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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었을까?

제7부: 사실은, 외할머니와 엄마가 맺어준 남편과의 인연

by 최해주

남편과 해주는 정말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해주는 졸업을 한 뒤 전주로 갔다. 낮에는 시간제 메이크업 강사를 했었고, 저녁엔 스포츠마사지샵에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고시원에 들어가 함께 지냈다. 전주는 군산과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해주는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친구와 가끔 술도 마시러 가며 평범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 한창 놀기 좋아하던 때였다. 해주는 친구들을 좋아했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어느 평범한 주말, 일을 마친 해주는 친구와 함께 전주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게 되었다.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친구와 함께 들썩이며 춤을 추고 있는데, 해주의 등 뒤에서 누군가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대학교 때 만나고 헤어졌던 바로 그 ‘특전사 오빠’였다. 해주는 너무 신기했다. 서로 연락을 안 한 지 거의 2년이 되었으니까. 가끔 그 오빠가 생각나긴 했지만, 해주도 연락처가 바뀌었고, 그 오빠의 연락처도 없었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군산도 아닌 전주 나이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최해주 에세이

해주는 오빠가 반가웠고, 오빠도 그런 해주를 보고 너무 반가워했다. 둘은 “조금 있다가 같이 나가서 술 한잔하자”라고 약속했다. 그렇게 나이트에서 춤도 추고, 맥주도 마시며 불빛 속에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해주는 친구와 함께 왔는데, 친구 남자친구와 함께 2차로 이어진 술자리가 길어졌다. 결국 해주는 만나기로 했던 오빠를 만나지 못한 채 술에 취해 친구와 함께 고시원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친구와 함께 일을 마친 뒤 해주는 그토록 궁금했던 그 특전사 오빠를 만나러 갔다. 친구도 고등학교 친구였기 때문에 예전에 해주와 오빠가 교제할 당시 종종 함께 어울리며 알고 있던 사이였다. 셋은 포장마차에 앉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풀었다. 그렇게 오빠와 운명적인 재회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해주는 오빠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면 해주는 버스를 타고 오빠를 만나러 가곤 했다.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나 예쁘게 사랑을 이어갔다. 이건 짧은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그날 일이 너무 생생해서 꼭 이 이야기 속에 담고 싶었다. 어느 날, 해주는 오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던 참이었다. 표를 끊고 버스를 타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꾸미기 좋아하는 해주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한껏 예쁘게 치장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알록달록 보석이 박힌 하얀 샌들. 웃프지만 속옷도 얼마나 신경을 썼겠는가. 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데, 사람들이 해주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해주를 보며 귓속말을 했다.

해주는 생각 했다.

(오늘 내 스타일이 좀 예쁜가?)

(하긴, 오빠 만나려고 새로 산 보석 샌들도 신고 예쁘게 입긴 했지.)

위풍당당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데, 버스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아저씨들이 해주를 보며 키득키득 웃더니 손가락질을 했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그리고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처럼 장단을 맞추며 더 크게 외쳤다.

“팬티 보인다~ 팬티 보인다~”

“핑쿠색 팬티래요~ 핑쿠 빤쮸래요~!”

순간, 해주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다급히 어깨를 툭 치며 귓속말했다.

“아가씨!! 팬티에 원피스 꼈어!!”

해주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줌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아가씨, 팬티에 원피스 꼈어! 아가씨 팬티..)

뒤를 돌아 얼른 엉덩이를 확인하니, 아니 진짜로 원피스가 엉덩이가 훤히 다 보이도록 팬티에 한 움큼 끼어 있지 않은가! 해주는 재빨리 원피스를 빼내며 다리를 들썩이고, 엉덩이를 돌려봤다 또 봤다를 반복했다. 벤치에 있던 50대 대머리 독수리 아저씨들이 더 크게 키득거리며 외쳤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그 모습을 본 옆의 아주머니가 크게 소리쳤다.

“좀 조용히 하세요!! 애들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리고 해주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어서 버스 타요, 아가씨!”

아줌마의 등쌀에 밀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해주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때 해주의 심정은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따라 버스는 또 왜 그렇게 출발을 안 하는지. 심지어 아까 수군거리던 여자들도 버스에 함께 타 있었다. 해주는 내릴 수도, 그냥 갈 수도 없어 바닥에 가방을 털썩 내려놓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긴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항상 그랬듯 오빠가 마중을 나와 해주를 창문 너머로 찾고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오빠 얼굴을 보는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터졌다.

“오빠! 나 모르는 사람들한테 내 팬티 다~ 보여줬어!!”

