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꽃은 지면 그 자리에 또 꽃을 피운다.
해주와 남편은 원룸에서의 신혼을 지나 관사에 들어오기까지 꼬박 2년을 넘게 함께 보냈다. 2014년에 결혼했지만, 피임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시간 동안 아이는 오지 않았다. 신혼은 달달했고 둘이 웃는 날이 더 많았지만, 해주의 마음속엔 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빈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생각해 보니,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외할머니는 오랜 시간 치매를 앓고 있는 와중에도 엄마 곁에 꼭 붙어 계셨다. 한 번씩 할머니의 위급한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할머니를 어떻게든 살려 내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다. 지금 이야기와 잠깐 동떨어지지만, 외할머니가 그렇게 심한 치매를 앓고도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져 입원과 퇴원을 몇 년 동안 반복하며 엄마 곁에 꼭 계실 수 있었던 이유를 잠깐 이야기해 보려 한다.
외할머니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졌고,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갈비뼈가 부러졌다. 한 번은 간신히 폐를 피했고, 한쪽 갈비뼈가 부러지고 조금 회복되면 다음엔 반대편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팔목·다리 골절은 항상 기본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헛것을 보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자, 사주를 잘 본다는 지리산의 유명한 스님을 소개받아 찾아갔다고 했다.
그때 스님은 할머니의 사주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으셨다.
“아니, 이분이 지금 살아 계신 거 맞아요?”
“이분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어디에 계시죠?”
“이분의 사주는 이승의 사주가 아닌데, 이 사주가 맞나요?”
“심지어 세 번이나 죽었다고 나오는데…”
스님 말로는 사주상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저승에 가 계셔야 하는 운이었다고 했다.
지금 살아 계신 것도 믿기지 않지만, 세 번이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나온다며 말도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주 속에서도 외가 조상 대대로, 외할머니 대까지 ‘기도를 열심히 하셨던 분’으로 나온다며 그 지극정성과 기도만 봐도 “살아 있는 신”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깊으신 분이라 했다. 그리고 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했다. 심지어 할머니가 가려하시면 따님이 저승에 간 할머니를 다시 붙잡아 놓고, 또 가시면 또 붙잡아 놓는다 하였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혼은 이미 저승에 간 지 오래고 육신만 이승에 머무는 형국이라며 “그냥 눈 감는 날까지 옆에 있어 드리면 된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해주의 사주도 조심스레 여쭸다고 했다. 스님은 혜주의 사주를 보더니, “이 딸은 너무 가엾고 애처롭다”라고 했다 한다. 어린 시절 어른이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심성이 워낙 고와 백지 같아서 쉽게 물들 수 있고, 좋지 않은 영향엔 쉽게 때가 탈 수 있다고 했다.
결혼하기 전, 할머니가 치매를 앓으실 때 집안에 저승사자가 문지방을 들락날락거릴 정도로 위태로웠던 시기, 한창 해주가 가위에 눌리고 헛것을 지속해서 본 것도 할머니의 고통이 극에 달해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예민하고 기가 약했던 내가 그것을 느꼈기 때문일 거라 했다. 그렇다고 해주는 빙의가 되었거나, 무당이 될 사주는 아니고, 해주네 외갓쪽 집안은 대대로 ‘기도를 해야 잘 풀리는 집안’이라 아마 할머니의 오랜 조상 때부터 기도를 했던 집안이었고 그 기도를 외할머니가 이어받았으면, 훗날 해주도 아마 할머니처럼 기도를 하면 자손대대가 잘 풀릴 거라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미신이긴 하지만, 정말 소름 돋고도 신기하지 않은가?
해주는 저승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고, 전생, 환생, 심지어 숲 안에는 아직까지도 작은 요정이 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래서 엄마의 말을 들은 혜주는 너무 신기해했고 그 스님얘기를 믿었다.
엄마는 그렇게 오랜 시간 홀로 할머니를 보내지도 못했고, 놓아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스님이 엄마에게 한마디 하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아마 죽음의 날짜를 이미 정해 놨지만, "
"따님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해서 그냥 내버려 둔 게 아닐까요?"
