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차 공직약사 이야기
“내가 너라면 절대 공무원 안 할 텐데. 왜 약국 안 해?”
“지방에 가면 약사 페이 센 편이던데, 왜 여기서 공무원 해요?”
“요새 사명감으로 공무원 되었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요. 좋은 점이 대체 뭐죠?”
“왜 식약처 그만두면서 또 공무원을 해요? 체질인가?”
숱하게, 그리고 지겹게 들었던 질문들. 가끔은 당혹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졌으나 모르기에 어쩔 수 없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약사, ‘공직약사’에 대한 이야기. 나는 공직약사가 된 지 19년 차에 들어서서야 내가 가진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공무원은 소속 직군에 따라 국가직과 지방직 공무원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정부(국가)에 소속된 공무원을 ‘국가직’,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 소속된 공무원을 ‘지방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국가직의 사장님은 중앙정부 수장인 대통령이며 지방직의 사장님은 근무하는 지자체의 장(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된다. 공직약사 또한 본인의 선택에 따라 국가직도, 지방직도 될 수 있다.
공직약사 다수가 근무하는 곳 중 국가직은 단연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를 꼽을 수 있다. 식약처는 식품과 의약품 안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약사들은 주로 의약품 안전 관련 분야에서 약무직 또는 연구직으로 근무한다. 지방직 공직약사는 보건소나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병원에서 약무직으로 가장 많이 근무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국가직에 해당하는 식약처와 지방직에 해당하는 보건소에서 차례로 근무했고 지금도 여전히 공직약사로 근무 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약사를 가장 많이 만나는 곳이 약국일 뿐, 약사들에게도 여러 진로가 있다. 공직도 있고, 병원 내 조제실, 제약회사 연구소 등 선택지는 다양하다. 약사는 약에 대한 전문가니까 여러 분야에 진출할 수 있다. 나 또한 여러 선택지 중에 공직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니 그럴싸한 답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든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깎아내릴 수는 없으니 하고 있는 일, 공직약사에 대해 사람들의 의문점을 해소하고자 한다.
첫째,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당신은 공직약사가 되면 안 된다. 그저 ‘안정적으로’ 꼬박꼬박 정부가 파산하지 않는 이상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 호봉이 올라간다는 장점도 있는데 그 시작점이 너무 낮다. 오죽하면 약국이나 병원 근무를 몇 년 이상 하다가 공무원 임용에 도전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약국, 병원 경력을 호봉으로 인정하여 올려주는 지자체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로, 공직약사는 다른 직렬에 비해 근무자 나이대가 높은 편이다.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둘째, 칼퇴를 꿈꾼다면 당신은 공직약사가 되면 안 된다. 공무원 칼퇴는 옛말로, 비상 상황에는 집에 갈 수 없다. 근무하는 부서마다 다양한 비상 상황이 벌어지는데, 식약처에서 근무할 때는 국정감사 시즌 및 부서 관련 이슈가 터질 때였고, 보건소에서 근무할 때는 장마와 폭설 대비, 정기적인 당직 근무가 있었다. 비상 상황이 아니더라도 칼퇴를 방해하는 요소는 늘 있다. 오후 5시 58분에 찾아오는 민원인을 돌려보낼 수 없고, 갑자기 내일 잡힌 회의 자료를 마련해야 하면 야근이 시작된다. 조직 생활을 하는 보통 직장인과 같다. 다만, 야근 강요는 최근 10년간 보지 못했다. 간혹 급한 업무인데 부하직원이 그냥 튀었다며 혼자 끙끙대는 팀장님은 보았어도.
셋째,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고 좁은 조제실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면 당신은 공직약사가 되어야 한다. 공직만큼 다채로운 분야 속에 여러 배움의 기회를 주고, 공익을 추구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식약처에서 일하면서 터키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가했고 미국의 의약품 심사 교육에 참여할 기회를 누렸다. 시판 화장품에서 세균을 찾아내 팔지 못하게 했으며, 해외에서 백신 이상사례 정보가 업데이트되면 국내 의료진에 알려 주의하도록 했다. 보건소에서 일할 때는 프로포폴을 남용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의원을 불시 점검했고, 안전상비의약품을 판매하는 편의점을 찾아가 의약품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물론, 반복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기에 공직은 더 좋은 선택지인 이유는 2~3년에 한 번 부서 이동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요건이 잘 맞은 덕분에, 나는 약국을 개설하지 않는, 약사지만 공무원이다. 급여가 적지 않은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내 답은 “많이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제 월급이 적은 줄 모르겠어요.”이다. 사명감으로 공무원이 된 것은 맞으며, 약국을 하려는 약사는 이미 많으니까 나는 다른 길로 가보고 싶었다. 시작은 사명감이라도 공직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는 일이다. 함께했던 동료들이 낮은 급여와 비상 상황으로 워라밸이 무너질 때, 그 외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다 공직을 떠났다. 나 또한 장거리 출퇴근과 잦은 야근에 지쳐 정말 사랑했던 나의 첫 직장, 식약처를 15년 5개월 만에 그만뒀으니까. 그럼에도, 공직약사만큼 재미있고 보람된 일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어서 지방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공직약사가 체질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