만 타고 가면 창경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입덧으로 차멀미를 하지 않을 터이니 이만한 나들이 장소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일요일이고 장소가 서울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창경궁이라는 것이다. 전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이 참 좋다. 벚꽃이 예뻤을 벚나무들은 분홍색 꽃잎을 떨구고 신록의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다. 무얼 하느라 이 좋은 구경을 놓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할 찰나에 전차가 창경원 앞 정거장에 섰다. 창경원 앞에는 벌써부터 한 주간 힘들었던 일상에 대한 보상으로 나들이를 즐기러 나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홍화문으로 들어갔다. 벚꽃이 절정인 4월이 아니어도 창경원 안은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우리는 그나마 한적한 대온실과 연못 쪽을 먼저 구경하기로 하고 창경궁의 북쪽으로 향했다. 창경원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대온실도 6.25 전쟁 중에 폭격으로 훼손되었다가 작년에 복원해 다시 문을 열었다. 일제가 조선 임금의 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것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서울 시민이 여가를 즐길만한 장소가 이만한 곳이 없으니 당장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없앨 수도 없는 상황이다. 6월이니 온실 안은 다소 더웠지만 온실 중앙에서 본 바나나 나무는 정말 신기했다. 저 멀리 열대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바나나 나무를 서울이라는 도심 한복판에서 보다니 눈이 다 즐거운 일이다. 아내는 아직은 초록빛이 많은 바나나를 보며 그 맛이 궁금하다 말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바나나를 꼭 구해 먹게 해줘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온실 구경을 끝내고 아픈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온실 옆 연못 주위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온실에서 오랫동안 서 있느라 다리 아프지 않았오?"
"지는 괜찮구먼유. 온실 안이 좀 더워서 당신이 오히려 힘들었을 거 같은디 괜찮으셔유?"
"나도 괜찮소. 배는 고프지 않은 거요?"
"목이 좀 마르구먼유. 물이라도 먹고 싶어유."
"그럼 잠시 기다리시오. 내 가서 마실 것 좀 사오리다."
나는 목이 마르다는 아내를 위해 마실 것을 사러 매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매점도 인산 인해를 이루어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창경원에서 구경을 한 우리는 가기로 했던 다방은 가지 않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는 전차에 몸을 실었다. 올 때와 달리 집으로 가는 사람은 많아져 겨우 전차를 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