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

by 김승예

유정이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모부도, 이모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빈 거실에 늦게 들어오는 유정을 배려한 듯 불이 은은히 켜져 있었다.

유정은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며 공부방으로 향했다. 씻고 싶었지만, 자칫 화장실을 사용하다 옆방의 민종을 깨울까 망설여졌다. 망설임 끝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유정은, 침실에서 민종이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안심하고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유정은 공부방 한쪽, 책상과 책꽂이 사이에 접혀있던 간이침대를 꺼냈다. 민종이 공부를 하다가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이도록 마련해둔 침대였다.

‘누가 보면 침실까지 몇 백 미터쯤 되는 줄 알겠네.’

유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 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간이침대는 몸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했고, 유정은 한참을 뒤척인 끝에 겨우 잠이 들었다.


이제 막 깊은 잠에 들려던 유정은, 민종이 자는 침실 쪽 복도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

‘이 늦은 시간에... 화장실은 바로 앞인데 왜 거실로 가지? 부엌에서 뭐라도 먹으려나?’

몽롱한 잠결에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유정은 금세 다시 잠 속으로 가라 앉았다.

옅은 잠을 지나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무렵, 침대의 철제 다리가 삐걱, 짧은 신음처럼 울렸다. 유정은 잠이 달아나며 등 뒤로 스며드는 서늘한 인기척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팔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입은 굳게 닫혀 공기만 텅 빈 가슴 속을 맴돌았다.


그 사이, 낯선 자는 이불 속으로 스며들어 유정의 몸과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손은 넓지만, 힘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늘고 예민했다. 천천히 그리고 낯설게 유정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유정은 놀라 숨을 삼키듯 들이켰다. 억눌린 숨이 목울대에서 걸렸다. 그러자, 이불 안의 남자가 유정의 귓가로 입을 가져왔다.

쉿-.

귓가로 떨어진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다.

거칠게 섞인 숨결 사이로 숯불에 구운 소고기의 냄새가 스쳤다. 입김은 뜨거웠고, 공기 속엔 식지 않은 저녁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는 마치 유정을 다독이려는 듯 손을 멈추지 않았고, 감정 없는 손가락은 유정의 눈물을 닦아냈다.

온기라기보다는 침묵의 강요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유정은 점점 더 안쪽으로 침잠해 갔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빠져나갈 곳은 없었고, 시야는 눈물로 번져, 모든 윤곽이 흐려졌다. 살갗 위를 스치는 손길은 이제 고통보다 무감각에 가까웠고, 머릿속엔 마치 빗물에 젖은 종이처럼 의식이 망가져 흘러내렸다.


말라붙은 근육을 찢을 듯 몸 내부를 침범했다가, 물러났다가를 반복하는 움직임은 거치고 일방적이었다.

한 번, 두 번.

침묵 위에 얹힌 그 행위는 유정의 숨통을 천천히 조여왔다.

몸속 깊은 어딘가에서 밀려 올라온 절규는. 목을 지나기도 전에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입을 열었지만 터져 나온 건 저항이 아닌, 떨리는 호흡 사이로 새어 나온 미약한 탄성이었다.

유정은 그 소리가 더없이 부끄러웠다.

그 조각난 소리를 들은 그는, 마치 이 모든 게 유정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다 사정을 끝낸 손이 내려왔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너도 싫지만은 않았잖아.”

조소 어린 말 한 줄기만이 유정의 귀에 박혔다.


유정은 등을 돌려서,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떠난 뒤에도 방 안에는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시야는 여전히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종아, 유정아. 아침 먹어라!”

익숙한 어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인 흔적이 거실을 채웠다. 민종이 오늘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이라, 이모는 서둘러 아침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 순간, 방문 너머로 딸깍 소리가 들렸다.

민종이 침실 문을 여는 소리였다. 유정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한 얼굴엔 그늘이 깊이 드리웠고, 움푹 팬 눈가엔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유정은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침실과 이어진 공부방의 문이 살짝 열렸다.

짧은 숨소리 하나 내뱉을 틈도 없이, 맨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방 안을 스쳐 지나갔다. 두세 걸음 발자국은 유정 곁을 스치듯 지나 거실로 향했고,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밤새 이불 속에서 입을 물어뜯은 탓에 유정의 입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헐어버린 뺨 안쪽에서, 피 맛이 시큰하게 번졌다. 삼킨 고통은 쓴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정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모는 의자에서 일어나 공부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민종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엄마의 어깨를 잡았다.

“그냥 좀 더 자게 둬. 어제 산책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어. 아직 피곤할 거야.”

그 말에 이모는 발걸음을 멈췄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 민종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기 아들이, 그 무뚝뚝하던 아이가 남을 배려하다니. 그 뜻밖의 다정함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그래, 그건 우리 아들 말이 맞지. 엄마가 괜히 성급했네.”

코끝이 시큰해진 이모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모부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생각했다.

‘자식 키운 보람이 이런 데 있는 거구나.’

민종이 특목고에 수석으로 입학하던 날,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느꼈던 자긍심이 떠올랐다.

그날의 기쁨이, 지금은 더 다정하고 사려 깊은 모습으로 다시 다가온 듯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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