울먹이며 소리치는 해주에게 오빠는 갸우뚱하며 물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팬티를 왜 보여줘?”

정말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 말에 해주는 더 울컥했다. 버스 타기 전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자, 오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보여줘~”

해주는 순간 폭발했다.

“진짜 미쳤어?” 하며 오빠를 퍽 치고 더 크게 울었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남았고, 지금도 종종 그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오빠 만나러 오면서 동네방네 팬티 보여준 거 알지?”

“그때 오빠 만나려고 새로 산 속옷 입고 간 건데,”

“동네방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내 빤스만 다 구경했잖아.”

그러면 오빠는 웃으며 말한다.

“그냥 봉사했다 생각해. 아저씨들도 분명 좋았을 거야.”

장난기 많은 남편은 아직도 나와 연애 때처럼 티격태격한다. 남편은 지금도 나한테 장난을 정말 많이 친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바지를 내린다거나, 똥침을 한다. 한동안 매일같이 당하는 똥침에 나는 남편 앞에서 절대 먼저 걷지 않았고, 먼저 간다 하더라도 손으로 꼭 똥꼬를 가리고 갔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더 웃었다. 그리고는 더 심하게 장난을 쳤다.

“하지 말라니까!” 소리도 질러보고 삐져봐도 소용없었다. 남편은 늘 말했다.

“너 반응이 너무 웃겨서 더 하고 싶다니까?”

“그니깐 아예 반응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그래서 해주는 어느 날 아예 반응하지 않고 똥침을 해도 꾹 참고 있었더니, 남편이 정말 기관총 쏘듯 똥침을 계속하는 게 아닌가? 해주가 얼굴이 붉어진 채 소리쳤다.

“야! 반응 안 하면 안 한다며!!”

“진짜,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크게 소리치자 남편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반응이 없길래, 계속해도 되는 줄 알았지.”

해주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났다. 아빠의 장난을 자주본 아이들도 너도나도 와서 해주에게 똥침을 했다. 해주는 전에 말했다시피 9살, 7살, 5살 아들들과 3살 딸이 있다. 세 아들들이 이 아빠를 닮아서 얼마나 장난기가 많겠는가? 해주는 한동안 네 남자들에게 돌아가며 매일같이 똥침을 당했다. 혼을 내봐도 아빠가 장난을 치니 아이들도 똑같이 장난을 쳤다. 해주는 어느 날 남편을 호되게 혼냈다.

“오빠 만약에 우리 아들들이 학교나 어린이집에 가서 여자애들 똥침하면 어쩔 거야!”

“오빠 진짜 이런 장난하면 안 되는 거야! 애들이 자꾸 따라 하잖아!”

“얘네는 장난이겠지만, 남자애들이 여자애들한테 똥침 한다고 생각해 봐!”

“그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화가 나겠어?”

남편은 나의 말을 수긍하는 척 끄덕거렸어도, 아마 절대 공감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던 우리에겐 남편과 똑 닮은 공주가 태어났다. 이제 딸을 가진 남편에게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 지아가 어린이집에서 남자애가 똥침하면 어쩔 거야?”

해주의 말을 들은 남편이 아무 말하지 않다가 아들 셋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앞으로! 우리 집에선 똥침 금지다! 알았나?”

정말 그 뒤로는 아이들도 남편도 해주에게 그런 장난을 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 남편은 해주와 둘이 있을 때 똥침도 하고 바지도 내리고 도망가고 그런다. 뭐 이뿐만이겠는가? 더 심한 장난들도 많이 하지만,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모두 성인임을 간주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장난인지는 알 꺼라 믿는다. 그리고 이런 장난은 해주는 본인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제 많은 부부들이 이런 장난을 많이 친다고 들었다. 아무튼 우린 연애 시절 그렇게 오랫동안 장거리 연애를 하며 함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사랑을 키워갔다. 물론 그 장거리 연애도 오래가진 못 하고 결국 헤어졌지만, 남편과 나는 어떻게 다시 연결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진 뒤 나는 다시 전주에서의 생활을 접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남편은 군산에 내려와 있다는 내 소식을 듣고 나를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 술에 가득 취한 채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고,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 당시 엄마 미용실 근처 이모네 집에 있었다고 한다. 전화사이로 술에 취해 울고불고 통곡하는 남편의 목소리에 엄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었고, 남편을 이모네 집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런 남편은 그날 만취가 된 채 이모네 집에서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이모 이모부가 다 있는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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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해주를 왜 이렇게 예쁘게 낳으셨어요.

“저 해주 없으면 못 살아요.”

“저는 해주를 좋아하는데 해주가 또 제가 싫대요.”

