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부는 주말이 아니고서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평일 저녁이면 이미 식탁은 정리되어 있었고, 이모부의 자리는 늘 반쯤 비워진 컵과 신문 한 장만 남긴 채 조용히 비어 있었다. 그래서 유정은 이 커다란 집을 이모와 단둘이 점유한 듯한, 묘하게 부유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소리는 적었고, 발자국은 멀었고, 집은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이모의 삶은, 유정이 보기엔 현실감 없이 평탄했다. 시간에 쫓기는 기색도 없었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도 없어 보였다.
오전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나는 이모는, 침대에서 한 시간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이불을 정리하며 몸을 데웠다. 부엌에서는 믹서 소리가 나고, 블렌더에 갈린 과일 스무디가 유리컵에 천천히 따라졌다. 창밖 햇빛은 이미 거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바닥에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민종이 집에 있을 땐 이모도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아침상을 차렸다고 했다. 하지만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는, 이모부도 알아서 밥을 챙겨 먹고 출근한다며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그 말 속에는 약간의 해방과, 약간의 허전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이따금 이모의 얼굴에 얕은 주름을 만들던 엄마조차 이제 세상에 없었다. 언니와의 통화로 하루 기분이 오르내리던 날들도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이모의 일상은 더 매끄러워 보였다.
아들을 특목고에 보낸 학부모로서의 자부심, 동창 모임에서 나이에 비해 잘 관리된 얼굴로 받는 시선, 계절마다 바뀌는 백화점 쇼핑백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단정히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유정은, 아침을 챙겨 먹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해가 뜨면 눈이 먼저 떠졌고, 위장은 빈 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처음 며칠은 이모의 느린 시간대에 몸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부엌에서 물을 끓이려다, 괜히 냄비 소리가 집을 깨울까 조심스러워 불을 줄이곤 했다.
이모부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면 이 집에서의 자리가 조금은 또렷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다정한 말이 오가도, 그 사이에 남는 공기는 여전히 낯설었다. 식탁 위에서 마주 앉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굳었다. 결국 유정은 그 생각을 접었다.
어느 날은 속이 쓰릴 정도로 허기가 졌다. 새벽녘, 배가 안쪽에서부터 바삭하게 타들어 가는 느낌에 눈이 번쩍 떠졌다. 집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고,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낮게 웅웅 울렸다.
유정은 이불을 밀치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나갔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루를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날까 숨을 죽였다.
냉장고 앞에 섰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은 쉽게 당겨지지 않았다. 허락 없이 냉장고 문을 여는 일이, 마치 경계를 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 집의 질서에 작은 금을 내는 행위 같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손을 떼었다. 물을 한 컵 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배는 비어 있었고, 가슴은 더 비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밤을 견딘 끝에, 유정은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배고픔보다 어색함을 먼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결국 그녀는 이모가 깨어나 식탁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모가 스무디를 마시며 “유정이, 뭐 먹을래?” 하고 묻는 순간까지, 허기를 접어 두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유정의 몸도 조금씩 늦잠에 길들었다.
아침의 날카로움은 무뎌졌고, 위장은 시간을 미루는 법을 익혔다.
이모의 느릿한 생활 리듬에 서서히 올라탄 셈이었다. 그러나 그 적응은 안온함이 아니라,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는 법을 배운 것에 가까웠다.
유정은 예전처럼 아침 일곱 시 반이면 눈이 떠졌다.
알람도 없이, 몸이 먼저 시간을 기억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실 창문 틈으로 스며들던 겨울빛처럼 단정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이 집의 아침은 그보다 훨씬 느렸다. 이모가 일어나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거실은 두꺼운 커튼에 가려 반쯤 어둑했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이 일정하게 공간을 긁고 있었다.
유정은 조용히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민종의 책상이 아직도 주인의 체온을 간직한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위엔 각이 맞춰진 스탠드와, 사용 흔적이 거의 없는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자신의 검정고시 문제집을 펼쳐 놓는 순간, 유정은 이 공간을 잠시 빌려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연필을 쥐고 숫자 사이를 더듬었지만, 학교처럼 옆자리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도 없는 집 안에서 혼자 문제를 푸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시간은 흐르는데, 집중은 흐르지 않았다.
책상 옆 책장에는 <데미안>부터 <소공녀>까지, 어린 민종의 손길이 닿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검정고시 문제집 속 건조한 숫자들 사이로 시선이 몇 번이나 도망쳤다. 결국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책을 펼치면, 시간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물다 보면, 창밖에서 올라온 햇살이 어느새 책장 끝을 넘어 책등을 타고 내려왔다. 인물들의 고백과 독백이 민종의 방을 채우는 동안, 유정의 현실은 잠시 밀려났다.
“유정아, 밥 먹자.”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유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미 해는 머리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읽다 만 책을 서둘러 꽂고, 펼쳐 두었던 문제집을 다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은 뒤 방을 나섰다.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두려는 듯, 연필도 곧게 세워 두었다.