"아니면 하늘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지쳐서 그냥 포기해 버린 게 아닐까요?"라며 허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했다.
아무튼 해주는 지금도 꿈을 자주 꾸고, 잘 맞춘다. 외할머니처럼 매일 성수를 떠 놓고 기도하진 않지만, 집이나, 가끔 사찰에 찾아가 기도도 드리고 있다. 할머니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너무 얘기가 길어져 버렸다. 이제 다시 돌아온다.
해주는 그런 할머니가 가시기 전에 꼭 손주를 안겨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시댁 어르신께도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주는 누가 보면 안달 난 사람처럼 남편을 괴롭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프고 창피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해주가 첫 아이 임신 준비를 하며 했던 이야기도 꼭 빠지면 안 되는 이야기이기에 몇 자 적어본다.
해주는 아이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에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병원에서 알려준대로 생리주기와 배란일을 맞춰도 아기가 잘 생기지 않았다. 의사는 자주 관계를 갖는다고 임신이 잘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정해준 날짜에 관계를 맺으라고 했다. 지속적인 난포주사와 노력을 하여도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자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 ‘철저한 아기 갖기 프로젝트’를 세웠다.
남편이 출근하는 시간을 빼고 하루 두 번, 새벽과 저녁으로 쉬지 않았다. 해주는 원래 관계를 좋아하지도, 키스도 잘하지 않았고 성감대 또한 없었다. 하루 두 번 관계를 한다는 말만 들으면 누가 보면 섹스중독자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해주는 술과 노래를 더 좋아하는, 놀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해주의 야심 찬 프로젝트는 밤낮없이 이어졌고, 관계가 끝나면 어디서 본 얘기들도 적용해 봤다.
관계 직후 다리를 천장 쪽으로 들기.
바로 씻지 않고 한참 뒤에 씻기.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 있다가 나중에 보기.
찬 음식 피하기, 매일 걷기 운동하기 등등.
어찌 보면 엽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해주는 그만큼 아이에 대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주는 술을 무척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하고 마시고,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부터 결혼 후까지, 해주에게 술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일상이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반주를 곁들였고, 신혼이 시작된 뒤에도 밥상 위엔 소주잔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둘은 취해 소란을 피우는 부류는 아니었고, 반주와 가끔 한 번씩 남편 부대 동기들과 진하게 먹는 게 다였다.
담배 역시 그랬다. 습관에 가까웠다.
밥 먹고 한 대,
남편 퇴근하고 한 대,
혜주와 남편은 함께 밥과 반주 그리고 담배를 태우며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주는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혹시, 아이가 안 생기는 게, 내가 술과 담배를 해서 그런 건 아닐까?)
남편 역시 (혹시 내 탓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심했다. 그리고 새해를 앞둔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우리 이번 새해부터 담배 끊자.”
“자기는 못 끊겠으면 천천히 해도 돼.”
“근데 나는 이번 새해부터 딱 끊을 거야.”
“내가, 술 하고 담배를 너무 많이 해서 아이가 안 생기나 해서...”
“이것마저 끊었는데도 아이가 안 생기면, 그땐 답이 보이지 않겠어?”
남편의 결심은 단단했다.
새해가 다가오자 남편과 해주는 금연 성공을 기원하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남편과 해주는 매일 금연껌을 씹었고, 남편은 보건소 상담도 받고 정말 열심히였다. 그리고 남편은 아주 독하게도 술에 만취한 날에도 담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게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도 한결같았다.
하지만 해주는 술을 마실 때면 담배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그럴 땐, 남편에게 솔직히 말하고 가끔 한 대씩 피웠다. 남편은 그런 혜주에게 단 한 번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주는 남편처럼 금연에 성공하기 위해 반주만 하면 담배가 생각났던 터라 반주를 줄여보기로 다짐한다.
일주일에 세 번에서 두 번, 그리고 주에 한 번씩. 그렇게 관사로 이사한 뒤엔 완전히 끊어 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새벽기도와 운동으로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이 가질 준비도 안 된 채 저는, 아기만 달라고 떼썼습니다.)
