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서랍 속의 향수(鄕愁)

by 김은령



추억의 방울방울이 퐁! 퐁! 퐁 터지다



어느 , 산책을 하다 길에 끌려 우연히 낯선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건물 사이,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글방(書房)’. 순간, 오래된 기억의 종소리처럼 가슴 한켠이 울렸다. 낯설지만 아련하고, 낯설기에 오히려 더 익숙한 곳 같았다.

예전에 내가 자주 드나들던 작은 가게가 있었다. 회원증을 내밀고 만화책과 로맨스 소설을 빌리던 곳. 참새가 방앗간을 들르듯, 나는 자주 그곳의 문을 밀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서둘러 책장을 넘겼고, 예상치 못한 결말에 울기도 했으며, 사랑이 이루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설렘에 웃음이 지어졌다. 희미한 전구 불빛 아래서 넘기던 책의 한 장 한 장은 세상의 낭만을 비추던 별빛 같았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들어가 볼까, 아니면 그냥 지나칠까. 망설임은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만들었다. 발끝은 이미 몇 번이고 문을 향했다가 다시 골목길로 향하려 했다. 결국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쉬움은 골목 모퉁이에 놓인 듯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마음속의 낡은 서랍이 열리듯 오래된 기억이 흘러나왔다.

학창 시절, 나는 말보다 귀가 더 열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많았다. 특히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무턱대고 대답하기보다 진지하게 조언하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공부를 했다. 어디서? 바로 글방에서 빌려온 순정 만화와 로맨스 소설 속에서였다.

주인공들이 엇갈리고 화해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들은 내게 사랑의 언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배운 마음의 결을 담아 친구들에게 조언을 건네면, 그들은 감탄하며 고마워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한결 편해졌다고. 그 무렵 나는 어느새 친구들 사이의 ‘연애 상담자’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그 골목에 서 있다. 망설임으로 남겨진 발자국 위에 지난날의 웃음과 설렘을 포개어본다. 그 시절의 글방은 단순한 책 대여점이 아니었다. 사랑을 배우고, 상상으로 세상을 넓히고, 친구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던 나만의 배움터였다.

추억은 닫힌 서랍 속에 묻힌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낯선 골목에서 다시 열리면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시간을 만난다. 그 기억은 낡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비추는 작은 불빛이 된다.

나는 골목을 지나며 속삭였다.


“그때의 나, 그때의 웃음, 그때의 설렘. 모두 고마워”


낡은 서랍 속에서 꺼낸 향수는, 여전히 내 삶의 일부로 빛나고 있었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오래 잠들어 있다가,
불현듯 우리 앞에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 낡은 서랍 속의 향수 ° _ 김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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