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의 심장에서 롯데를 외치다

롯빠인생

by 정로생

10월의 어느 날, SNS가 ‘10년 전 오늘의 사진’을 띄웠다. 스크린 속 네 명은 잠실야구장 포수석 뒤에서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왼쪽부터 외국에 나가 지금은 보기 힘든 J와 H 부부, 자영업으로 바쁜 ‘하여간 언젠간 된다’의 S형, 그리고 그 옆엔 막 부산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긴 10년 전의 내가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엘지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나만 스머프색 롯데자이언츠 최동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J와 H는 찡그린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S형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만 환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가장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f03c72af-de7e-41be-aad0-6a79010042c5.jpg 지브리 스타일로 사진을 바꿔도 이날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겠다.

롯데가 이겼을 거다.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롯데가 이겼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2015년 10월 그날은 내가 원하던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해 행복했고, 오랜만에 야구장에서 대학교 때 만나던 절친들을 만나 반가웠고, 무엇보다 롯데가 엘지를 이겨서 더 즐거웠던 완벽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무슨 경기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분이 좋아 술이 너무 취해서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이 사진 하나로 10년 전의 그날의 행복을 짐작할 수 있어서 10년 후에도 기분이 좋았다.


야구장에서 포수 뒷좌석은 DMZ(비무장지대)다. 잠실에서는 1루 엘지, 3루 롯데 응원석의 경계. 그 사이엔 양쪽 팬이 반반 섞인다. 격렬한 응원은 금기다. 서로 눈치껏 응원하는 자리, 그게 DMZ다. 그래서 같은 대학교 같은 과 후배인 J, H 부부와 선배인 S형, 그리고 나는 그전에도 종종 야구장을 찾으면 포수 뒷좌석에 앉았다.


또 다른 날, 우리는 잠실야구장 1루 측 외야석에 앉았다. 외야는 제2의 DMZ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외야도 1루와 3루 측 외야가 있는데, 아무래도 1루 측 외야는 1루 내야 응원석이 있는 곳과 연결이 되어 엘지 팬들이 많고, 3루 측 외야는 롯데팬이 많다. 그날은 포수 뒤편 DMZ 표가 없어서 외야에 처음으로 앉은 날이었다. 당연히 주변에는 엘지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롯데 유니폼은 입지 않았지만, 맥주 몇 잔이 들어가자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경기는 9회까지 2대 1, 롯데의 아슬아슬한 리드. 일요일 낮 2시 경기라 해가 너무 강력해 땀이 나고 갈증이 난다. 경기도 한 점차라 목이 계속 탔다. 할 수 없이 맥주를 계속 들이켰다. 애미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 만취 상태에서 내 응원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엘지 타자들이 삼진 당하거나 병살타가 나오면 더 큰소리로 응원했다.


"롯데 잘한다!!! 나이스 피쳐!!! 삼진!!!" 이 정도만 생각나지만 같이 온 S형이 “야야 그만 좀 해”라며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애미애비를 못 알아보게 된 나는 내가 아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음주는 간 손상, 암, 심혈관 질환, 뇌졸중, 치매 등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를 유발하며, 임신 중에는 태아 기형을, 청소년에게는 성장 및 뇌 발달 저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도 나는 술을 너무 마셨기 때문에 이미 내 뇌는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나는 적진의 심장에서 롯데를 더 크게 외쳤다. "나이스 피쳐!!! 병살!!!" 적진의 심장에서 롯데를 외쳤다. 너무 크게 외쳤다. 주변이 잠깐 고요해졌다. 엘지 응원봉이 멈추고, 누군가의 시선이 내 뒷목을 스쳤다.

image.jpg 같이 찍은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꿨는데 생각보다 잘 안 나온다. 아무튼 S형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술 취해서 소리를 질러놓고도 소심한 나는 급 쫄았다. 경기가 끝날 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다. 엘지팬들과 같은 출구로 나가야 한다는 거다. 순간 귀가 쏘머즈처럼 뒤쪽 엘지 팬들이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눈총이, 술 취한 뇌가 확 느꼈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술이 깼다. '무사히 나가야 하는데 어쩌지?' 생각하는 순간, 내 옆의 S형이 뒤돌아서 “죄송합니다, 얘가 취해서요. 제가 자제시키겠습니다"라며 허리를 굽신굽신 했다.


그 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동시에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술이 확 깼다. 후회가 됐다. 내가 왜 그랬지? 형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롯데팬으로서 말하자면, 그 상황에서는 부산 사직야구장이었으면 누군가 나에게 시원하게 욕을 했거나, 먹다 남은 치킨 뼈를 던졌을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엘지팬들은 전혀 화내지 않았고, 형이 대신 사과를 함으로써 오히려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경기는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3루 땅볼이 1루에 송구되고, 경기가 끝나는 순간 나는 "예!"를 소심하게와 대범 하게의 사이로 외치고 S형의 부축을 받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 나는 진심으로 다짐했다. 상대팀 진영에서 이러지 말자. 모두에게 민폐다. 그리고 다시는 술 먹고 응원하지 말자. 지나친 음주는 간 손상, 암, 심혈관 질환, 뇌졸중, 치매 등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를 유발하며, 임신 중에는 태아 기형을, 청소년에게는 성장 및 뇌 발달 저해를 초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핸드폰 속 사진을 본다.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10년 전에도 얼굴 보기 힘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더 뿔뿔이 흩어져 단체톡방에서만 만난다. 그 사진을 오랜만에 단톡방에 올리자 H가 “언제 이렇게 다시 야구장 가냐”라고 했다. 나는 “너희들이 빨리 한국 들어와야지”라며 농담처럼 답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날의 네 자리는 다시 모이기 쉽지 않다는 걸. 그래도 언젠가, 그날처럼 잠실 포수석 뒤쪽에 앉아 다시 맥주잔을 높이 들고 사진 속 같은 포즈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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