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뭔가, 잘못됐다.

by 루달


유부남과 사고를 친 후

나는 다짐했다. 남정네 기능 종료.

미성숙한 결심은 일주일 뒤, 자동 재부팅됐다.




벚꽃이 만발할 때 난 베스트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 반주와 예식 연주를 맡았다.
옷도 새로 샀고, 루프를 말아 사자머리로 갔다.


예식이 끝난 뒤엔

구의역 근처 호프집을 통째로 빌려 피로연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박진영 닮고
손등에 국도 깔았던 내 짝사랑 체대오빠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신랑 친구로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내 옆자리 의자 위에 놓인 악보를
무릎 위로 낚아챘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속으로 간절히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이리 와라.
와라. 와라.


왔다!! 내 옆에 앉았다.

그 순간 정신은 미로처럼 꼬이고
심장은 허락도 없이 쿵쿵쿵 드럼 솔로를 시작했다.
게다가 주변 남자들까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루달아 살 어떻게 뺀 거야? 눈도 커졌다!”
“네가 루달이라고? 우와, 못 알아보겠다."


나는 아무렇지 아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업그레이드 완료 알림 창 띄우고 있었다.


주위에 남정네들이 나한테 시선을 돌리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내 옆에 앉은 체대오빠뿐!
이 오빠는 치명적인 눈썹 브레이크로 날 바라보며


“와우 루달이 너 이뻐졌다!”


이 한 마디를 듣자고 고난의 다이어트를 했었나 보다.
머릿속은 하얘졌고, 마음은 이미 신혼여행 중이었다.


장밋빛 피로연이 시작됐고
사람들은 노래방 기계를 누르며 불렀다.


내 차례가 오자 백지상태 영혼으로
이소라의 ‘청혼’을 눌렀다.
무방비 상태에서 진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노래는 부르고 있었는데
들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피로연을 즐기다 근처 2차, 3차까지 갔다.
문제는 날 좋아하던 동창 하나였다.
옮길 때마다 자꾸 귀신처럼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자리 배치가 아니라
좌석 자동 추적 시스템이었다.


'아, 방해돼. 저리 꺼지라고..'


체대오빠랑 그 애 사이에 묘한 신경전도 있었다.

그날 처음 봤다. 남자들도 눈치 싸움을 한다는 걸.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었고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체대오빠가 말했다.


루달아 오빠 교통편이 끊겨버렸네.”
그리고는 혓바닥이 미끄러지듯


“루달이 너 오빠랑 한 잔 더할래?”
거절? 그 단어는 그날 내 사전에 없었다. 헤어지기 싫었다.


둘이서 한 잔이 두 잔 되고, 석삼, 너구리, 오징어...
알코올은 이미 선을 넘었다.
오빠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다가 울렁울렁 속이 확 올라왔다.


“오바빠… 나 저기… 화장실 좀…우웩 ”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몸보다
체면이 먼저 나갔다.


2층 공중화장실 계단까지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
그리고 다 쏟았다. 겨우 살아 돌아왔다.
힘이 쭉 빠져서 계단 벽에 기대앉았고,
그새 잠깐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옆구리 쪽이 뭔가 스치는 느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실눈으로 아래를 봤다.
나이키 운동화.
오빠 거였다.


나는 다시 자는 척...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야릇한 상상이 곧 수상한 예감으로 전환.
곧 오빠 손이 내 주머니 쪽으로 쑥 들어왔다.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고 있었다.


아 이건 사랑이 아니라 작업이다.
짝사랑 재회가 아니라
현금 인출 서비스였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는 용기를 짜냈다.
“오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상황은 전혀 작지 않았다.


그 오빠는 당황은커녕 평온하게 대답했다.


“어 깼어? 너 잠든 것 같아서 모텔에 데려다주려고.”

" 네? 네?"
“근데 내가 차비밖에 없어서 그랬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알림 창이 다시 울렸다.