(이제 제 몸을 깨끗이 정화하겠습니다.)
(훗날 아이를 주신다면 정성과 사랑으로 키우겠습니다.)
(앞으로 조급하게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출근한 뒤 강아지들과 한 시간 넘게 공원을 걸었다. 그때부터 해주는 새벽을 얻었다. 그리고 새벽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지 처음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하루가 길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함께한 강아지들도 매일 산책을 하며 잇몸이 드러날 만큼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강아지 두 마리의 이름은 어미 ‘까미’와 새끼 ‘대한’이었다. 사실 두 강아지는 해주 부부에게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었다. 미니핀 까미는 해주가 대학 시절부터 키워온 강아지였다. 남편과 교제할 당시에도 언제나 까미는 함께였고, 남편 역시 까미를 무척 귀여워했다. 전주에서 군산으로 옮겨 다시 일을 할 때, 남편이 까미를 데려가 원룸에서 함께 지낸 적도 있었다. 둘이 떨어져 있던 시절에도 남편은 까미를 돌봤다. 그리고 까미의 늦은 교배를 시켜 새끼를 직접 받아내기도 했다. 노산에 초산인 까미는 한 마리의 새끼만 임신했는데, 그 새끼는 한쪽 눈이 없이 태어났고 다리가 길고 약해 잘 걷지 못했다. 남편은 까미의 출산을 지켜보며 대한이의 탯줄을 직접 잘랐고, 까미의 산후를 간호하며 황태미역국과 닭미역국을 끓여주며 매일같이 나를 돌보듯 정성껏 돌봤다고 핬다. 그만큼 두 강아지는 해주네 부부에게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두 강아지를 자식처럼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시댁 어르신이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너네 강아지 얼른 다른 데 분양해라.”
“해주네 집이나 우리 집에 맡겨라.”
“아기를 기다리는 집에 강아지를 지극정성 돌보면 삼신이 시기해서 아기를 안 준다고 하더라.”
“어차피 아기 태어나면 못 키울 테니 미리 보내라.”
해주와 남편은 극구 반대했지만, 시댁 어르신들은 매번 전화를 하며 분양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문에 갈등도 생겼지만, 해주는 생각 한다.
(혹시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결국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두 강아지를 엄마에게 맡기기로 했다. 엄마는 이미 푸들을 키우고 있었고, 전에 함께 살 때도 까미를 돌본 적이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주셨다. 두 강아지를 보내고 난 뒤, 슬픔도 잠시 해주는 더 운동에 매달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혼자 공원을 걸었다. 체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술은 거의 끊었으며 담배는 완전히 멀어졌다. 그리고 병원에 다니며 임신에 좋은 음식도 찾아먹고, 생리 주기를 꼼꼼히 체크하며 난포 주사도 맞았다. 그렇게 노력 끝에 임신에 성공했지만 해주는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
첫 번째는 임신 확정 후 자연유산,
두 번째는 아기집은 보였지만 난황이 없어 유산,
세 번째는 심장소리를 듣지 못해 유산이었다.
세 번의 유산 뒤, 해주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제 임신을 하더라도 기쁨보다 불안이 먼저 다가왔다. 남편은 꼭꼭 숨어버린 해주를 꺼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이고 여행을 다녔다. 그 덕분에 해주는 서서히 마음을 회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해주에게 말했다.
“나는 애기 없어도 살 수 있는데..”
“나는 진짜 자기만 있으면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아직도 아기를 원한다면,
우리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 볼까?”
“우리 아직 난임치료도 안 했잖아.”
“정부에서 난임지원 사업이 있대.”
“그거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우리 둘이 평생 행복하게 살자.”
“대한이랑 까미도 데려오고.”
그 말을 들은 해주는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마지막까지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거라면 이제 미련 갖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남편과 함께 난임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남편은 정자왕, 해주는 유산으로 약해졌던 자궁도 튼튼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그리고 드디어 수정란 이식 날짜를 잡았다. 그날 아침, 해주는 습관처럼 집안에 쌓여 있던 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쓰윽 한 번 해봤다.
