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부: 하늘은 할머니의 기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해주는 전주에서 내려와 다시 군산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군산에서는 주말마다 웨딩홀 프리랜서로 일하며, 웨딩스튜디오에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와 엄마, 해주 그렇게 세 식구는 그 사이 시골을 벗어나 원룸 생활을 거쳐 드디어 함께 살 아파트를 구했다. 시골에서 원룸, 그리고 아파트로 오기까지는 참 많은 날들이 있었다. 갑작스레 원룸으로 옮긴 데에는 사실 큰 사건이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동네사람들은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 정도였다. 해주네 골목 입구 제일 첫 번째 집에는 50대 노총각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낮이고 밤이고 해주네 집 근처를 서성이며 창문을 훔쳐보거나, 빨랫줄에 널어둔 두 모녀의 속옷을 훔쳐가곤 했다. 할머니 댁은 방이 두 개였다. 해주 방은 엄마와 할머니방과 떨어진 바로 옆이었고, 집 밖 창문으로 해주 방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였다. 그 작은 창문으로 노총각은 매일 까치발을 들고 서서 해주를 훔쳐봤다.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도 노총각은 창문을 두들기며 매일 염탐했고, 그 일로 해주는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사실 그 남자는 지능이 부족해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해주의 외할머니가 그동안의 있었던 얘기들을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이야기하자, 그 노모는 아들을 심하게 꾸짖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들은 부엌칼을 들고 집 안에 있던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들을 찔러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여버렸다고 했다. 해주 할머니와 그 노모는 충격을 받았고, 여자 셋만 사는 해주네 집에도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해주는 무엇보다, 낮에 혼자 있을 할머니가 가장 걱정이 되었다. 해주의 걱정에 할머니와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50대의 힘 좋은 성인 남자를 세 여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 해주는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그 일로 그의 가족들은 결국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했지만, 마음 약한 노모는 차마 바로 보내지 못한다. 일주, 이주가 지나도 그는 여전히 마을을 돌아다녔고, 해주는 그 노모의 아들이 정신병원에 갈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었다. 엄마는 이전에 이미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기에, 6~7개월만 “조금만 더 참자”고 했다. 해주는 더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저녁이면 잠도 못 자고 밖에 위치한 허술한 샤워장도, 푸세식 화장실도 어느 하나 안전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주는 울며불며 할머니와 엄마를 며칠을 설득한 끝에 세 여자는 시내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해주는 바로 부동산을 돌며 방을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쉽게 구하지 못했다. 결국 본인이 직접 차를 몰고 전봇대에 붙인 원룸전단지를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연락했다. 다행히도 방을 구할 수 있었고, 엄마 미용실과도 가깝고, 해주 직장과도 가까운 방을 계약했다. 그 원룸의 단 하나의 흠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이었고, 아쉽게도, 제일 꼭대기층 3층 방이 마지막 남은 방이었다. 해주는 주인댁에게 할머니와 함께 살 거라고 얘기했고, 그런 주인댁은 “1층에 방이 비면 바로 옮겨드리겠다”라고 약속했다. 우린 그렇게 원룸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그 원룸은 새로 지어 깨끗했지만, 계단이 가팔라 할머니에게는 힘든 구조였다. 할머니는 매일 계단을 기어오르다시피 했고, 가파른 계단 때문에 외출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해주는 이 원룸에 세 식구가 살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 한편엔 언제나 불안이 자리했다. 엄마는 홀로 된 뒤로부터 여자 혼자 미용만으로는 해주도 할머니도 엄마의 노후까지, 책임지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엄마는 해주가 중학생이 된 후로부터 주식과 펀드, 부동산까지 스스로 배워나갔다. 엄마는 밤새 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주식 프로그램을 보면서 빼곡히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다시 한번 펜을 잡은 엄마는 꾸준한 노력으로 주식 시장도 넓히며 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파트 재테크, 코인 등으로 투자감각을 키워 나갔고, 엄마는 살면서 그동안 만져보지도 못했던 돈들을 직접 손에 쥐는 황홀한 맛도 보았다고 했다. 나날이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엄마는 웃으며 해주에게 말했다.
“해주야 돈을 벌려면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세상엔 죽도록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어.”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살면 하늘도 감동해서 네 편이 되는 거야.”
“너는 엄마가 예쁘게 살아서 뭘 해도 꼭 잘 풀릴 거야!”
“엄마는 더 열심히 벌 테니깐, 너는 앞으로 잘 살 생각만 해!”
