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나의 전생과 다섯아이의 태몽
우물속 만삭의 여인
해주는 전에 말했다시피 꿈을 자주 꾸고, 예전엔 아주 가끔 영적인 존재도 느끼곤 했다. 아이가 하나둘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그런 존재를 보진 못했지만, 가끔 등골이 오싹할 때나, 꿈을 또렷하게 꾸곤 했다. 그중에서도 해주는 계속 반복적으로 같은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꿈이었다. 시대만 바뀔 뿐, 해주의 모습은 항상 만삭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느 날은 조선시대 같았다. 밖에는 상투를 틀고 흰 소복을 입은 남자들이 횃불을 들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만삭의 배를 하고 작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둘 다 하얀 소복을 입은 채, 우물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배를 부둥켜안은 채 아이와 함께 덜덜 떨고 있었다. 우물 밖 사람들은 꼭 나를 찾는 것 같았다. 마치 집안에 대역죄인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그 씨를 없애버리려는 듯 기와집이 활활 불타올랐다. 나는 아이와 함께 우물 속에서 끝없이 떨고 있었다. 그렇게 그 꿈을 자주 꾸었고, 또 다른 꿈을 꿨다.
만삭의 여인 아들과 항구로 향하다
이번엔 조선시대보다도 더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주위엔 한복을 입은 사람도, 양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시대는 애매했지만, 분명 전생 같았다. 그때도 나는 만삭의 여인이었다. 쫓기고 있었고, 수많은 인파 속에 숨어 피난처 같은 움막으로 들어왔다. 이미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나는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내 옆에는 젊은 남자 하나가 있었다. 남편인지, 아들인지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젊었다.
나는 밖을 살피며 말했다.
“여기서 빠져나가서 항구로 가야 해.”
하지만 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무서워서 못 나가겠어요.”
그 말을 듣자 직감했다.
이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내 아들이었다.
밖은 한겨울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도망 다니고 있었다. 주위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숨은 움막 안에는 늙은 여자와 아이들, 젊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내 옆의 젊은 남자는 내 아들이 맞았다. 나는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전력질주했다. 항구로 가야 했다. 주변에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날아다녔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한 손으론 아이의 손을 잡고 앞만 보며 달렸다. 결국 항구에 도착했다. 우린 배에 올라 짐칸 같은 어두운 상자 속에 몸을 숨겼다. 나는 작고 왜소했기 때문에 아이와 둘이 상자 안에 간신히 몸을 웅크릴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이 너무 고요해서 상자 뚜껑을 살짝 열었다. 전쟁터를 벗어나 육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그곳을 걸었다. 그곳은 꼭 옛날 제주도 같았다. 돌이 많았고, 돌하르방도 보였다. 돌담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그곳으로 들어가니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아주머니들이 떡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더럽고 피폐한 나와 아이를 보고 처음엔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내 만삭의 배를 보고 마음을 돌렸다. 그 아주머니들은 나를 안으로 들여 떡과 먹을 것을 주며 “여기서 쉬다 가라”라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떡을 먹으며 간신히 숨을 고르는 그 장면이 내 머릿속에 늘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이 꿈을 네 아이, 다섯 아이를 가지는 동안 반복적으로 꿨다. 항상 만삭이었고, 언제나 도망자였다. 이 꿈은 엄마에게만 말했다. 내가 좀 영적인 존재를 느끼는 사람이고, 외가 쪽이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걸 닮은 거라 했다. 기도를 하면 잘 통하는 집안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나 전생에 항상 만삭이었는데, 쫓기며 살았어.”
“아이를 낳지 못하고 계속 죽은 것 같아.”
“이 꿈이 시대만 바뀌어도 늘 같은 만삭의 여인으로 나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내가 아이를 많이 낳는 걸까?”
“그때 낳지 못한 아이들을 지금 낳는 건 아닐까?”
엄마는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말 너는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낳는구나.”
나는 신내림을 받을 팔자는 아니지만 너무 예민하고, 외가를 닮아 기도를 하면 꼭 통했다. 엄마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말했다.
“해주야, 엄마를 위해 좀 기도 좀 해줄래?”
그럼 나는 염주를 들고 매일같이 108배를 드렸다.
그러면 엄마는 늘 말했다.
“이번에도 네 기도가 통했나 봐. 일이 잘 풀렸어.”
꿈도 잘 꾸고, 맞추는 일도 많았다. 예언가는 아니지만, 위험의 징조를 미리 느끼고 방지할 때도 종종 있었다.
다섯 아이의 태몽
이제 내 다섯 아이의 태몽을 이야기하며 이 책을 마무리하려 한다.
첫째의 태몽은 이랬다.
시댁 어르신, 남편, 아주버님과 함께 아무도 없는 섬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는 은빛 잉어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하늘 가득 은빛 물결이 흘렀다. 나는 낚싯대로 그 하늘 위 잉어를 잡았다.
그게 내 첫째 아들의 태몽이었다.
둘째의 태몽은 땅굴 속이었다.
살기 위해 맨손으로 흙을 파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금반지, 금팔찌, 금목걸이가 흙 속에서 나왔다. 결국 밖으로 나오자 주변은 산꼭대기였고, 산더미처럼 금덩이가 쌓여 있었다.
그게 둘째의 태몽이다.
셋째의 태몽은 외할머니 댁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성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셨다. 그 꽃밭에는 작은 사과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사극드라마에서만 보던 왕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는 초록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마루 위 나를 보며 다가오더니 초록 도포가 붉은 용포로 변했다. 왕이었다. 그 왕이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게 셋째의 태몽이었다.
넷째의 태몽은 아파트 17층 우리 집에서였다.
남편과 요리를 하고 있는데 베란다 창문 밖으로 눈이 부시게 붉은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내가 자주 입던 분홍 꽃무늬 원피스 위에 걸쳐 있었다. 문을 열고 손을 뻗어 원피스를 걷자 엄청나게 큰 붉은 해가 우리 집 창문 앞에 있었다. 그리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 집에 해가 들어오려고 해!”
그 말을 하며 깨어났다. 그게 넷째 딸의 태몽이었다.
다섯째의 태몽은 어머님이 꾸셨다.
나의 임신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에 어머님은 내가 아닌 아주버님의 태몽인 줄 아셨다고 했다. 꿈속에서 하늘로 흙빛 용이 올라가는 꿈을 꾸셨다고 한다. 처음엔 구렁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용이었다. 그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나도 다섯째의 태몽을 꾸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초록눈을 가진 하얀 페르시안 아기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가 내 젖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초록빛 눈은 보석처럼 빛났고, 아기 고양이 입가엔 내 모유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게 내 다섯째 딸의 태몽이었다.
첫째 아들은 친정엄마를 닮았고, 둘째 아들은 나를 쏙 빼닮았다. 셋째 아들은 시아버지를 꼭 닮았고, 넷째 딸은 아빠를 닮았다. 그래서 다섯째 아이의 얼굴이 너무 궁금하다.
이번엔 제발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이 글을 20화로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문장을 무엇으로 쓸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나는 글을 쓰며, 그저 “세상엔 별별 사람들이 산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건 육아 이야기도, 판타지도, 소설도 아니다. 그냥 내 인생 이야기다. 글을 전공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처음 내놓은 이 작품이 조금은 거칠고 어설퍼도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더 유해지고, 독자의 마음을 찌를 수 있는 글을 쓰게 되겠지.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 또 어떤 이야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생각한다. 지금껏 내 이야기를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나는 다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보지 않아도,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기다린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계속 써나가겠다고.
그리고 문득 묻는다.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