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유정은 조금씩 세상에서 멀어졌다.
바깥바람 한 줄기 들이지 않은 채 방 안에 웅크려 있었고, 식사마저 자주 건너뛰었다. 집 안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줄어들었고, 마치 자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숨만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잠조차 유정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간이침대에 누우면 낮 동안에도 흐릿하게 번지던 기억들이 다시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침실은 이제야 선명하게 인식된 민종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가 남기고 간 냄새와 체온, 이미 사라졌어야 할 잔해 같은 감각들이 벽지와 커튼 사이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졌다.
결국 유정은 침실을 포기했다.
대신 그녀가 선택한 곳은 공부방 바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자신이 처음 무너졌던 장소이자, 동시에 이 집에서 유일하게 숨을 붙일 수 있는 피난처였다. 날씨가 조금 풀린 4월이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정은 차가운 마룻바닥 위에 얇은 이불 한 장을 깔았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딱딱한 바닥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침실처럼 기억을 들춰내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유정은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과 함께,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냈다.
어느 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방문을 연 이모는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침실도, 간이침대도 아닌 방바닥 위에 얇은 이불 하나를 덮고 누워 있는 유정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뺨에는 마르다 만 눈물 자국이 얽혀 있었고, 입술은 메마르게 굳어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건네면 대답은 하겠지만, 그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도 상당한 힘이 필요할 것처럼 보였다.
이모는 한 발짝 다가가려다 멈췄다.
그리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이후로도 이모는 유정을 그냥 두지 못했다.
유정이 모두가 잠들었으리라 생각하는 새벽녘, 목이 말라 거실로 나올 때면 이모는 늘 깨어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말을 건넸다.
“유정아, 무슨 일 있니? 힘들면 이모한테 말해줘.”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이모도, 이모부도… 민종이도. 우린 다 네 가족이잖아. 언제든 도와줄게.”
그럴 때마다 유정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기보다는 축축하고 구겨져 있었다. 마치 덜 마른 빨래처럼 어딘가 힘없이 처져 있는 미소였다.
이모의 말은 진심이었다.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정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모든 걸 알게 된다면. 그래도 이모는 지금처럼 말할 수 있을까.
‘우린 다 네 편이야.’
그 말을 같은 목소리로, 같은 얼굴로 계속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은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흘러갔다.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정신은 쉼 없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과거라는 단단한 괴물과, ‘버틴다고 나아질까’라는 형체 없는 불확실함이 조금씩 유정을 조여 왔다.
그 사이에서 현재의 유정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방바닥에 눌린 채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마주쳐야 하는 두 사람도 있었다. 민종의 얼굴을 닮은 이모와 이모부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민종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집 안을 지나갈 때마다 유정의 안쪽 어딘가에서 까맣고 날카로운 것이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어느 날, 유정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니 창밖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햇살 한 조각 보이지 않는 풍경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위안처럼 느껴졌다.
낮은 너무 밝았다.
너무 선명했고, 너무 많은 것을 드러냈다.
하지만 밤은 달랐다.
밤이 되면 세상은 조금 흐릿해졌고, 그 흐릿함 속에서 유정은 잠시 숨을 숨길 수 있었다.
그때 문밖 부엌에서 식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저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와 늦은 저녁 식탁의 기척,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섞여 흘러왔다.
“처형이 죽고 나서도 애가 신기할 정도로 괜찮았잖아.”
이모부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게. 그 어린 애가 슬퍼하기는커녕 나랑 쇼핑도 다니고 그랬으니까… 솔직히 좀 이상하긴 했어.”
이모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정은 숨을 멈췄다.
벽 너머에서 이어지던 대화는 어느새 유정의 상처를 가늠하고 분석하는 이야기로 변해 있었다. 그들에게 유정의 침묵은 이해되지 않는 변화였고, 그래서 그들은 그 변화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잠시 후 이모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잠깐 괜찮아 보였던 건 그냥 처형 잃고 너무 멍해서 그런 거야.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나중에 사고 후유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지금에서야 뒤늦게 충격이 온 거지.”
그의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낸 사람처럼 차분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벽을 통과해 그대로 유정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정의 가슴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작은 것이 조용히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