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평범한 삶이 멈추다.
오후에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유학원을 찾아갔다.
상담을 해준 사람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순간 역할이 바뀐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시니어 어학연수를 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했다. 꼭 학생이 아니어도 몇 달 정도 외국에서 지내며 언어를 배우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였다. 몇몇 지역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
그중에서 몰타가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라고 했다. 영어를 배우러 가는 사람들도 많고 날씨도 좋고 치안도 괜찮다고 했다. 물가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어학연수라기보다는 휴양과 유럽 여행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 많았다. 몰타에서 몇 달 지내면서 틈틈이 유럽을 여행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깐 상상을 해보았다.
회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곳에서 몇 달을 보내는 모습. 아침에 일어나 바다를 보고, 낮에는 영어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유럽 도시를 여행하는 생활. 생각만 해도 조금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다시 현실이 느껴졌다. 나는 직장인이었다. 갑자기 모든 걸 멈추고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어학연수냐.’
그렇게 생각하며 그날은 그냥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출근했다.
동료들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회사에 앉아 있어도 어학연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출퇴근길마다 계속 검색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몰타 어학연수 비용, 몰타 생활, 몰타 여행. 관련된 정보들을 계속 찾아보고 있었고 유튜브를 보며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이런 급발진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일주일만 생각해 보자. 충동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월요일이 지나갔다.
화요일이 지나갔다.
수요일이 지나갔다.
다시 동일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 회의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단순해졌다.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고 주말을 기다리는 생활. 그게 15년째 반복되고 있었다. 안정적인 생활이 필요하다고 버티고만 있었지만 나는 아직 결혼도 못 했고 혼자였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은 멈춰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결심이 섰다.
'그래, 가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회의실에 들어가 잠시 앉아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저… 휴직하려고 합니다.”
상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요?”
“네.”
사실 나도 정확하게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지금 시기에 휴직은 쉽지 않을 텐데요.”
상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진급을 생각해야 할 시기였고 팀에서도 맡은 일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 앞에서 결국 결정을 미룬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 쌓여 있던 것이 갑자기 밖으로 나온 느낌이었다.
회의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은 거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불안하기도 했고 동시에 묘하게 후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떠날 수도 있겠구나.’
그 이후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러 번의 면담을 하며 절차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회사 생활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부재로 인한 동료들의 시선도 느껴졌고 지금은 진급을 생각해야 할 시기에 휴직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안 중요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 순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휴직이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만 생각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조금씩 설레는 감정도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