해주는 그런 엄마를 보며 같은 여자로서 진심으로 존경했다. 기다리던 아파트 입주날이 다가왔고, 해주는 주말마다 엄마와 가전제품 매장을 돌며 신혼부부처럼 설레었다. 엄마는 해주 방을 공주처럼 꾸며주겠다고 약속했고, 침대, 책상, 소파, TV장들을 고르며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천장과 벽에는 금빛 몰딩이 둘러져 있었고, 가전과 가구는 모두 최고급이었다. TV 속에서나 보던 귀한 집, 무엇보다 엄마가 처음으로 마련한, 안전하고 튼튼한 새집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세 여자가 함께 살 집이 되었다. 집에 놀러 온 사람마다 집이 고급스럽다며 감탄했고, 저마다 구경을 할 정도였다. 해주는 하루하루 할머니께 가전제품 사용법을 가르쳐드렸다. 할머니는 신기해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곳이 이젠 할머니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 될 줄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힘든 그런 집.
길을 찾을 수 없는 미로 같은 아파트 단지.
혼자 쓸쓸히 안에서만 견뎌야 했던 나날들.
아마 이 새 보금자리는 할머니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시골집을 놔두고 이곳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마지막 여생을 딸과 손녀딸과 함께 보내고 싶어서가 아니였을까? 할머니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엄마와 해주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엄마는 가끔 할머니를 모시고 미용실로 출근하기도 했지만, 쇠약해진 할머니의 몸은 이제 오래 앉아 있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점점 집에 홀로 계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해주가 외출하려 하면 할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해주야, 할미랑 놀자. 나가지 말아~”라고 말씀하셨고, 그때마다 해주는 할머니가 친구들을 못 만나게 하려는 줄 알았다. 그렇게 일상적인 시간들이 지나고 나다 보니, 할머니는 점점 병이 들기 시작했고, 가끔 깜빡깜빡하시는 줄만 알았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병면을 진단받게 된다. 할머니 병명은 말로만 듣던 ‘치매’ 할머니의 병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된 상태였고, 그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할머니는 더욱 증세가 심해졌다. 심지어 밥을 드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밥을 안 먹었다며 또 밥을 드셨고, 매일같이 수건을 접고 펴곤 하셨다. 할머니는 마치, 딸이 힘들던 시절 미용실에서 파마 페이퍼를 정리했었던 그 시간 속에 멈춘 듯하였다. 할머니는 매일 옷가지와 수건 등을 게며 집안에 있는 고무줄을 모아 팔목에 끼고 다니셨다.
가끔 병원에 가서 할머니의 상태를 점검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의사는 할머니의 치매는 정말 예쁜 치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는 점점 심해졌다. 가장이었던 엄마는 차마 일을 놓을 수 없었고, 해주는 그때 마침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어느 날 엄마가 해주에게 말했다.
“해주야, 간호조무사 국비 신청해서 다녀보는 게 어때?
“미용하는 사람들도 간호조무사 자격증 있으면 좋대.”
엄마는 해주와 함께 돌아가며 할머니를 돌봐야 했기에, 오후 4~5시에 끝나는 간호학원이 훗날 해주에게도 지금의 우리 상황에도 딱 맞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해주도 일을 그만두고 잠깐 쉬고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간호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학원은 다행히도 걸어서 20분 거리의 집 근처였고, 아침에 가면 오후 다섯 시쯤 끝났다. 그리고 시간은 마침 할머니가 노인 유치원에 다녀오는 시간과 비슷했다. 할머니는 낮에 치매 노인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아침에는 엄마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유치원에 보내 드리고, 해주는 학원이 끝나면 집 앞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렇게 엄마와 해주는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돌 보았다.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갈 때면 가끔 할머니는 맨 정신으로 돌아와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손녀딸, 내 손녀딸이 최고야.”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걸었다.
“우리 딸은 미용실 원장이고 야는 착한 내 손녀예요~”
“야가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라며 자랑하셨다.
해주는 그렇게 어릴 적 할머니께 받았던 사랑을 이제는 아기가 되어버린 할머니에게 돌려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변기에 손을 씻고, 대변을 만지고, 엄마와 해주에게 욕도 하였다. 그동안 치매치 곤 아주 예쁘게 물들었던 할머니는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밤마다 “저승사자가 왔다”며 울고불고, “안 가! 절대 안 가!”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런 엄마와 해주는 점점 지쳐갔다. 한 번은 엄마가 할머니를 시설에 모셨지만, 그렇게 시설에 보낸 엄마는 많은 죄책감에 시달려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며칠도 버티지 못 한채 모시고 왔다.