씻고 나온 이모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
밀키트 닭갈비가 기름을 머금고 지글거렸고, 햇살 가득한 거실 한복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기름 냄새와 양념 향이 집 안을 둥글게 감쌌다.
“유정아, 잘 잤어?”
닭갈비를 접시에 옮기는 이모의 팔목에서 얇은 금팔찌가 빛을 받았다. 움직일 때마다, 노을이 비친 바닷물처럼 잔잔하게 일렁였다.
“네, 이모.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 준비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문제집 풀다 보니 그만 신경을 못 썼네요. 다 먹고 설거지라도 제가 할게요.”
식사 시각은 점심에 가까웠지만, 유정은 ‘아침’이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이모가 아침을 거를 만큼 게으른 사람으로 보이는 걸 싫어한다는 걸, 유정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둘 사이에서 늘 ‘조금 늦은 아침’으로 불렸다.
“됐네요. 우리 유정이는 공부에나 힘써. 그런 건 이모가 다 할 테니까.”
이모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 안에는 은근한 선이 있었다. 집안일은 집주인의 영역이라는 듯, 부드럽게 경계를 긋는 선.
식탁에 마주 앉아 닭갈비를 먹는 동안, 수저가 도자기 그릇에 닿는 청명한 소리만이 집 안을 맴돌았다.
말은 길지 않았다.
씹는 소리와 고개 끄덕임이 대화를 대신했다.
식사가 끝나고, 이모가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하자, 유정이 서둘러 일어났다.
“이모, 설거지만이라도 제가 하게 해주세요. 설거지하면서 생각 정리되는 게 좋아서 그래요.”
사실은, 물소리라도 내야 숨이 트일 것 같아서였다.
수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있으면, 잠시 이 집의 공기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모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엔 늘 같은 말로 물러섰다.
“알았어.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야. 나는 내 조카 고생시키는 거 정말 싫어.”
고생시키는 게 싫다는 말은, 이 집에서 유정의 자리를 설명해주는 문장이기도 했다.
보호받는 사람. 도움을 받는 사람. 빚을 지고 있는 사람.
설거지를 마친 유정이 이를 닦고 거실로 나오면, 이모는 이미 머리 손질을 마치고 화장까지 끝낸 채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수건 대신 드라이기로 말린 머리는 부드럽게 어깨를 타고 내려왔고, 립스틱은 아침 햇살 아래 또렷하게 빛났다.
퍼팅 매트 위에는 골프채가 한쪽으로 기대어 있었다.
“유정아, 뭐 해? 얼른 옷 입어. 나갈 준비 해야지.”
이모의 말은 늘 자연스러웠다.
마치 유정의 하루가 이미 자신과 함께 짜여 있다는 듯, 질문이 아니라 통보처럼 흘러나왔다.
유정은 잠시 멈춰 서서 이 집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언제나 이모의 시간표 위에 조심스럽게 덧붙여지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모는 유정과 엄마가 일부러 발걸음을 돌리곤 했던, 영문 이름이 번쩍이는 그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치 매일 출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유정은 입구에 서 있는 반듯한 정장의 직원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늘어졌다.
명품관 특유의 정숙한 공기, 바닥에 반사되는 매끈한 조명, 진열대 위에 박제된 듯 놓인 가방들. 발소리조차 낮춰야 할 것 같은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의 신발 굽이 괜히 더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들어서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지나치게 거칠고 값싼 질감으로 드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모는 달랐다.
이곳이 집 거실이라도 되는 양, 브랜드 매장을 천천히 돌며 점원들의 과한 친절을 태연히 받아냈다.
“신상이에요.” “고객님 피부 톤에 딱이에요.”
쏟아지는 문장들을 고개 한 번 끄덕이며 흘려보내고, 끝내는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우아하게 나왔다. 점원에게 좋지 않게 보일 ‘빈손’조차 이모의 스타일처럼 보였다. 여유를 소비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이어 여성 의류 매장으로 향한 이모는 유정의 취향을 묻지도 않은 채 옷을 집어 들었다.
딸 없는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사람처럼, 밝은 색 치마와 몸에 붙는 니트를 연달아 안겼다.
“유정아, 네 마음에 드는 것도 골라봐.”
유정이 조심스레 고개를 저으면, 이모는 기다렸다는 듯 다른 매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옷을 고르고, 피팅룸에 들어가 입어보고, 다시 벗고, 또 다른 옷을 입는 일.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유정은 점점 낯선 얼굴을 보았다.
치마 자락이 무릎을 드러낼 때마다, 어깨선이 드러나는 블라우스를 입을 때마다, 거울 속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군말은 하지 않았다. 먹이고, 재워주고, 챙겨주는 사람 앞에서 피로를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모의 세계에 얹혀 사는 이상, 작은 연극 하나쯤은 감수해야 했다.
결국 반쯤 떠밀려 사게 된 옷 서너 벌.
유정은 그것으로 오늘의 의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그 다음이었다.
