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모의고사를 치른 민종이 주말에 이모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괜히 심장이 한 번 덜컥 내려앉았다.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는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공부에 치여서인지 좀처럼 집에 오지 않던 민종이었다. 이모는 “공부하느라 바쁜가 봐. 요즘엔 연락도 잘 안 돼.” 하고 섭섭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이번엔 웬일로 먼저 집에 가겠다고 했다고 했다.
유정은 그 이유가 단순히 집이나 부모님이 그리워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민종도 어쩌면 집에 들어와 있는 동갑 사촌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 집에 새로 들어온 타인의 숨결을, 그 역시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민종은 엄마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유정이 알고 있는 민종의 모습은 대부분 할머니의 입을 통해 건너온 그림자뿐이었다.
할머니는 피를 나눈 자매가 등을 돌린 채 살아가는 걸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유정을 볼 때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촌 이야기를 일부러 꺼냈다.
“유정아, 너 이모 아들 알지? 민종이. 너랑 동갑인데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수재라니까. 네 외삼촌을 쏙 빼닮아서 공부를 그렇게나 잘한단다. 장차 우리 집안에 큰 인물이 될 거야. 너도 만나서 좀 친해지고, 같이 어울려 놀면 좋으련만, 엄마가 이모를 너무 미워해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유정은 속으로 되물었다.
그 아이도, 이렇게 지겹게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할머니는 나를 두고 뭐라고 말했을까.
‘아빠 없는 불쌍한 애.’ 아니면, 이제는 ‘엄마 아빠 둘 다 없는 고아’라고 했을까.
기억은 없지만, 할머니 말로는 아주 어릴 적, 엄마와 이모가 아직 등을 돌리기 전, 유정과 민종이 몇 번 함께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놀이터가 딸린 식당 마당에서 손을 맞잡고 뛰어다니며 깔깔 웃었다고. 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할머니의 눈가에는 오래된 필름처럼 희미한 빛이 어렸다.
“그땐 너희 엄마랑 이모도 우애가 참 좋았지…”
그 문장은 늘 과거형으로만 존재했다.
유정은 그 말들 위에 민종의 얼굴을 덧칠해왔다.
창백한 피부, 단정한 눈매, 말수는 적지만 어딘가 따뜻한 기색이 감도는 아이. 공부만 하느라 삐쩍 말랐다는 말까지 붙어, 머릿속 민종은 늘 조용하고 얌전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이모부의 낮은 기침 소리와 함께 들어선 민종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키가 훤칠하게 자라 천장 조명이 어깨에 걸릴 듯했고, 체구는 오히려 이모부보다 다부져 보였다. 두툼한 패딩을 벗으며 드러난 팔뚝에는 공부만 한 소년의 가느다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빛을 반사하지 않는 눈동자. 할머니의 찬사 속 따스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안녕?”
유정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얇게 갈라졌다.
민종은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스치듯 돌렸다. 인사인지 아닌지 모를, 성의 없는 끄덕임 한 번. 그걸로 끝이었다. 현관 앞에 서 있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모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종아, 사촌 왔는데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그러나 민종은 아무 대답 없이 운동화를 벗고 거실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향했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마치 이 집에 사촌이 들어와 있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옆에 서 있던 이모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구겨진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유정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몸이 단단히 굳어버렸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혹시 내가, 민종에게 실망스러운 사촌인 걸까. 할머니가 말해온 ‘불쌍한 아이’의 형상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민종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해온 걸까.
내가 만들어낸 민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거실 한가운데 서서, 유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집에는 이미 완성된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자신은 그 안에 덧붙여진 조각일 뿐이며, 그 조각이 맞물릴지 부서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민종은 침실 문을 닫은 채 하루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안에서 자는 건지, 책을 읽는 건지,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이 끊긴 듯 고요했다.
자연스레 공부방에 혼자 남겨진 유정은 검정고시 문제집을 펼쳤다.
형광펜 자국이 겹겹이 남은 페이지 위로 시선은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아침에서야 민종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은 탓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침실 붙박이장 안의 속옷이 자꾸 떠올랐다. 얇은 천들이 가지런히 접혀 있는 모습이, 괜히 들킨 비밀처럼 마음을 긁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꺼내올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할까. 혹시 이미 봐버린 건 아닐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문제집 위의 영어 문장은 점점 의미를 잃고, 활자들이 흐릿한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때였다.
“민종아, 유정아, 부엌에 와서 과일 먹어라.”
거실 쪽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유정은 연필로 읽던 부분에 조심스레 선을 긋고 책을 덮었다. 손끝에 묻은 흑연 가루가 괜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느껴졌다. 부엌으로 나가니, 이모부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사과와 배, 샤인머스캣이 보기 좋게 담긴 접시에서 과일을 집어 먹고 있었다. 투명한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과육이 햇빛을 받아 유리처럼 빛났다. 싱크대 앞에서는 이모가 과일을 마저 썰고 있었다. 칼날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박또박 울렸다.
“이모는 안 드세요?”
유정은 의자에 앉기 전, 잠시 멈춰 물었다.
“응, 괜찮아. 껍질 깎으면서 이미 많이 먹었어.”
그 말은 늘 비슷한 어조였다. 먹는 사람과 차려주는 사람의 자리를 분명히 나누는 말.
유정은 조심스레 포크를 들어 머스캣을 입에 넣었다.
얇은 껍질이 터지며 단물이 번졌다. 혀끝이 달아질수록, 침실 문 뒤에 갇힌 민종의 기척이 더 선명해졌다. 닫힌 문이 식탁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듯했다.
“민종아, 나와서 과일 먹어라.”
이모의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러 두 번 울렸다. 그러나 안쪽 침실의 문은 미동도 없었다. 손잡이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이모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향해 한 번 더 불렀다. 그럼에도 방문은 유정이 나올 때 닫고 온 그대로, 무겁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정은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제가 방에 가서 민종이 데리고 올까요?”
그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이모부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괜찮아. 민종이가 문자 보냈어. 방으로 가져다 달라네.”
“어, 알았어.”
이모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접시에 과일을 덜어 담았다. 포크를 꽂는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마치 늘 있던 일이라는 듯. 유정은 고작 몇 걸음 거리인 집 안에서, 가족에게 과일을 가져다 달라고 문자를 보내는 민종과, 그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따르는 이모와 이모부의 풍경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식탁과 침실 사이의 짧은 복도가, 갑자기 멀고 길게 느껴졌다.
이모는 접시를 들고 민종의 방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에는 묘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정은 엄마가 이모를 두고 쑥덕이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땐 괜히 질투 섞인 험담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 속에 깔린 결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민종이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낯선 자신 때문에 불편해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자신이 이 집의 리듬을 흐트러뜨린 건 아닐까.
달콤한 과일 맛이 입안에 남아 있었지만, 유정의 속은 묘하게 쓰렸다.
이 집에서의 자리는, 여전히 임시 좌석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