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부: 역시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였다.
해주와 남편은 원룸에서 함께 지내며 상견례 날짜를 잡게 되었다. 남편은 위로 누나와 형이 있고, 막내였다. 상견례는 한식집에서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누나의 자녀들까지 모두 모여 북적였다. 반면 해주네는 여자 셋,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해주뿐이었다. 사람 수로만 보면 조금 초라해 보였지만, 사실 모두가 어색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긴장된 자리였다. 남편이 미리 해주네 가족사를 말씀드렸던 듯했다. 그의 부모님은 해주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 이후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는 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신 듯했다.
이혼 가정, 미용 일을 하는 엄마,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 남들이 보기엔 기가 세고 고단한 여자의 가정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식사 중, 해주 엄마는 할머니를 챙기기에 바빴다. 생선을 발라드리고, 약주를 따라드리며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그 모습을 본 남편의 가족들은 그제야 시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어머니 역시 오랜 세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같은 여자로서, 또 자식 된 도리로서 해주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금세 알아보신 듯했다. 그렇게 짧은 인사와 대화로 상견례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양가의 합의 끝에 결혼식 날짜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로 정해졌다. 해주는 아버지가 없었기에, 결혼으로 인해 새롭게 생긴 ‘시아버지’란 존재가 그저 감사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편 해주는 오래전부터 가끔씩 친부와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결혼을 앞두고는 친부에게도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주는 그래도 딸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주는 남편과 함께 아빠가 계신 화성으로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해주의 만남은 누가봐도 너무 어색했다. 하지만 해주는 함께 간 남편이 어색하지 않도록 세상 밝게 아빠를 맞이한다.
셋은 아빠가 예약해 둔 갈빗집에서 식사를 하며 결혼 이야기를 나눴다.
해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결혼식 날, 혹시 혼주석에 앉을 수 있을까?”
아빠는 잠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말하였다.
“아빠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앉겠냐.”
“미안해, 그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
그 말과 함께, 아빠는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아빠가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다.”
“마음은 큰데,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김서방이랑 신혼여행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해주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지만, 아빠는 “이것도 안 받으면 내가 더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 하며 끝내 봉투를 쥐여주었다. 물론 아빠가 혼주석에 앉지 않아도 괜찮다는 해주의 다짐은 끝내 모를 서운함과 남편 앞에서의 창피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해주는 하염없이 울었다. 착한 남편은 아무 말 없이 해주의 등을 토닥였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엄마는 긴장과 슬픔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해주의 결혼식은 엄마의 이혼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동안 숨겨왔던 과거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니,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결혼식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해주는 친구가 많았고, 남편 쪽은 대가족이었다. 외식업체 중에서도 가장 북적이는 예식장이라 다른 하객들이 구경을 나올 정도로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주례 없이 진행된 예식에서, 해주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입장했다.
양쪽으로 도열한 군복 차림의 동기들이 번쩍 칼을 들어 올렸다.
“신랑, 신부 통과!”
칼끝 아래로 쏟아지는 조명과 박수 소리.
그 환호 속에서 해주는 처음으로 ‘군인의 아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혼주석의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내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서, 신부석에 앉은 해주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물이 쏟아졌다. 결혼식 내내 웃고 축하하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슬픔 그 자체였다. 심지어 신랑 쪽 혼주석에 있던 시아버지마저 그 모습을 보고 함께 눈시울을 붉히셨다고 했다. 엄마를 죄인으로 만든 건 아닌지, 그 생각이 해주를 괴롭혔다.
폐백 순서가 이어졌다.
남편 쪽에서 시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들 셋, 딸 둘! 다섯은 낳아라!”
그러고는 대추 세 개와 밤 두 개를 해주의 치맛자락에 던지셨다.
사람들은 “아버님 욕심도 많으시네!” 하며 웃음바다가 되었다.
신부 측 폐백에서는 해주를 키워준 큰 이모가 대추 하나, 밤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아들, 딸 하나씩만 낳고 예쁘게 잘 살아라.”
그 말에 시아버지는 호탕하게 외쳤다.
“아녀! 그건 안 돼요! 아들 셋, 딸 둘!”
“아니면 나는 반품!”
그렇게 웃음과 눈물이 섞인 폐백이 끝났다.
결혼식 전날, 남편은 깜짝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라이브 카페를 빌리고, 촛불 거리와 꽃다발, 반지,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직접 쓴 손 편지를 읽어주었다. 해주는 그런 남편이 귀여워 웃기만 한다. 그리고 그날은 남편의 떨리는 진심이 담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많은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무사히 마쳤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해주는 해외보다 제주를 택했다. 제주도에서 캠핑카를 빌려 느긋한 신혼여행을 즐겼다. 제주도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바닷가에서 바비큐도 하며, 우도에서 떠오르는 해도 보았다. 해주가 생각한 대로 익숙하면서도 느긋한, 그런 특별한 신혼여행이 되었다.
여행을 다녀오기 전 , 해주는 결혼식 전날 아빠가 주셨던 100만 원 봉투를 남편에게 얘기하고 신혼여행에서 쓰지 않았다. 아빠가 주신 돈을 의미있게 쓰고 싶다고 말하니, 착한 남편은 해주의 말에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해주는 아빠가 주신 돈과 자신의 돈을 조금 보태, 아빠에게 줄 순금 반지를 맞추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과 다시 한번 아빠를 만났다.