“어머니가 해주를 너무 잘 키워놔서 제가 힘들어요.”

순진하고 착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 젊은 군인총각의 눈물을 쏙 빼는 나쁜 년이 된 나는 이 광경을 목격한 가족들에게 며칠을 시달려야 했다.

엄마는 낮이고 밤이고 해주에게 말했다.

“너 그렇게 살면 천벌 받는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눈물 흘리게 하면 넌 피눈물 난다!

“너 내 새끼지만, 진짜! 나쁜 년이다!!”

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가 말했다.

자고로, 여자는 남자가 좋아 못 죽고 사는 사람을 만나야 잘 사는겨.”

“남자가 저렇게 할미 앞에서도 눈물을 보일 정도면 널 너무 사랑하는거여~

긍게, 그냥 너 쟤한테 시집가아~”

놀러 온 이모가 덩달아 말한다.

“야!! 애가 참 순수하고 착하더라!

“남자답고, 듬직하고, 정직하고 나는 너무 예쁘더라~”

세 여자들에게 정신없이 따발총 사례를 받은 나는 그만 혼이 쏙 나갔다.

“아! 진짜 내가 알아서 할게!” 말 한마디가 끝 나기 무섭게, 엄마와 이모가 내게 소리쳤다.

“야! 이 가시네야! 너 솔직히 니 성격 맞추는 남자 없다!!”

그치! 맞아! 니 성질 누가 다 맞추냐?”

세 여자는 나를 놀리듯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엄마와 할머니는 내 얼굴만 마주치면 며칠을 들들 볶았다. 그러고 나서도 나는 남편에게 연락을 안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편은 이제 정말 다 포기했고, 나를 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고 한다. 그 통화의 주인공은 바로 지금의 장모님이 된 우리 엄마였다고 한다.

“잘 지내고 있지? 그때 잘 갔지?”

“그때 잘 갔는지 너무 걱정돼서 연락해 봤어.”

다름이 아니라, 해주가 그리 좋니?

남편은 한창 홀로 정리를 하던 참이라 차마 말을 못 했다 했다.

그러자 엄마가 충격적인 말을 하고 마는데.

“부대 근처에서 자취한다고 했지?”

“해주 그냥 데려가~”

“해주 그냥 데리고 가서 살면서 날 잡아봐~.”

“내가 해주한테는 잘 말해 놓을 테니”

“해주 짐 싸 놓고, 연락하라고 할게.”

그리 말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이제 정말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를 데려가라고 하니 정말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고 했다.

(내가 남자인데?)

(남자 혼자서 자취를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을 나한테 그냥 이렇게 준다고?)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조금은 아이러니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정말로 엄마와 할머니 등쌀에 떠밀려 간단히 짐과 함께 남편에게 갔다. 얼떨결에 남편의 자취방에 가서 남편 아침 밥상을 차리고, 출근을 배웅하고, 퇴근을 기다리며 그렇게 몇 달을 지냈다. 둘은 함께 그 작은 원룸방에 있다 보니 더 가까워졌다. 나는 처음 자취하던 시절 오빠에게 밥상을 차려줬던 것처럼 시장을 가서 장을 보고 오빠 밥을 차렸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합법적인 동거 생활을 하였다. 결혼 날짜는 순식간에 잡혔고, 결혼식보다 혼인신고를 먼저 하게 되었다. 혼인신고를 서둘렀던 이유는 혼인신고가 되어 있어야만 군인 관사를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혼인신고를 한 뒤 차례대로 상견례를 마쳤다. 우린 2년 동안 연락이 서로 끊긴 채 우연이 전주에서 만나게 되어 다시 만남을 가지고, 그 후론 할머니와 엄마로 인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곤 엄마와 할머니는 둘이 얘기했다고 한다.

“엄마 이 가시네 그때 잘 보냈지?

“그려~그려~ 우리가 그때 잘 보낸겨~

“안 그럼 맨날 정신 못 차리고 놀고 다녔을 거 아냐? 그치 엄마?

“긍게 역시 여자는 남자가 죽고 못 살아야 혀~

“그래야 결혼혀도 여자가 사랑받고 사는겨.”

“맞아! 엄마! 우리 해주는 나처럼 살지 말고, 남자한테 사랑받으면서 살아야지. 그치 엄마?”

그렇게 우린, 할머니와 엄마가 다시 맺어준 인연으로 2014년도에 검은 머리 파뿌리 선언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 결혼식 이후 그동안 앓고 계셨던 치매를 앓다가 손녀의 뱃속에 있던 첫 손주도 품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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