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선생 마저......

롯빠인생

by 정로생

"자꾸 져봐. 그런 생각이 생기지."


지난 5월, '김장하 장학생'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퇴임 후 어른 김장하 선생을 만나 식사자리에서 한 대화가 엠키타카 유튜브에 공개됐다. 롯데 자이언츠의 오랜 팬인 문형배 전 재판관이 "저는 야구팀을 바꾸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최동원을 좋아했으면 계속 좋아해야지, 중간에 갈아타시면 어떡합니까?"라고 하자 김장하 선생이 답한 말이다.

<영상 캡처 출처: 엠키타카 https://www.youtube.com/watch?v=zZYJ5vMyvkE>
스크린샷 2025-10-23 172400.png <영상 캡처 출처: 엠키타카 https://www.youtube.com/watch?v=zZYJ5vMyvkE>


김장하 선생이 어떤 분인가.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라고 말씀하시며 평생 한약방으로 번 돈을 자신이 아닌 지역사회에 환원하신 분이다. 본인은 자동차도 없는 분이 1983년 사재 100억 원을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세운 뒤 국가에 기부채납했고, 형평운동·여성인권·환경·언론·문화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조건 없는 후원으로 경남 진주 지역공동체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가 세운 남성문화재단은 수많은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을 이끌었으며, 은퇴를 앞둔 2021년 그는 재단을 해산하고 남은 34억 원 전액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하셨다.


<사진 출처: '줬으면 그만이지' 책 표지>

자신의 재산을 대가 없이 나눠주는 이 시대의 참 어른 김장하 선생마저도 롯데 자이언츠를 손절하셨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김장하 선생을 취재해서 나온 책 제목도 <줬으면 그만이지>였잖아요!!! 롯데도 그냥 '평범한 선수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고, 책 제목처럼 롯데에 사랑을 '줬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해 주실 수 없으셨나요? 아니면 비슷하게 '졌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안 되었나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얼마나 좋은 어르신인지 뒤늦게 알게 됐는데, 이렇게 훌륭한 분이 어떻게 롯데를 버리실 수가 있는지 정말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져봐 그런 생각이 생기지’라는 말씀에, 그 감정은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그렇다. 롯데는 그런 팀이다. 이 시대의 참 어른 김장하 선생도 견딜 수 없는 팀. 갈아타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팀. 그게 내가 응원하는 팀이다.



나도 롯데처럼 인생에서 계속 수많은 패배를 당해왔다. 고등학교 때는 시험 때마다 등수가 떨어지고, 야구 때문에(?)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해야 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점수 맞춰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전공에 관심이 없어 방황했고, 헛짓거리만 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정신을 못 차린 건 똑같았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는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롯데는 지고, 또 지고, 또 졌다. 8888577이었다. 이 숫자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롯데 자이언츠의 시즌 최종 성적이다.

<자료 출처: 무려 KBS1>

당시 한국프로야구에는 전체 8개 팀이 있었기 때문에 8위를 4번 연속했다는 건, 꼴찌를 4년 동안 도맡아 했다는 거다. 이 정도면 기네스북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못하는 팀은 전무후무한데 말이다. 그래 맞다. 꼴찌로 치면 우리 롯데 월드클래스 맞다. 진짜 내 인생만큼이나 답 없는 팀이었다. 지독하게 안 풀리는 인생에 환기를 위해서 오늘도 혹시나 하고 야구를 봤지만, 롯데의 월드클래스 패배 야구는 내 인생을 그대로 야구로 바꿔서 보여주는 끔찍한 현실이었다.

1123.png <2002년 꼴찌 당시 부산 사직야구장. 관중들은 개 데리고 자전거도 타고 애들은 축구도 할 만큼 한산했다>

선수도 코칭스태프도, 나처럼 얼마나 이기고 싶었을까. 그들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때로는 헛짓거리도 다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는 건 늘 롯데였고, 나였다. 하도 많이 지니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단단해졌다. 무슨 오기가 생겼달까. ‘그래, 언제까지 계속 지는지 두고 보자.’ 그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20대 때부터 이런저런 패배의 경험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 인생이란 원래 패배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 뒤로 롯데가 저주를 풀고 3, 4위를 하던 중에 나도 살짝 저주가 풀려 취직을 했지만, 롯데가 다시 7위를 할 때 또 저주가 발동돼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지난 일이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롯데가 계속 하위권에 머무는 불완전한 팀이라는 건, 내 인생이 불완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도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니 인생에서의 패배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기본값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누구나 언젠가는 패배하고 넘어지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난다. 그 반복이 바로 삶이다. 삶은 야구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롯데를 응원하는 일은, 그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연습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패배해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그 팀을 통해 배운다.

1761209282.jpg <2025년 올해 롯데의 최종 순위는 7위였다. 사진 출처: mbc>

패배 앞에서 사람이 드러난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패배하는 롯데를 버리지 않았다. 김장하 선생은 패배하는 롯데는 포기했지만, 인생에서 패배에 몰렸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을 이어가게 도왔다. 그들의 삶은 패배를 견디는 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패배 속에서도 품위를 잃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태도다. 롯데 팬으로 산다는 건 단순한 스포츠 취향이 아니다. 매년 반복되는 패배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내고, 또 일어나서 부딪혀보는, 아직 끝나지 않은 9회 말을 살아내는 시민의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 훈련이 끝나는 날, 우리는 비로소 패배는 한순간이며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긴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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