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사춘기를 디자인한 해주 이야기
군산에서의 해주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다. 할머니 댁에 들어갔지만 이미 망아지로 변해버린 해주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엄마는 이미 해주의 공부를 오래전에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주에게 엄마는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가 살아보니까, 기술이 최고더라. “
“특히 여자는 아이 낳고 나이 들어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해. “
“엄마는 지금까지 미용 시작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
“그러니, 너도 나처럼 차라리 미용을 배워라. “
“너는 손재주도 있고 나 닮아서 분명, 잘할 거야. “
해주는 엄마의 진심 어린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솔직히 공부에 취미도 없었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머리를 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미용은 해주에게 낯설지 않았다. 고2 무렵부터 해주는 미용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미용학원의 지독한 파마약 냄새도, 서걱서걱 가위질 소리도 해주에겐 모든 게 익숙했다. 해주는 가발머리카락을 자를 때마다 자신의 손끝으로 무언가를 완성할 수 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엄마 말대로 손재주가 있었던 해주는 금세 흥미를 느꼈고, 학원에서도 눈에 띄게 실력이 늘었다. 학원엔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해주 또래의 남자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말만 붙이면 얼굴이 붉어졌던 수줍은 해주 또래 남자아이가 말한다.
“야! 너 파마약 냄새 맡으면 머리 아프지 않냐?”
“이건 어떻게 말면 되는 거냐?”
“너네 엄마 미용사라며? 그니깐 네가 나 좀 알려줘 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걸었던 그 작은 소년은 힘껏 용기를 내 해주에게 말을 붙이곤 했다. 미용학원에서의 일상적인 작은 대화들로 둘은 미용학원 꼬꼬마 공식 커플이 되었고, 서울에서의 아픈 첫사랑으로 남아 있던 옛 남자친구도 금세 잊었다. 수줍음이 많은 그 남자아이의 웃음 속에 해주의 마음에는 또다시 벚꽃이 피었다. 해주는 학교를 마치면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 엄마 미용실로 갔다. 2년 동안 학원에 다니며 여상을 다닌 해주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나가게 된다. 그렇게 이번에도 해주는 엄마와의 생활을 오래 하지 못 한채 떠났다. 해주는 홀로 다시 타지로 나가, 낯선 공장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공장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밤낮이 뒤바뀐 3조 4 교대 근무에 정신없이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눈 하고 코만 빼꼼 나온 답답한 하얀 우주복, 그리고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윙윙 기계 소리, 너무나 그리운 엄마와, 남자친구. 해주는 매주 한 번씩 쉬는 날이면 버스를 타고 군산으로 내려가곤 했다. 고된 일속에 해주의 몸은 점점 지쳐갔고, 부엉이처럼 밤낮이 바뀐 생활 속에서 마음도 함께 무너져갔다. 일하다 실수라도 하면 선임에게 눈물콧물 쏙 빠지게 혼이 났고, 해주는 매일 기계처럼 출근하는 내내 생각한다.
(여기서 더는 못 버티겠다.)
(이러다 내가 정신병 걸리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그런 해주에게 같은 말만 반복했다.
“조금만 참어, 조금만 참다 보면 익숙해지게 돼있어!”
(엄마는 해주가 정말 힘들때에는 맨날 참으라고만 한다.) 해주는 생각 한다. 엄마는 딸이 죽기보다 힘들다는데, 버텨보라고만 하다니, 아마도 엄마는 망아지였던 나와 단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건 아닐까? 아니면, 엄마는 나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는 걸까? 혼자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그리곤 결심한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퇴사해 버리기로. 그렇지만, 퇴사하려면 몇 달의 절차가 필요했다. 단 한시라도 그곳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던 해주는 기다리지 않았다. 같이 취업 나온 친구에게 살짝 말을 한 뒤, 트렁크에 옷 몇 벌을 챙겨 야반도주를 해 버리고 만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몰래 공장을 빠져나왔고, 누구한테라도 목덜미를 잡힐세라 급히 택시를 타고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수많은 공장의 불빛. 전화는 계속 오고, 겁도 나고 눈물도 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찍 도망 나와서 그런지 해주는 첫 차를 타고 아침 일찍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곤, 엄마에게 곧장 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혼날까 봐 두려웠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엄마의 실망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간 엄마와 연락 없이 친구들을 만나며 지내다 결국 엄마에게 돌아간다. 해주와 연락이 안 되었던 엄마는 미용실에 온 해주를 보고 놀랐지만, 엄마는 곧 포기한 듯 말했다.
