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을 끝없는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그날의 기억 그 자체가 아니었다.
진짜 두려움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그날의 흔적이었다.
이미 지나갔다고 믿고 싶은 그 밤이, 몸속 어딘가에 남겨진 채 조용히 시간을 타고 자라나고 있다면 어떡할까.
언젠가 그것이 형태를 갖추어 다시 나타난다면, 그 고통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유정은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
생각은 늘 그날로 돌아갔고, 정신은 그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니, 생리 예정일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날짜를 떠올렸을 때에도 유정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트레스 때문일 거야.
요즘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잠도 거의 못 잤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하루, 이틀 더 지나자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한 불안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의심이었다. 무시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점점 또렷해졌다.
혹시…
혹시 그날의 씨앗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워버리려 할수록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만약 그렇다면.
그날은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이 조여 왔다. 정신은 흐릿해지고, 몸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예민해졌다. 예전에는 번거롭고 성가시기만 하던 생리가 이제는 무엇보다 간절히 기다려지는 구원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 유정은 다시 그 방에 있었다.
꿈속이었지만, 방은 현실처럼 선명했다. 어둠에 잠긴 공간, 닫힌 공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의 기운까지도 그대로였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유정의 몸은 굳어 있었다. 움직이려고 해도 팔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채 눈만 뜨고 있는 동안 남자의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유정을 관통했다.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놀라 뒤돌아본 유정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남자의 아랫배에는 성기 대신,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은 생명이 매달려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붙어 있었고, 입은 열리지 않아 울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살덩이가 남자의 몸에 들러붙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유정이 비명을 지르자 그 아이의 몸도 함께 움찔 흔들렸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아이의 배꼽이었다.
작게 파인 배꼽에서 가느다란 울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공기를 타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곧장 뼛속을 두드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스며들었다. 쿡쿡, 신경을 찌르는 소리였다.
유정은 숨이 막힌 채 눈을 떴다.
이불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심장은 갈비뼈를 깨뜨릴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슴이 들썩거렸고,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는 날이 만들어 낸 무의식의 비명이었고, 아직 오지 않은 결과가 그림자처럼 먼저 나타난 전조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처음에는 아침이 올 때까지 버텨 보려고 했다. 하지만 몸속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초조함은 점점 더 커졌다. 그대로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결국 유정은 조용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스무 층이 넘는 아파트 단지는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었다. 몇몇 창문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어둠에 겨우 저항하고 있었다. 단지 안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대신 길가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고양이는 잠깐 고개를 들어 유정을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는 별이 유난히 가까이 떠 있었고, 새벽 공기는 뺨을 스칠 때마다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유정은 폐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아파트 정문을 지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경비실 안에서는 경비원이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유정이 지나가는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편의점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렸다.
카운터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들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였다.
“어서 오세요.”
밤의 정적 속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손님이 귀찮다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유정은 매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작은 용기를 끌어모아 말을 꺼냈다.
“저기… 혹시 임신 테스트기 있어요?”
말을 꺼낸 뒤 입안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알바생은 잠시 유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딘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임테기요? 아… 예전에는 있었는데요. 지금은 안 팔아요.”
잠옷에 가까운 옷차림, 핏기 없는 얼굴, 아직 학생 티가 남아 있는 유정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알바생의 눈빛에는 당황과 걱정이 동시에 스쳤다.
“아… 네. 감사합니다.”
유정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그 뒤로도 주변 편의점을 몇 군데 더 들렀다. 어떤 곳은 문이 닫혀 있었고, 어떤 곳은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얇은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간다 해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것을 유정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유정은 옆 동네까지 걸어갔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진 골목에는 길게 구부러진 그림자들이 함께 늘어져 있었다.
다섯 번째 편의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구석 진열대에서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정은 그 자리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가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정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위에 앉아 속옷을 내린 채 테스트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손에 쥔 임신 테스트기 상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고 가벼웠다.
하지만 유정에게 그것은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질문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마 나오지도 않는 소변에 조심스럽게 테스트기를 가져다 댔다.
몇 분이 흘렀다.
유정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몸은 바짝 굳어 있었고, 시선은 하얀 창 위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 창 위로 붉은 선 하나가 떠올랐다.
잠시 뒤, 또 하나의 선이 나타났다.
두 줄의 붉은 선이 마치 바닷물 위로 번지는 적조처럼 천천히 퍼졌다.
유정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흐릿해졌고, 사물이 기울어졌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 쓰레기통에 버린 포장지를 다시 꺼냈다.
손이 떨리는 채 작은 글씨를 확인했다.
두 줄 = 임신.
두 글자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울 만큼 시야가 흔들렸다.
화장실은 좁았고, 새벽은 길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은 그대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모체가 거부하고 있음에도, 생명은 자라고 있었다.
영양실조에 가까운 몸 상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정의 몸속에서 생명은 조용하고도 뻔뻔하게 자신의 몫을 챙기고 있었다. 이미 메말라 가는 몸은 점점 더 꺼져 가는데, 오직 배만이 타인의 의지처럼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점점 더 낯선 형태로 변해 가는 그 배를 유정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샤워를 할 때면 늘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닦았다. 거울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가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의 배를 보게 되는 날이면 숨이 막히는 것처럼 역겨움이 올라왔다.
그럴 때면 감정을 견디지 못한 채 유정은 주먹으로 아랫배를 몇 번이고 내리쳤다.
그러다 문득 통증이 밀려오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샤워기 물 아래로 주저앉은 채, 유정은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울음을 오래도록 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과 다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옷을 들추면 배 위에는 멍이 퍼져 있었다. 고통이 남긴 푸른 자국들이 마치 꽃처럼 피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배는 무거웠다. 돌을 삼킨 것처럼 뻐근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아쉬웠다.
유정은 차라리 누군가가 대신 이 배를 세게 걷어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쩌면 이 불청객이 겁을 먹고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그런,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붙잡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