약속 장소는 처음 식사했던, 그 갈비집. 처음 만남과 달리 우리는 조금덜 긴장한채로 조금더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함께 얘기를 나눠갔다. 아빠는 전직 직업군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위와 말이 잘 통했고, 그날의 분위기는 누가봐도 행복한 가족식사였다.
식사가 끝날 즈음, 해주는 조심스레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아빠, 나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과 함께 해주는 아빠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아빠 손에 직접 반지를 끼워드렸다. 그 순간, 아빠는 말없이 반지만 바라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통곡을 터뜨리셨다.
“내가 어떻게 이걸 받니..”
“나는 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식당 안은 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주변 손님들은 미소를 띠며 우리 부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 늙은 부모를 모신 자식들 모두가 그 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이후, 해주와 아빠 사이에 남아 있던 오랜 서운함과 상처는 반지 하나로 녹아내렸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우리 신혼부부에겐 관사가 나오지 않아 한동안 원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래도 둘은 함께 있기에 더 행복했고, 혼인신고와 결혼식까지 마친 진정한 부부였다. 그렇게 세 달, 다섯 달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기다리던 군 관사 입주 소식이 들려왔다. 해주는 엄마와 함께 가전과 가구를 고르며, 새 보금자리를 준비했다.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딸에게 더 좋은 걸 사 주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주와 남편은 새 아파트에 입주해, 비로소 진짜 신혼다운 신혼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폐백 때 시아버지의 뜻대로 아들 셋, 딸 둘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 아이를 가지기도 어려웠던 내가 이렇게나 많은 아이의 엄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섯째의 성별을 알고 난 뒤, 우리는 명절을 맞아 시댁으로 향했다. 남편에게도 성별을 말하지 않았기에 그날까지 모두가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시댁에 도착하자, 나는 조용히 시아버님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버님, 저 약속 지켰어요!”
“아빠랑 폐백때 했던 그 약속, 저는 분명! 지켰어요!”
내 귓속말을 들은 아버님은, (야가 뭔 말을 하는겨?) 정말 엉뚱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 보셨다. 그리고 나는 아버님께 활짝 웃으며 다시 귓속말을 했다.
“아버님! 다섯째도 예쁜 손녀딸이래요.”
“예쁜 공주라고요!”
그 말을 들은 호랑이 같은 시아버님은 정말 눈이 토끼처럼 변하셨고, 나의 5살 셋째 아들처럼 천진난만하게 깔깔깔 웃으셨다.
그리곤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딸이라고?”
“진짜! 또 딸이라고?”
그리고 그 자리에 모였던 가족들에게 그리고 동네네 사람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하셨다.
“손녀딸이랴! 이번에도 또 공 주랴!”
그 소리에 가족 모두가 놀랐고, 무엇보다 남편이 가장 놀랐다. 남편조차 성별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정말 로또라도 당첨되신 듯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시며 말씀하셨다.
“나 며느리가 최고다!”
언제나 그늘이 져 있던 아버지의 모습에 가족 모두가 놀랐고, 나 역시 좋아하시는 아버님을 보니,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정말 잘 살고 있구나.)
(이제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 줄, 내게도 진짜 아빠가 생겼구나)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과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이 가슴속에 빗방울처럼 몽글몽글 맺혀 올랐다.
그날 시댁 분위기는 순식간에 축제처럼 변했다. 고기를 굽던 아주버님은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고, 나의 세 아들은 여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에 환호하며 뛰어다녔다.
그때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또 아들일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옆에서 어머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아들은 네가 커서 고생혀.”
“우리 옆집은 딸만 셋인디, 그 딸들이 지금 엄마한테 얼마나 잘 허는지 몰러~”
“물론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네가 나중에 호강하려면 딸이 있어야 돼.”
그 말을 들은 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맞어, 그랴서 그 옆집은 딸만 셋 낳았는디, 동네 사람들이 그 여편네는 전부 ‘비행기 탔다’고 혔어!”
“근디 우리 며느리는 아들 셋에 딸 둘이니깐.”
“가만 보자..”
나는 웃으며 아버님께 말했다.
“그럼 저는 비행기 말고 제트기예요? 아니면 UFO?”
아버님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아니! 너는,너는..말여!”
“그려!”
“우리 며느리는 대통령 전용기여~!”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랑이 같은 아버님이 그렇게 활짝 웃으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상 엄하고 전형적인 옛날 시골 아버지. 하지만 병환으로 몸이 급격히 약해지신 후로는 이제 정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리셨다. 함께한 세월 동안 시댁과의 갈등로 인해 남편과의 다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기억보다, 늙고 병든 아버님을 보면 그저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 먼저 든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느끼는 거지만, 참 사는 거 별거 있나 싶다. 이런 평범한 가정 속에서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슬픔, 행복, 기쁨.
어찌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순탄히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때론 번거롭고, 힘들고, 슬프기도 해야 그게 바로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관세음보살님께 말한다.
“제가 살아가며 고난과 역경이 와도
지혜롭게 이겨내고 빨리 털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행복은 제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로움을 제게 주세요”
그렇게 나는 또 하루의 기도 속에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며 살아간다. 슬픔 속에서도 아이들을 통해 웃음을 배우고, 시련 속에서도 아이들이 커가는 감사함을 배워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