“그래, 차라리 잘 왔다.”
“거기서 나는 네가 오래 못 버틸 줄 알았다.”
“근데, 밤에 혼자 도망치면 어떡하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해주는 엄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크게 한숨을 내 쉬며 덧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엄마랑 미용실에서 같이 일하자.”
“내년에 엄마가 전문대에 보내 줄 테니, 피부미용과에 입학해.”
힘없이 내뱉는 엄마의 말속에 묵은 한이 섞여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학에 보내지도 못하고 공장에 그리 보내야 했던 그 죄책감. 그런 해주에게 사죄하듯 엄마로서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내린 결단이었다. 해주는 그렇게 엄마와 함께 미용실에 있었고, 종종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남자친구도 다시 만나면서 자유를 맘껏 즐겼다. 엄마의 날라리 시다는 매일 놀러만 다녔고, 엄마는 그런 해주를 단 한 번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해주에게 말한다.
“해주야 어차피 너 몇 달 뒤면 대학교 가잖아?
“그러니깐, 지금은 너 놀고 싶은 대로 펑펑 놀아라!”
“엄마가 너무 바쁘면 한 번씩만 도와주고.”
“대신 학교에 입학하면, 진짜 열심히 해야 돼, 알았지?”
엄마에게 공식적으로 자유허락을 받은 해주는 시골에서 엄마와 미용실로 출근하며 점심만 먹은 뒤 나가서 놀고 오곤 했다. 시골에서 미용실을 출퇴근했던 터라, 엄마는 9시가 되지도 않은 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매불망 저녁밥도 먹지 않고 매일 엄마를 기다리는 할머니 곁으로 서둘러 퇴근을 재촉한 것이었다. 늦게까지 놀고 싶었던 해주는 종종 친구들과 술도 마시며 미용실 근처 찜질방에서 자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해주는 21살의 나이로 1년 늦게 전문대에 입학하게 된다. 해주는 꿈 꾸던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대학교 부과대표도 맡으며, 학교 치어리더단장도 하며 대학생활을 만끽하며 지낸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더 많은 실습을 위해 학원을 따로 다니며, 네일아트와 메이크업 강사 자격증까지 따며, 종종 있는 대회도 참가하며 상들도 받아왔다. 그리고 해주는 학원 원장님이자, 학교 교수님의 눈에 띄어 주말엔 미용학원에 시간제 강사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강사 월급으로 받은 첫 월급으로 해주는 엄마에게 14k가락지도 선물했다 그 볼품없고 밋밋한 가락지는 엄마는 항상 끼고 다니며 이 손님 저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우리 딸래미가 학원 선생님으로 일해서 번 월급으로 사준 거라며 얘기하고 다녔다. 미용실 원장인 엄마도 21살의 대학생 딸이 시간제 강사로 일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매일 사고만 치고 엄마 속을 썩였던 그 망아지 딸이 점점 엄마의 곁에 맴도는 송아지가 돼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해주를 보며, 해주가 꼭 성공의 길로 가는 것만 같아서 너무 뿌듯해했다. 해주의 대학생활은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빛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남자친구와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게 되고 대학생활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남자친구는 해주를 몇 번이고 붙잡다가 포기하고 군대에 가 버렸다. 그 남자친구였던 아이가 휴가를 나올 때면 가끔 보긴 했지만, 이제 둘은 서로 다른 세상에 서 있었다. 그렇게 전 남자친구는 이제 휴가를 나와도 해주를 안 보게 되었고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해주는 정말 우연히 대학교 2학년으로 들어설 즈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저녁 해주에게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해주야~ 난데, 나 지금 남자친구랑 있는데.”