결과는 두 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또 한 번,
또 한 번.
네 번을 해도 모두 선명한 두 줄이었다.
기쁨, 행복, 불안, 걱정, 슬픔.
다섯 가지 감정이 물과 기름처럼 뒤섞이지 못한 채 따로 놀았다.
병원에 가자 의사 선생님이 놀라며 말했다.
“오늘 시험관 하는 날 아니세요?”
“피검사 결과 임신이에요. 수치도 안정적이에요.”
“이건 기적이에요.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 같네요.”
그 말을 들은 해주는 걱정이 몰려왔다.
세 번의 유산이 있었기에, 기쁨보다 불안이 앞섰다. 의사는 해주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번엔 수치도 너무 안정적이에요.”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거니,
이번엔 아이가 꼭 붙어 있을 거예요.”
“집에서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거 빼곤 누워만 계세요.”
그렇게 축하와 미션을 함께 받은 채 남편과 집으로 돌아왔다. 해주는 정말 밥과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빼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이가 자리를 잡고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양가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2년의 터울로 네 아이와 그리고 지금 내 뱃속에 있는 다섯째 아이를 보곤, 원래 임신이 잘 되는 거 아니냐며,
아이 키우는 게 힘들지 않냐며,
돈도 많이 들 텐데 남편 군인 월급으로 감당이 되느냐,
누가 지원을 해 주느냐,
나라에서 돈을 많이 주냐 등등
하지만 나는 말한다.
나는 누구보다 아이를 어렵게 가졌고,
아이를 갖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다섯 아이의 엄마가 술과 담배?"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모성애로 가득 둘러싼 내 얘기와 이미지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 뭐, 그렇다고 물론 자랑거리도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당당하다. 젊은 나는 놀기 좋아했고, 나이트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서슴없이 태웠다. 그리고 나를 아는 오래된 인연들은 말한다.
"너는 아기 낳고 진짜 사람 됐어!"
맞다. 나는 나의 아들이 태어나고 새로 다시 태어났다. 실제로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출산했을 그 당시 아이와 함께 나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고, 다시 태어난 만큼 이제는 엄마로서의 주어진 삶을 살 꺼라고 다짐했다.
비록 나는 어릴 적 엄마 곁을 맴도는 송아지가 아니라 망아지였지만, 나는 내가 어릴 적 그렇게 원 없이 놀아 봤기에, 아이가 생긴 후에도 단 한 번도 헛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생각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일절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아이와 남편과의 시간만을 즐겼다. 주위에서 내 소식이 궁금할 만큼 그렇게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만 아이와 함께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게 가장 큰 행복이라 믿고, 엄마가 된 지금은 이제는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내 글을 보고 나를 안 좋게 보는 시선들도 이제는 많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뭐, 내가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유명한 크리에이터는 아니지만은, 나는 육아 유튜브채널을 오래 운영 하였기에, 이제는 나의 치부들도 만 천하에 공개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뭐 그만큼 나의 글이 정말 유명해져서 글 쓰는 내가 궁금해 나를 찾아와 준다면, 그 또한 긍정적인 관심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여린 마음의 나지만, 쓴소리를 하고 질타를 할 지어도 그것 또한 다 가만하고 있다. 소싯적, 안 놀아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상황과 여건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왔다면 그걸로 됐다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니깐. 아무튼 나는 어릴 적 노는 것만큼은 기똥차게 놀았고 , 그렇다고 해서 뭐 학폭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한 톨의 거짓 없이 이토록 글을 쓰는 이유는, 나는 글을 쓰는 만큼은 나를 포장하지도, 거짓으로도 쓰고 싶지 않다.
내 글을 읽고 진심을 받아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잘못된 길이라면 나는 저리 살지 말아야지. 길잡이가 될 수도 있으니. 뭐 장 • 단점 모두 존재하지 않겠는가?
어찌 됐든 나의 얘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글 쓰는 게 너무 재미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다. 빨리 내일이 와서 또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