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빠인생
아는 사람은 알지만, 롯데자이언츠 연고지인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은행은 BNK부산은행이다. 언제부턴가 부산은행에서는 해마다 '가을야구 정기 예금적금' 상품을 내놨다. 롯데자이언츠가 가을 야구에 진출하기만 하면 우대 금리를 얹어 주도록 설계돼 있었다. 매년 10개 팀 중에 5개 팀 안에만 들어도 이 상품에 가입한 사람들은 돈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번다. 가을야구 가면 부산은행이 쏜다! 이런 콘셉트다. 롯데 팬들은 팀의 가을 야구에 가면 기분이 좋고, 거기에 이 상품에서 이자까지 더 받으니 더 기분이 좋다. 그래서인지 정말 많이들 가입했다. 부산은행 측에서도 밝히길 이런 상품은 매년 빠르게 마감이 되는 인기 상품이라고 한다.
10개 팀 중에 5개 팀 안에 든다는 건 50%의 확률이다. 동전 던지기의 확률 아닌가? 그러니 확률상으로는 2년에 한 번쯤은 이 상품에서 나오는 추가 금리를 팬들이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상품이다. 설마 8년 연속으로 가을 야구를 못하게 될 줄은, 동전을 8번 던져서 모두 뒷면이 나오는 지독한 불운을 본인들이 겪을 줄은 몰랐던 거다. 사실 나도 직장인으로서 부산에 살 때는, 한 번 가입해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정말로 금방 매진되어 버려서 한 번도 가입하지 못했다. 결론은 가입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거의 없었으니 다행이랄까.
그런데 하루는 롯데자이언츠의 가을 야구가 무산된 마당에 갑자기 친구 한 명(K리그 2의 수원삼성 팬)이 채팅방에 이상한 기사를 올렸다. 롯데의 성적이 한 번도 이 부산은행의 가을야구 상품에 우대 금리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기사였다. 그래서 부산은행은 8년에 걸쳐 자이언츠가 좋은 성적을 낼 경우 지급하려고 준비해 둔 160억 7985만 원가량의 우대 금리를 가입자에게 지급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부산은행은 160억 7985만 원을 아꼈다고.
그런데 이 때문에 라니. 롯데가 야구를 못한 때문에, 롯데가 가을야구에 못 갔기 때문에, 롯데가 야구를 지지리도 못해서 가을야구도 8년 연속으로 못 갔기 때문에!!! 를 생략하고 괄호를 쳐서 그냥 때문에라는 말로 간단하게 롯데를 능욕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능욕에도 롯데 팬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마음을 고쳐먹는 수밖에 없다. 나는 혹시라도 지방에 있는 가장 큰 은행이 작은 손해라도 입을까 부산 경제를 걱정해 줘서 롯데가 일부러(?) 가을 야구를 못 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 때문에(?) 부산은행은 ‘BNK 가을야구정기예금’ 판매 수익금으로 부산 지역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후원금 3000만 원을 지원했다고 하니, 어찌 됐든 누이 좋고 매부 좋지만, 그 때문에(?) 팬들만 빼고 모두에게는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관련 언론 기사들을 보면, 부산은행은 2018~2024년 자이언츠가 프로야구 10팀 가운데 상위 5팀이 진출하는 포스트시즌에 나가면 해당 예·적금에 0.1~0.4% 포인트 금리를 얹어 준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약 5조 3000억 원에 달하는 자이언츠 예금이 몰렸지만 롯데는 2017년 이후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약속했던 우대 금리(평균 0.3%)에 해당하는 총 134억 원어치의 이자는 그대로 남게 됐단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입하고 싶었던 때도 부산은행의 가을야구 상품에 회의가 있긴 했다. 이거 괜히 롯데가 포스트시즌에 못 갈걸 알고 이런 영업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사실 내가 가을야구 상품에 가입을 하고 싶었을 때는 "올해는 진짜 다르다"라고 생각했지만, 가입이 좌절됐을 때는 "올해라고 다르겠냐?"라고 생각해 버리면서 아쉬움을 삼켰다.
