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부: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였다.
산후조리원에서 그동안의 지친 피로를 풀며 아기와 함께 지낼 생각을 하니 해주는 너무 설레었다.
해주가 들어가게 된 산후조리원은 병원과 연계된 병원 내 조리원이었다. 검색해 보니 음식도 잘 나오고 마사지도 받을 수 있으며,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에서 남편도 함께 지내며 아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산후조리원에 와보니 해주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젖몸살에 시달리며 2~3시간마다 유축을 해야 했고, 그 고통은 임신 중 심한 입덧이나 만삭으로 숨이 차던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잘 때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가슴은 굳고 그럴때마다 남편은 손으로 해주 가슴을 풀어주느라 닭똥 같은 눈물을 매번 흘려야 했다.
고통스러워 하는 해주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이렇게 아픈데 모유수유하지 말자 그냥.”
“일단 산모부터 건강하고 봐야지..”
“요즘 분유 진짜 잘 나온다고 하더라.”
“초유 먹였으니깐, 그냥 분유로 갈아타자.응?” 남편은 여러 번 말렸지만, 육아 공부를 나름 많이 했던 해주는 모유수유가 아기에게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밤새 유축을 하고 며칠이 지나면 간호사들이 아이가 젖을 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해주의 유두는 함몰유두라 아이 입에는 잘 물리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첫째 아이는 ‘설소대’를 가지고 태어났다. (※ 설소대란 혀 밑에 붙은 얇은 막 같은 끈으로, 이 부분이 짧으면 혀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젖을 빠는 힘이 약해진다.)
즉, 모자에겐 해주의 함몰유두도, 아이의 설소대도, 모유수유를 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해주는 조리원에서 추천한 ‘쭈쭈보호대’를 사용했다. 이 보호대는 젖병 젖꼭지처럼 생긴 실리콘 기구로, 유두에 대고 압착하여 아기가 빨기 쉽게 돕는 장치였다. 그렇게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매일 연습했고, 드디어 퇴소 날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해주의 모유수유 전쟁은 계속되었다. 밤새 젖을 물리고 유두에 보호대를 끼우고, 또 여러 번 반복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를 안고 잠들 때면 옷과 이불은 온통 모유로 흠뻑 젖었다. 아이는 여전히 젖을 잘 빨지 못했고, 해주는 보호대를 끼고 갖은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매일같이 젖은 계속 차오르는데 비워지지 않아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통증은 심해졌다.
해주는 유축기로 짜서 먹이는 게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직수’에 꼭 성공하고 싶었다.
직수란 아기가 엄마의 젖을 직접 빠는 것을 말한다. 젖병에 비해 약 3~5배 정도 더 강한 힘을 줘야 모유가 나오기 때문에 젖병에 익숙한 아이들은 쉽게 나오는 젖병만 찾고, 엄마 젖은 포기해 버린다 들었다.
그럼에 해주는 알고 있었다. 직수의 장점은, 아이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기계적으로 수유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플 때마다 자연스럽게 젖을 물수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엄마의 몸도 아이의 리듬에 맞춰 젖의 양을 조절하게 되어 언제나 아이에게 최적의 상태의 모유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육아서마다 의견은 달랐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수유하라는 책도 있었고, 아기가 배고파할 때마다 주라는 책도 있었다. 하지만 해주는 아기가 배고플 때마다 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꼭 직수에 성공해, 아이의 몸에 가장 맞는 모유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주는 매일 울며 다짐했다.
(오늘까지만 해보자. 오늘도 안 되면 포기해야지.)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매일 밤 잠도 못 자고 젖몸살로 가슴이 단단하게 뭉치고 통증은 심해졌지만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약조차 먹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였는데, 몸이 너무 힘드니 이상하게 이 아기가 예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고 해주 역시 그런 자신을 부정했지만, 해주는 홀로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이를 안아주고 싶지 않았고, 밤마다 울어대는 아이를 보면 짜증이 났으며,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스쳤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끙끙대며 젖을 찾는 모습을 보았다. 혀 밑 설소대 때문에 잘 빨지 못하면서도 작은 입으로 힘껏 젖을 물어보려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해주는 깨달았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이 아기도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었구나.)
