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로

by 김승예

나른한 오후였다. 햇빛은 거실 창을 느리게 넘어 들어와 소파 끝에 엎질러져 있었고, 집 안에는 한가한 적막이 흘렀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 마스크팩을 붙이고 있던 이모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거실 한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이모…”

작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그림자처럼 지내던 유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모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가움이 먼저 스쳤다.

“어, 그래 유정아.”

이모는 급히 마스크팩을 떼어 탁자 위에 던지듯 올려두며 몸을 일으켰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

평소처럼 다정하게 물었지만, 유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에 가려질 만큼 작고 하얀 물건이었다.

유정은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마치 무언가를 맡기듯 조심스럽게 이모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모는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게 뭐야?”

무심히 테스트기를 뒤집어 보던 이모의 눈이 잠시 후 멈췄다.

시선이 그 위에 고정되었다.

“…임신 테스트기네?”

목소리가 갑자기 느려졌다.

“이걸 어디서… 네가 왜…”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눈가를 소매로 조용히 훔쳤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진 순간, 이모의 등줄기를 타고 불길한 예감이 스르르 올라왔다.

“설마…”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설마 네 거니?”

이모는 거의 다그치듯 물었다.

“유정아. 너 지금… 임신했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유정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모의 손이 반사적으로 유정의 배 쪽으로 뻗었다.
손바닥이 천천히 아랫배에 닿았다.

그리고 미세하게 솟아 있는 부분을 느끼는 순간.

“허억…”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모는 손을 홱 거두며 한 걸음 물러났다.

거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폭풍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누구랑…?”

이모의 목소리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랑 그런 짓을 한 거야?”

눈이 번쩍이며 유정을 쏘아보았다.

“너 여태 나랑만 외출하고, 혼자 나간 적은 없잖아!”

유정은 옷자락을 움켜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집에서…”

이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뭐라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유정, 너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모의 말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집에서? 방금… 집이라고 했어?”

유정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게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이모의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번쩍 스쳤다.

며칠 전, 기숙사에서 잠깐 집에 들렀던 아들의 얼굴.

그 짧은 기억이 지나가는 데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거실 공기의 온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모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는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유정은 움직이지 못한 채 거실에 서 있었다.

잠시 뒤, 이모가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옷가지와 물건들이 마구 쑤셔 넣어져 있었다.

이모는 거친 숨을 내쉬며 걸어왔다.

그리고 가방을 유정의 발치에 내던졌다.

“이유정.”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너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유정의 몸이 움찔했다.

이모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비도 어미도 없는 너를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감히 우리 집 귀한 아들을 더럽혀?”

유정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이모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게 네가 은혜를 갚는 방식이니?”

손가락이 유정을 향해 세게 흔들렸다.

“미쳤구나. 단단히 미쳤어.”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어떻게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잠깐 숨을 고른 뒤, 이모는 낮게 웃었다.

“내가 너는 좀 다르게 봤는데… 아니었네.”

눈빛이 완전히 식어 있었다.

“너도 결국 유부남이랑 바람 난 네 엄마랑 똑같은 년이야.”

말이 칼처럼 떨어졌다.

“더럽고 천한 년.”

그 표정은 유정이 알던 이모의 얼굴이 아니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만 조용히 떨어졌다.

이모는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 엄마 재산은 이모부 통해서 보내 줄 테니까…”

말끝이 짧게 잘렸다.

“애 지우고, 알아서 살아.”

그리고 덧붙였다.

“다신 우리 앞에 얼씬거릴 생각하지 마.”

이모의 눈이 번뜩였다.

“행여나 민종이 앞에 그딴 핑계 대고 나타났다간…”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짜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아들은 평생 그 애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게 될 거야.”

마지막으로 유정을 노려보았다.

“이해했니?”

유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모는 고개를 돌리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남은 짐은 할머니 쪽으로 부칠 거니까 알아서 찾아.”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지금 당장 꺼져.”

잠깐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

“애 아빠 오기 전에… 눈앞에서 아주 사라져 버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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