그런데!!! 올해는 우대 금리를 받아 갈 수 있는 조건을 낮췄다는 거다. 역시 나같이 가을야구 상품에 가입 못한 일부 롯데 오타쿠 같은 팬들 사이에서 “어차피 롯데가 포스트시즌에 갈 확률이 없을 걸 알고 어그로 끌어서 부산은행만 좋은 장사하는 것 아니냐” 같은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이런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올해 부산은행이 반응을 한 것 보니 이전에 7년 동안 가입자들에게 차마 주지 못한(?) 이자가 계속 쌓이니 너무 뻘쭘했나 보다. 마치 영화 극한직업에서 경찰이 위장용으로 차린 치킨집이 너무 장사가 잘 되니 "왜 자꾸 장사가 잘 되는데!!!"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상하게 양심에 가책을 느낀 부산은행은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와 무관하게 롯데가 정규 시즌에서 70승을 달성할 경우 0.05% 포인트 금리를, 80승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0.1% 포인트 금리를 추가 지급하기로 했다. 게다가 상품 이름에도 ‘가을야구’ 이름을 빼고 ‘롯데 자이언츠 승리기원예금’으로 바꿨다. 가을야구라는 흐릿한 확률보다는 승리기원이 더 쉬워 보이긴 한다. 물론 그동안 승리가 안 돼서 가을야구에 못 간 거지만. 어쨌든 운동이 안 풀려서 이름을 바꿔서 잘하는 선수가 있는 것처럼, 금융 상품도 이름을 바꾸니 뭔가 새롭게 보이긴 했다. '와 이 정도면 내가 부산에 살았다면 이번에는 예금 들었겠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러면 올 시즌은 롯데가 70승 넘게 해서 이 사람들이 이자를 더 받았나?'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롯데의 2025년 올해 성적은 66승 6무 72패로 7위였다. 기사를 보니 올해 2834억 원어치 예금에 가입한 롯데 팬들은 최대 4억 2000만 원에 달하는 우대 금리를 받는 데 또 실패했다. 부산은행 고위 관계자는 “손해를 본다 생각하고 내놓는 상품인데, 매년 수익을 올리게 돼 난감하다. 내년엔 자이언츠가 꼭 좋은 성적을 내서 팬들이 많은 이자를 받아 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단다. 이런 기사는 롯데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뭐?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다고? 이건 놀리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부산은행이 기준을 가을야구에서 70승으로 낮춰줬는데도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 사살하는 셈인 거다. 이 기사 하나에서 몇 번이나 능욕을 당하고 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괜히 분노한 마음으로 가을 야구에 못 간 6위 팀의 성적을 봤다. 6위인 KT위즈는 71승 5무 68패. '그래 70승을 넘게 해도 가을야구에 못 가는 거구나. 총 144경기 중에 반타작이면 72승인데 부산은행은 기준을 많이 낮췄구나.' 하면서 스스로 더욱더 비참해지는 찰나, 5위 성적에 눈이 갔다. 5위로 가을야구에 들어간 NC다이노스는 71승 6무 67패였다. 6위와는 무승부와 패배 각각 하나 차이로 가을 야구에 진출하고 못하고 가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부산은행은 가을 야구 상품에서 전체 반타작 승리에서 2승을 빼줬지만, 사실상 가을야구에 근접하는 기준을 세우고 상품을 판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그거라는 소리다. 참 허무하다.
결국 부산은행의 ‘가을야구 예적금’과 ‘승리기원 예적금’은 금융상품이 아니라 롯데 팬들을 위한 ‘희망 고문 상품’이었다. 8년째 추가 이자를 받지 못해도 가입하는 팬들 덕분에 은행은 떼돈을 벌었지만, 정작 팬들에게 남은 것은 승리가 아닌 ‘8년의 (흑)역사’다. 그런데 이게 진짜 ‘롯데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이 상품에 가입할 팬들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이 예적금은 승리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희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도 변함없는 '롯데다움'을 확인하며 위안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팬들에게 주어지는 유일무이한 ‘확정 금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