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그녀들

by Rinah
03:25

압도적으로 넓은 홀

올리브색 카펫이 깔린 바닥

높은 천장에 화려하고 웅장한 샹들리에

은은하게 빛나는 연베이지색 벽

면접관들이 사용할 긴 테이블

그리고 정렬되어 있는 지원자들의 의자 수백 개


이 멋진 그랜드 볼룸 홀에 입장하자마자 든 생각은


이 시간에 제일 앞줄에 있는 저 사람들은 대체 뭐지?!?


내가 새벽 03:25에 면접장에 들어섰는데도 나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들이 열 명 남짓 있었다.


와 진짜. 이 시간에 와도 1등이 아니라고??


온 순서대로 앉는 건가 싶어서 첫 줄에 가서 몇 마디 나눠보니, 다들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전부 다 전날 밤에 기차나 버스 막차 타고 올라와서 아예 여기에서 쪽잠 잔 거라고 했다.


어째 앞줄에 짐이 한가득이고 다들 후드티랑 운동복 차림인 게 그런 이유였다니.


짐가방에서 온갖 화장품, 헤어롤, 고데기, 정장이 나오는 걸 보고 기가 막힘과 동시에, 내 상상이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구나 새삼 다시 한번 반성+감탄하며...


난 조용히 둘째 줄로 자리를 옮겼다.


첫째 줄은 뭔가 초고수들의 명예의 전당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내가 감히 첫째 줄에 같이 앉아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땐 단순히 쫄아서(....) 옮긴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첫째 줄이 아닌 둘째 줄을 택해서 앉았던 것이 내 많은 것을 바꾼 선택이 되었다.


05:40

먼저 와 있던 분들은 시간이 한두 분씩 나가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헤어 메이크업 하고 돌아왔는데, 그런 변신(?)이 패션쇼 모델들 보는 것 마냥 신기했다. 서로 이번이 몇 번째 오픈데이인지 잡담도 하고, 가볍게 면접 연습도 했다.


07:00

06:30쯤부터 홀이 웅성거리는 것 같다 싶더니, 07:00에 뒤돌아보니 이미 인산인해였다. 대기인원 줄이 홀 밖으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첫 면접땐 사람들 다 이쁘다 우와-만 연발했었는데, 이젠 사람들의 깔끔한 정장과 단정한 헤어가 무장한 모습들로 보였다. 간절함과 치열함이 '보이는' 그 분위기가 정말 신기했다.


09:00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곧 면접 시작하니 정숙해 달라는 방송이 나왔고, 곧이어 면접관 다섯 명이 홀 가운데를 가로질러서 입장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홀에 있던 모든 지원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면서 그들을 환영했다.


다들 홀이 울리도록 - 말 그대로 우레와 같은 - 박수를 치면서 환영했는데, 면접관들도 그 상황이 신기하고 재밌었던 모양이다. 환하게 웃으면서 입장하더니 그중 제일 시니어로 보이는 분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와우 와우 와우! 고마워요! 우리가 할리우드 스타가 된 것 같네요."


그런데 어쨌든 놀러 온 건 아니라 그런지, 지원자들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엄청 많이 와주셨네요. 최대한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앞줄부터 한분씩 이력서 들고 면접관 앞으로 와주세요. 바로 다음 차례인 분만 자리에서 미리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면접관이 오라고 하면 앞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워낙 많은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저희가 모든 분들에게 피드백을 드릴 순 없고, 합격한 분들에게만 오늘 중 전화가 갈 거예요. 이 점, 양해 부탁합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첫 줄에 있는 사람들 당황스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면접관들은 정말 곧바로 면접을 시작했다.


내가 첫 번째 줄이 아니라 두 번째 줄에 자리 잡은 게 이때 도움이 되었다.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면접관들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도 카타르도 왜 지원자가 면접관 앞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을 굳이 만들어 놓은 걸까 싶었는데 첫 줄 지원자들이 걸어 나가서 답변하는 동안 면접관들의 시선과 질문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확신이 들었다.


지금 면접관들이 기내 좌석에 앉아있는 손님입장에서 보는 거구나.


그럼 너무 전형적인 면접처럼 경직될 필요도, 너무 오버해서 대화 리드하려고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스몰톡 하면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자 ‘이거구나' 싶으면서 저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자세와 어떤 표정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고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09:17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면접관 한 명이 자기한테 오라고 고개를 까딱했다. (대화는 다 영어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제 이력서예요."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내 이력서에 영어 이름을 가리키며) 이게 네 영어 이름이야?"


"네, 제 전공 교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오, 특별한 이름이네."


"네, 특별하죠."


"오늘 여기 몇 시에 왔어?"


"여기 홀에 도착한 건 새벽 03:30 쯤이에요."


"완전 일찍 왔네! 지금 많이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전 이제 곧 쉴 수 있는데 당신은 제 뒤에... 몇 천명이 있네요. 오늘 당신이 더 힘들 것 같은데요."


"하하! 맞아. 나도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아."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내 이력서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행운 좀 주세요."


"하하하! 오케이! 만나서 반가웠어."


"저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09:19

면접관과의 대화는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새벽부터 준비하고 대기한 시간에 비하면 정말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2분 면접'을 마치고 호텔에서 나오면서도, 단정하게 무장한 수백 명의 지원자들이 계속해서 대기줄에 추가로 줄을 서는 것을 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어쨌든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 일단 됐다고 생각하며 귀가했다.


10:32

잠 잘 생각은 없었는데, 새벽부터 난리 친 것도 있고 2분이어도 면접은 면접이었던지라 나도 모르는 새 긴장을 했던 건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잠들었다.


15:54

핸드폰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라 허겁지겁 받았는데


스팸 전화였다.

검찰청이 어쩌구.


아......놔

지금이나 그때나

사기 치는 인간들은 잡아서 $@^#%@%해야 한다.


16:05

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번엔 또 언ㄴ이야 하고 받았는데


"Hello?"


어?

얽?!


핸드폰 너머로 오늘 아침에 들었던 외국인 여성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재차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오픈데이 와줘서 고마워. 널 다음 면접단계로 초대하려고 전화했어.”


오오오


두 번째 전화는 놈이 아니라 님이었다.


됐다.... 됐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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