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님과의 새벽 대담

by Rinah

당시 카타르 항공 서울 오픈데이 장소는 홍은동 힐튼호텔이었다. (지금은 스위스 그랜드 호텔로 바뀌어 있다.)


부산 오픈데이 마치고 돌아오면서 생각한 대로, 일찍 가기로 결심했다.


아예 전날 그 호텔에서 숙박을 하는 게 제일 간단했겠지만, 전신사진 비용도 덜덜 거렸고 부산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다녀온 거였는데, 호텔 숙박을 편히 지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서 일찍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무조건. 완전 일찍.


어느 정도로 일찍이냐면, 대중교통 첫 차 운행시작할 때 난 거기 호텔 홀에 앉아있을 작정이었다.


당시 내가 기억하기로 전철은 첫 차 운행시간이 오전 05:30, 시내버스는 첫 차 운행시간이 오전 04:00였다.


그리고 검색했을 때, 당시 살던 집에서 홍은동 힐튼호텔까지는 차로 약 50분 정도 소요되는 걸로 나왔다.


그래서 차로 한 시간에, 내가 가서 헤맬 수도 있으니까 버퍼로 30분 해서, 총 한 시간 반을 생각하고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난 운전면허를 20대 후반에 따서, 갓 대학 졸업한 이 무렵엔 운전 개념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검색했을 때 나온 자동차 소요시간 50분이 낮시간 기준이란 것도 나중에 알았다.(....)


어쨌든 새벽 02:30-02:45 사이에 집에서 출발해서 새벽 04:00전까지 면접장에 도착할 계획을 세웠다.


시간 역산해서 집에서 출발할 시간, 집에서 일어날 시간, 그전날 잠자리에 들 시간을 적는데, 스스로도 미쳤나 싶었다.


이게 지금 면접 보러 가겠다는 시간 맞냐.


그런데 어쩌겠나. 부산에서의 기억이 그 모양인데.


똑같은 실수 안 하기로 했으니까

딱 한번, 이 날 하루만 미쳤다고 치고

아주 제대로 일찍 가보자고.


택시비도 거금으로 느껴졌지만, 대중교통 없는 시간이기도 하고, 호텔 1박 비용보다 저렴하고, 발 아프지 않게 멀쩡하게 가는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이 날 택시비만큼은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픈데이 당일.


계획한 대로 전날 초저녁부터 잠들어서 새벽 02:00에 일어난 다음, 어찌어찌 그나마 쪼금 할 수 있게 된 메이크업과 헤어를 마치고, 새벽 02:45에 집을 나섰다.


들고 나선 가방에는 제출할 이력서 한 장, 내가 질문답변 메모한 연습용 이력서 한 장, 구두 한 켤레, 그리고 대일밴드 여분 아주 아주 넉넉하게.


집에서 출발할 땐 정장에 메이크업 헤어 다 하고 운동화 신고 나왔다. 갈 때는 면접 아니니까 일단 살고 보자.


아직 카카오 택시가 없던 시절이라 길가에서 손 휘적휘적해서 지나가던 택시 잡아탄 게 새벽 03:00.


택시 타고 홍은동 힐튼호텔로 가달라고 하니 기사님이 말하셨다.


"아유, 출근 시간이 이렇게 빨라서 힘들겠어요."


? 아.


그 시간에 정장 갖춰 입고 단정한 머리 하고서 호텔 가달라고 하니 내가 당연히 호텔로 출근하는 직원일 거라고 생각하신 거였다.


"출근이면 좋겠습니다."


"출근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럼 이 시간에 정장까지 입고 호텔을 왜 가요?"


"면접 보러 갑니다."


"지금요????"


순간 라디오 소리까지 확 줄여가며 룸미러로 눈이 마주친 기사님의 눈빛이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하는 눈초리 같았다.


"오늘 거기 홀에서 외국 항공사 승무원 면접이 있는데요. 선착순으로 들어가서 이력서 내는 거고 오전 9시부터 시작인데, 워낙 몇 천명씩 몰리고 그래서 아주 일찍 가려고 제가-..."


처음 보는 기사님께 부산에서 고생한 일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어느덧 택시는 한강을 건너고

내부순환로에 올라타 있었고


처음엔 내가 무슨 다단계 같은 거에 잘못 걸린 줄 알았다고, 얘기 들어보다 신고해야 하나 싶었다던 기사님은 내 이야기 내내 추임새를 넣으며 들어주시다가 내부순환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차선을 바꾸며 말했다.


"아가씨, 잘 될 거야. 걱정 말아요. 이 시간에 면접장 미리 갈 정도로 열심이면 안될 리가 없어."


기사님은 당신이 내 또래 자녀가 있다며,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하다고 웃으시다가 잘될 거라는 말을 여러 번 해주셨다.


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있는지까지 이야기 들은 기사님은 면접장소에 최대한 가까운 출입구에 날 데려다주셨고


"오늘 잘 될 수밖에 없어요. 파이팅!"


마지막까지 응원을 보내주셨다.


그냥 잘 될 거야도 아니고

‘오늘’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응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사님께 90도로 꾸벅 인사드리고


면접 가는 건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오픈데이 장소인 호텔에 들어섰다.


아직 해뜨기 전, 캄캄한 도심에서 기사님 택시의 헤드라이트와 내 앞의 호텔 로비만 불을 밝히고 있는 것 같은 새벽 03:21이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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