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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자

by 하르딘

포르토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해서 equipaje(수화물) 표지판을 따라 걸어 나갔다. 전광판에 내 비행 편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시간이 지나도 뜨지 않아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가까운 공항 직원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Disculpe."(저기요) 일단 말을 붙였다. "Dime."(말씀하세요) 그다음에 "어....." 갑자기 이 상황을 어떻게 스페인어로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어설픈 영어와 더 어설픈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수화물 찾는 곳을 잘못 나온 것 같다. 이 항공편 수화물 찾으러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의도를 전달하는데 겨우 성공했다. 직원도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내가 가야 할 곳을 설명해 주었다. 정확히는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일단 Terminal에 따라 세 군데가 있고, 나는 Terminal 1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저기로 나가서 좌측으로 쭉 직진하면 된다는 것은 알아들었다.


나는 당연히 수화물 찾는 데는 꼭 한 군데뿐인 줄 알았다. 수화물 표지판을 따라 나왔으니 잘못 나왔으리라곤 생각도 못 해서 그 자리에서 거의 30분을 넘게 기다렸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또 엄청 멀었다. 혹시나 수화물을 못 찾으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직원이 알려준 Terminal1도 한 번에 못 찾아서 가는 길에 몇 번을 직원들에게 더 물어봐야 했다. 결국 비행기에서 내린 지 거의 1시간 만에 내 수화물 찾는 곳에 도착했을 때, 컨베이어 벨트 위에 내 캐리어 딱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무생물인 내 캐리어가 어찌나 안쓰럽게 보이던지.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1박을 하고 다음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또 중국공항에서 경유했다. 경유 시간이 4시간 정도라 경유지 나가지 않고 공항에서만 있을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분명 Transfer 표지판을 따라 나갔는데 정신 차려보니 입국 수속 후 밖으로 나와버렸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었던 건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밖으로 나와버렸으니 다시 출국 수속해서 들어가야 했다. 새벽 5시쯤이었어서 수속 대는 굳게 닫혀있었다. 1시간을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마드리드 공항 면세점에서 선물용으로 사 온 와인 한 병을 다시 못 들고 갈 가능성이 컸다. 겨우 3만 원짜리 와인을 수화물로 붙이는 건 비용과 시간상 내키지 않았다. "경유해야 하는데 실수로 잘못 나왔다"라고 영어로 얘기해 봤지만, 와인은 다시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3만 원짜리 와인 한 병을 수화물로 따로 붙일 바에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공항 안에 들어와서 트래블 카드 라운지 쿠폰 써서 라운지에 가려고 했는데 내 쿠폰을 쓸 수 없는 라운지란다. 이럴 거면 처음에 출국할 때 인천공항에서 쓸걸.. 마드리드 공항에서 수화물 잘못 찾아서 고생하고, 다음날 중국공항에서 경유지 못 찾아서 고생하고, 라운지 쿠폰도 못 쓰고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해외에서 영어도 스페인어도 중국어도 뭐 하나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데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혼자서 그 상황을 감당하는 게 더 버거웠던 것 같다. 그리고 겨우 집에 도착해서는 자꾸 위의 안 좋은 기억들만 떠올랐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여행 전반을 돌이켜보며 생각해 보다 보니 좋았던 일들도 하나씩 떠올랐다. 날씨는 여행 내내 한 번도 비가 안 오고 맑았고, 여행 초반에 목감기가 좀 있긴 했지만 그 외에 크게 아프거나 다친 적 없고, 렌터카를 빌렸는데 사고가 난 적도 없고,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소매치기당한 적 없고, 크게 바가지 씌움 당하거나 사기당한 적도 없고, 항공기가 지연되거나 연착된 적도 없고, 미리 예약해 두었던 비행기나 기차를 놓친 적도 없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운이 좋았던 적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다만, 그걸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었을 뿐이었다.


사실 운이 정말 나쁘면 여행 내내 비가 왔을 수도 있고, 감기가 심하게 왔을 수도, 소매치기당해서 핸드폰이나 여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랬다면 여행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었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일인데 이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 이렇게 무탈하게 여행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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