여기 병원 먹자골목 엘베강맥주집이거든? 여기로 올 수 있어?”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해주는 바로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친구커플과, 작고 왜소한 체형에 자잘하게 근육이 붙어있는 시커먼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친구 남자친구의 친구였고, 자리 한자리가 비어 해주를 부른 것이었다. 강호동같이 듬직하고 깍두기 같은 남자들이 이상형이 이였던 해주에겐 작고 마른 몸매에 하늘색 스키니진과, 케이스위스 작은 크로스백을 야무지게 맨 그 오빠. 이 오빠는 스타일조차 해주가 딱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더군다나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연상. 그 특전사 오빠는 해주와 2살 터울이었다. 해주는 어차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술자리니, 그냥 재밌게 놀다 오려고만 했다. 그 오빠는 부평에서 특전사로 있었는데, 훈련 중 허리를 다쳐 고향인 군산에 입원을 한 상태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친구의 남자친구가 그 당시 술값이 없어서 지금의 내 남편을 불렀고, 나와 말이 잘 통하여 쭈욱 함께 술을 마셨던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술을 좋아했고 여자치곤 잘 먹었던 터라 현재의 남편과 둘이 세꼬시집에서 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소주 12병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우린 서로 취하지도 않았다. 새벽 내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 통하는 게 많았고 연상이 처음인 해주에게도 지금껏 만났었던 동갑내기인 남자친구들과 달리, 아빠 같은 자상함과 포근한 연상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둘은 그 뒤로 서로 연락을 하며 자주 병원 근처에서 만나면서 자연스레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연상의 남자친구를 사귄 해주는 그 특전사 오빠가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배려심에 금방 사랑에 빠졌다. 특전사 남자친구는 시간이 지나 퇴원날짜가 다가와 해주와 예쁜 사랑을 하고 있는 채로 인천 부평으로 다시 가 버렸다. 그 당시 연락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군인들에겐 삼일에 한번 일주일에 한 번 10분 정도만 연락이 허락되었다. 자주 볼 수도 연락도 할 수 없었던 해주는 지금 남편과도 자연스레 이별을 하게 된다. 훗날에야 알았던 거지만, 남편은 펑펑 눈이 오는 날 해주의 자취방 앞에서 1000송이의 빨간 장미를 들고 밤새도록 해주를 기다렸다고 했다. 해주는 주변에 같은 과 친구들이 자취를 많이 했기에 자취방들을 돌아가며 친구들과 술을 먹고 학교에 갔던 터라, 그 추운 겨울 자취방 앞에 남편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집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남편은 그 당시 새벽까지 기다리다 너무 춥고 오지 않는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지갑을 탈탈 털어 샀던 1000송이의 장미꽃을 버리고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남편 또한 해주가 너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긴 머리가 원래 자신의 이상형이긴 했지만,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드라마, " 내 이름은 김삼순"처럼 김선아 같이 키가 크고 통통한 여자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때 내 머리는 긴 생머리였지만,150센티에 41킬로로 작고 마른 체형의 나는, 남편 이상형의 거리와도 상반되는 것이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 연락도 하지 않은 채로 지내며 2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른 지역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까? 남편과 나의 연애 스토리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돌고 돌아 우연하게 만나게 된 남편과의 첫 만남. 우린 이상형도 서로 달랐고, 오로지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푹 빠지고 만다. 그 당시 남편은 내게 그리 매달렸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고 한다. 남편이 휴가를 나온던 날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집이 군산인지도 잊은 채 매일 밖에서만 밥을 사 먹는다고만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요리를 해 오며 자취를 하며 나는 밥도 혼자 해 먹었던 터라, 그런 남자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손수 차려주고 싶었다. 대학시절 돈이 없었던 나는 자취방 근처 오분거리 시장에 가서 한 알에 200 원하는 계란 3알을 사서 계란말이를 하고, 집에서 가져온 김치로 참치김치찌개도 끓이고, 제일 값이싼 돼지고기 뒷다리로 2000원 어치를 사다 제육볶음을 해 줬었다. 그렇게 남편은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성인 여자에게서 따뜻한 밥상을 받아 봤다고 한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내게 말해 줬다. 내가 무슨일이 있어도 너를 꼭 잡아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그때 너랑 꼭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고, 그래서 니가 아무리 날 밀어 내고 했어도 나는 그때 너에게 내 모든 걸 바치기로 마음 먹었기에, 니가 계속 튕겨도 붙잡았던 거라고 했다. 그런 나는 한결같이 나에게 잘 해주는 자상한 남편에게 푹 빠졌던 것이다. 나는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내 가방을 내 손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신발을 신으려고하면 나보다 더 앞서 내 신발을 먼저 신겨주곤 했었다. 물론 연애 때는 서로 무섭게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남편은 언제나 내가 먼저였다. 나에 대한 사랑은 결혼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아이들이 있는 지금도 아이들 보다 가장 먼저 내게 생선살을 발라 준다. 물론, 그런 나 역시 고기를 먹을 때면 내 입속으로 먼저 단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우린 돌고 돌아 그렇게 다시 만나 결혼을 하였다. 남편과 나는 가끔 티격태격할때도 있지만, 아직도 서로를 가장 끔찍이 생각한다. 지금 읽고 있는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뱃속에 있는 이 다섯째 아이가 남편과 나의 애정 결과물을 대신해 주고 있다. 우린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또 다른 사랑을 피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