띵—
업그레이드 일시 중지.
신뢰도 오류!
이건
챙겨주는 건가
털어가는 건가


아… 이 오빠
손등에만 국도 깔린 줄 알았는데
내 통장으로도 연결되는 도로였네.


나는 바로 말했다.
“오빠, 이제 괜찮아요. 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집 데려다줄게.”
그러더니 돈뭉치를 내 손에 쥐여줬다.


방금까지 인출 서비스였다가
다시 환불 처리되는 로켓 시스템은.



그 돈을 받으면서도 이 장면이 낯설지가 않았다.
예전에 한 번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가 우리 집에서 자다가
내 베개 옆 지갑에서 돈을 몰래 꺼내고 있었다.
그때 자다 깨서 호랑이 소리가 튀어나왔다.


“으허우 야!!!!”


그 친구는 놀라서 쥐고 있던 돈을 공중에 뿌렸다.
결국 남자 친구 군대 면회 갈라고 그랬다며...

그날 이후 친구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지난 기억과 실망이 교차하며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이 오빠는 임용고시 준비 중이라고 했고

집안 비밀 얘기도 하나둘 꺼냈다. 다 진심으로 느꼈다.

난 점점 또 망하는 쪽으로

정확히 방향을 잡고 있었다.


곧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오빠는

“루달아, 새벽 첫차 때까지 좀 있다 가면 안 돼?”
“아… 저… 집이 좀 누추한데…”
“괜찮아. 너 연습실 겸 산다고 친구한테 들었어.

구경도 하고.”


근데 이 오빠
내가 지하 사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쪽문 앞에서 한 번 인상을 쓰더니
계단 한 칸 내려가자 얼굴색이 한 번 더 바뀌었다.
키가 185라 고개를 반쯤 접고 들어왔다.



내 방은 피아노 한 대, 침대 끝.
그 밑바닥 공간까지 합쳐도 여유는 없었다.


그 오빠가 방을 한 번 훑더니 말했다.
“헉 여기서… 무슨 연습?”
“네?? 그냥 살아요… 이것저것…”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오빠는
퍽. 바닥에 바로 대자로 누웠다.


“야! 불 좀 꺼! 좀만 잤다가 알아서 갈게.”


톤이 갑자기 현실 패치였다.
나는 말없이 불을 끄고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정적은 이어지고.
내 침 삼키는 소리까지 크게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맨바닥에 저렇게 재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나랑 바꾸려 했다.

“오빠 자요? ”
“왜!”
“저… 이리 올라와서 주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같이 잘렸다.


“싫다고!! 내가 왜 네 옆에서 자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내려가고—”
“싫다니까 그러네 너 그런 애였어!!”

뭐가? 왜 자존심이 상하지? 그대로 입을 닫았다.
황당함이 방보다 더 좁게 꽉 찼다.


그 오빠는 혼자 성질을 부리더니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야 화장실 좀 쓴다!!”
그리곤 들어가자마자 나오며 소리쳤다.


“아!! 야!! 더러워서 쌀 수가 없네!!”

뭔 소리야 또.
급하게 뛰어가서 보니

결혼식장 늦을까 봐 정신없이 깜박.
물.
안 내렸네.

저 원수 같은 호박 고구마 두 덩어리.


인생이 이렇게 오차 없이 망가질 수도 있나.


그 오빠는 사극에 나오는 성난 임금처럼
현관문을 쫙 열더니 휙.
그대로 나가버렸다.

내 집에서 왕이 퇴위했다.


그 이후
그 오빠는 선생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생을 가르친다고 했고, 난 다시는 본 적 없다.


내 짝사랑은
결국 교육계로 진출했고
나는 짝사랑에서 조용히 퇴학당했다.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넘어가기 전에
강제 폐쇄된 것이다.

상상웨딩까지 갔다가 변기에서 막혔다.


젠장!

같은 시간 위에 있어도
각자의 방향으로 기울어진 존재들.
겹치지 않는 궤도에서
스스로의 속도로 도는 것.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거기 있게 두는 것.

-짝사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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