어느 날 엄마는 가까이 사는 이모와 서울에 계시는 큰 이모에게 할말이 있다며 집으로 불러 들였다.
그렇게 세 자매는 모여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큰 언니, 작은언니 엄마가 지금 많이 안 좋아, 병원에서 치매래.”
“내가 혼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언니, 우리 힘들어도 엄마 가실 때 까진 만 옆에 있어 드리자.”
“엄마가 우리 옆에 계시는 것도 아마 길어야 2~3년일 것 같아.”
“우리 자매들끼리라도 돌아가면서 같이 돌봐드리자”
“내가 일을 하고 있어서, 현실상 매일 엄마 옆에만 붙어 있을수가 없어.”
“나는 그렇다 쳐도 솔직히 해주가 많이 고생했어”
“해주는 엄마 자식도 아닌데, 저 어린것한테 엄마를 맡기기에 나도 너무 미안해.”
맘 여린 이모들은 그래도 엄마의 말에 동요하였고, 해주 역시 할머니가 가시는 날까지 함께 도와드리기로 하였다. 원래 할머니의 자식은 여섯 남매였다. 위로 아들 둘, 딸 셋, 그리고 외국에 사는 착한 막내 외삼촌까지. 하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외면했고, 결국 곁을 지킨 건 해주와 세 자매들이었다. 우리 네 여자는 그렇게 서로 돌아가며 할머니 곁을 지켰다.
서울에서 큰 이모는 한 달에 두, 세 번씩 버스를 타고 내려와 하루 이틀 주무시고 가셨다. 집 근처 사는 작은 이모도 매일같이 오가며 해주와 엄마와 교대를 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일이 끝나고 오면 새벽까지 잠을 안 자는 할머니를 위해 꼬박 날을 새야만 했다. 우린 그렇게 모두 각자 개인 생활이 없어졌다.
해주는 어릴 때부터 기가 약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주에 백지처럼 하얀 기운이 많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쉽게 스며든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지쳐 있을 때면 해주는 거의 매일 가위에 눌렸고, 꿈도 유난히 많이 꾸었다. 그 꿈들이 신기하게도 종종 현실이 되어 가족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잠들면 숨이 막히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무렵, 이모네 집에 엄마와 할머니가 잠시 가셨을 때, 지금의 남편과 할머니는 만나게 된다. 예전에 잠깐 해주엄마에게 해주에게 듬직한 군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듣긴 했지만, 치매가 오고 나선 기억을 잃으셨다. 그때 남편이 해주 엄마에게 술이 취한 채 울면서 전화를 하였고,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하는 걱정된 마음에 지금의 남편을 잘 타일러 이모네 집으로 오게 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렇게 할머니와 이모네 집에서 얼굴을 보게 되었고, 가끔 한 번씩 말끔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할머니는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군인 총각 말여 해주 신랑감이여.”
“해주는 가랑 결혼해야 잘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도 해주를 끔찍이 사랑하는 그 순수한 청년이 너무 맘에 들었었고,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처럼 해주를 그렇게 홀로 사는 군인총각에게 보냈던 것이다. 할머니는 혹시 모든 걸 알고 계셨을까? 해주네 집은 무속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기도하던 집안이었다. 해주 할머니는 매일 새벽 성수를 떠 놓고 하늘에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손녀를 위해 매일을 기도 하셨다. 신내림을 받지 않은 할머니는 꿈도 잘 맞췄고, 무엇보다 사람을 잘 보는 눈이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미래의 이 손녀사위가 해주와 잘 살 거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곧 사랑하는 딸과 금쪽같은 손녀딸 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할머니는 가시는 마지막까지 손녀딸만큼은 자신의 딸처럼 외롭게 살지 않기를 바라며,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정신줄을 잡고 계셨던 건 아닐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그날의 밤. 할머니는 온전치 못한 정신 속에서도 미래의 손녀사윗감을 단번에 알아보셨던 것 같다. 매일 가족의 건강과 손녀딸의 행복을 빌던 할머니의 간절함을, 내가 보기에도 하늘도 잊지 않으셨던 것 같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어떻게 때 마침 그날 할머니는 오랜만에 가장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셨을까? 그 후로도 심한 치매를 앓고있는 와중에도 할머니의 머릿속엔 지금의 내 남편이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매일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 울던 그 총각이 우리 해주 사윗감이야.”
“해주는 그 사람과 결혼해야 잘 살어!”
그리고 정말, 우리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하늘이 정해준 인연처럼 부부가 되었고, 남편은 나를 나는 남편을 서로를 세상에서 제일 끔찍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 때론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우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