외출할 때마다 유정이 집에서 가져온 낡은 후드나 청바지를 입고 나오면, 이모는 얼굴에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유정아, 왜 이모가 사준 치마 안 입니? 유정이는 다리가 곧고 예뻐서 치마가 참 잘 어울렸는데… 마음에 안 들었어?”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책망이 섞여 있었다. 유정은 결국 교복으로도 입지 않던 치마를 꺼내 입고, 다시 의미 없는 쇼핑길에 올랐다.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하며.
백화점을 나서고 아파트 단지에 다다르면, 이모는 방향을 틀어 상가의 네일숍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면 달콤한 아세톤 냄새와 형광빛 조명이 번쩍였다. 이모는 마치 아이가 창문에 붙인 스티커를 떼고 다시 붙이듯, 새 손톱이 자라기도 전에 디자인을 바꿨다.
붉은색, 펄이 섞인 누드 톤, 손톱 끝에 작은 스톤이 박힌 화려한 무늬.
유정과 나란히 앉아 팔을 내밀고 있으면, 몸은 의자에 고정된 채 손끝만 낯선 세계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팔을 빼낼 수는 없었다.
침묵하던 유정의 얼굴을 살피던 네일아티스트가 말을 꺼냈다.
“학생은 좋겠다. 예쁜 엄마가 이런 것도 다 시켜주고.”
말끝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이모가 듣길 바라는 아부가 촘촘히 묻어 있었다.
이모는 색을 입히기 시작한 손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소를 머금었다.
“딸 같은 조카예요.”
곁에서 기다리던 손님이 유정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조카분이구나. 복도 많지. 세상에 저런 이모가 어딨어.”
유정은 웃어야 할지 몰라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손톱을 바꾸지 않는 날이면, 이모는 유정을 데리고 피부과로 향했다.
차가운 유리문을 지나 로비에 들어서면 클래식 음악이 낮게 흘렀고, 공기에는 알코올 소독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얀 벽과 대리석 바닥, 정돈된 소파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깨끗해, 사람이 아니라 표본이 드나드는 공간 같았다. 이모가 시술실 안으로 들어가면, 유정은 로비 소파에 앉아 흥미도 없는 여성 잡지를 뒤적였다.
간혹 문이 열릴 때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짧은 신음이 섞여 나왔다.
어떤 날엔 이모의 얼굴에 바늘 자국이 점처럼 박혀 있었고, 어떤 날엔 멍이 시퍼렇게 올라 싸움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럴 때마다 유정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름이 지나면, 이모의 피부는 다시 유리처럼 매끈해졌다. 어제의 멍과 자국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고통을 한 번 지우고 다시 칠한 얼굴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시간 아깝잖아. 요즘은 학생들도 시술 받는다더라. 미리미리 관리해야 돼.”
이모가 웃으며 말하면,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얼굴 가득 바늘 자국을 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 세계 안으로 한 발 더 들어가는 일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정에게 이모의 세계는, 반짝이지만 차가운 유리 상자 같았다.
그 안에 들어가면 보호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숨은 조금씩 옅어질 것만 같았다.
이모 집에서의 유정의 일상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겉으로는 평온했고, 겉으로는 배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유정의 시간은 자꾸만 흩어졌다.
“검정고시 공부는 잘되어 가느냐.”
그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식탁에서, 소파에서, 차 안에서, 심지어 네일을 말리는 동안에도. 말의 겉면은 다정했지만, 어딘가 점검표에 체크하듯 건조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네, 조금씩 하고 있어요.”
유정은 늘 그렇게 답했다.
그러나 정작 공부할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이모는 어딜 가든 유정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백화점, 카페, 피부과, 골프 연습장, 동창 모임에 들르는 길까지.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 말은 걱정처럼 들렸지만, 실은 유정을 집 안에 단단히 묶어 두는 끈과도 같았다.
유정은 그 곁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이모가 차려준 밥, 건네준 옷, 품에 안아주던 온기를 떠올리면, “오늘은 공부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자꾸만 되돌아왔다. 거절은 곧 배은망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문제집은 늘 책상 위에 펼쳐진 채로, 햇빛만 맞으며 하루를 버텼다.
공부는 내일로 미뤄졌다.
오늘은 쇼핑이 있으니까,
오늘은 피부과 예약이 있으니까,
오늘은 이모가 외롭다니까.
그리고 그 ‘내일’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정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책상에 앉아 연필을 쥐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문제는 그대로인데, 자신만 자꾸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사라진 뒤 멈춰버린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이 겹쳐 흐르고 있었다.
겉으론 잘 굴러가지만, 속은 서서히 마모되는 톱니처럼.
유정은 알았다.
이대로라면, 검정고시도, 대학도, 그 이후의 삶도 전부 ‘곧’이라는 말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럼에도 다음 날이 오면 또다시 이모의 곁에 서 있었다.
웃는 얼굴로, 준비된 조카의 표정을 하고.
그렇게 유정의 하루는 늘 시작되었고, 늘 미뤄진 채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