그날 이후 해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며칠 뒤 아들의 설소대 시술을 받고 나서부터 아기도 젖 빠는 힘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그리고 함몰되어 있던 해주의 유두도 자연스럽게 ‘뿅’ 하고 튀어나왔다.
그렇게 해주는 마침내 직수 모유수유에 성공했다.
그날 이후 해주와 아기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아이는 엄마 젖의 맛을 알아버렸다. 해주가 아파서 분유를 줘도 먹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분유라도 이미 해주의 젖맛에 길들여진 아기는 입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도 해주는 작은 체구에 비해 모유가 풍부한 편이어서 아이도 해주의 젖을 풍족하게 먹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쭈쭈보호대도 뺏고, 그리고 나름 요령도 생겼다. 아기가 배가고파 애타게 울어도 젖을 바로 주지 않고, 충분히 가슴마지를 한 후에 젖을 물리면, 아이는 마치, 굶은 물고기가 떡밥을 덥석 물듯이 젖을 덥석 물고 더욱 힘차게 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서로 고생한 결과 드디어 직수에 성공하게 된다. 그전에는 자신에겐 모성애가 없다고 생각했고, 매일 자신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며 자책했지만, 밤새 모유수유를 하며 아기와 가까워지면서 점점 마음이 달라졌다.
(이 아이는 내 젖으로, 내 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그 사실 하나로 해주는 감사 했다.
그 생각에 해주는 매일 아이를 꼭 품에 안고 잠들었다. 그렇게 해주의 모성애는 날이 갈수록 더 깊어졌다.
해주는 단언 한다.
(나는 모유수유를 하며 진짜 모성애를 배웠다고.)
그 고통과 인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한 수많은 밤들이 해주를 진짜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무엇보다 그동안 함께 애써준 이 아이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해주의 첫 모유수유는 2년이 넘게 이어졌다. 둘째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도 첫째에게 젖을 물릴 만큼 그 유대는 강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임신 중 모유수유는 자궁수축을 유발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결국 해주는 단유를 결심했다.
모유수유의 그 연결이 끊어지는 날이 다가오자 해주도 아기도 많이 힘들었다. 아쉬움과 슬픔에 둘 다 펑펑 울었다.
그러나 해주는 깨달았다.
비록 모유는 끊었지만, 이제는 이 아이를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도 다짐했다.
(첫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너에게도 꼭 모유수유를 해줄게.)
단유를 마친 뒤, 해주는 아이와 함께 도시락을 싸서 여기저기 소풍을 다녔다. 매일같이 새로운 추억을 쌓으며 모유 대신 더 깊은 유대감을 만들어 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유수유를 꼭 해야 한다, 분유보다 낫다)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엄마와 아이에게 맞는 방법’이다. 상황에 맞게, 최선의 조건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이 가장 좋은 육아라고 나는 믿는다.
오랫동안 수유를 이어오며 주변에서 이런 말도 많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 좋은 분유가 얼마나 많은데,
그 영양가 없는 모유를 왜 그렇게 오래 먹여?”
하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을 고집했던 것뿐이다.
누구의 방식이 아니라, 나와 내 아이에게 가장 맞는 방법으로 아이를 키워온 것이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육아를 택한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모유 부심’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한다. 모유수유를 하며 아이들과의 유대가 깊어졌다. 물론 수유를 가장 오래 한 첫째 아들과 지금도 가장 유대감이 높다.
네 아이 모두에게 모유수유를 하였고 , 이 아이들은 단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해 링거를 맞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만큼 모유를 통해 얻은 면역력과 사랑의 힘을 믿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엄마로서 겪은 모든 고통은 결국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