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빠인생
제목: 상수야....... (ID: ljs2****)
상수야, 상수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도대체 한 달에 4게임을 말아먹나? 전에 사직에서 두산전엔 니하고 득염이 하고 같이 말아 무가 득염이 패 된 것도 있고, 이리저리 따지니까 니가 말아문게 9게임이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가?!
위 글은 롯데의 마무리가 강상수 투수였던 시절, 롯데자이언츠 팬 게시판의 글 중 하나다. 강상수 님께 사죄의 마음을 표합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2022)>을 보다가 문득, 그 시절 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 강상수 투수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스즈메는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열려있는 문들을 닫고 세상을 대재앙에서 구원한다. 미국에서는 경기 마지막에 팀의 승리를 지켜주는 구원 투수를 클로저(Closer)라고 한다. 팀의 승리를 지켜 경기를 마무리(close)하는 투수다. 하지만, 만년 약체 롯데는 늘 확실한 클로저의 부재로 경기의 문을 닫고 마무리하기가 여고생 스즈메보다 힘들었다. 그런데 그 클로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9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마무리를 맡았던 강상수 투수다.
1999년의 한국프로야구는 한화이글스의 우승과 롯데자이언츠의 준우승으로 세기말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종말이 오듯, 밀레니엄 버그처럼 끝났다. 그 저주 때문일까, 두 팀은 아직도 우승을 못했다. 다음 해인 2000년. 롯데 클로저는 여전히 뭔가 불안한 강상수 투수였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반에서 친한 친구들과 동네에 같은 독서실을 다녔는데 공부가 잘 안 되면 저녁 6시 30분부터 프로야구 라디오에 이어폰 귀에 꽂아 야구 중계방송을 들었다. 사실, 공부는 늘 안 됐으니까 매일 야구를 들었던 셈이다. 내가 재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네. 당시 강상수 선수의 별명은 불상수였다. 마무리 투수를 소방수라고도 한다. 불붙은 상대 타선에 찬물을 끼얹고 진압하는 소방수. 그러니까 강상수 선수의 별명 불상수는 소방수로 등판해 오히려 상대 팀 방망이에 불을 붙여 불show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팬의 글 하나를 더 보자.
제목: 상수의 음모? (ID: jus****)
혹시 계속 불쇼 하면서 타 팀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후 전국구 스타가 돼서 인기투표에서 1위 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야이 XX아. 계속 그래 봐라. 니가 아무리 불쇼 해봤자 올스타 인기 팬투표 1위는 힘들걸! 그 실력이면 성인 나이트에서 불쇼해도 되겠던데. 내가 쌈빡한데 소개시켜 줄까?
25년 전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사건이 있던 날은 여느 때처럼 독서실에서 공부가 안되던 날이었다. 이어폰으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었다. 경기는 9회 초 한 점 차이 롯데의 한 점 리드 상황. 상대 팀은 기억나지 않는다. 드디어 롯데의 최강 클로저 강상수 선수가 등판했다. 나는 각 잡고 심호흡을 하며 불show 관람을 위해 허리를 세우고 앉으려다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 공부하는 줄 알았던 친구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나를 보며 ‘강상수?’하는 입 모양이 ‘망했다’처럼 보였다. 아니, 그게 ‘망했다’였나? 원래부터 안 했지만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재수를 안 하고 좋은 학교에 갔다. 내 재수는 야구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인한 셈이다. 재수 없는 친구. 재수 안 한 친구라는 뜻이다.
강상수 선수는 씩씩하게 볼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그날도 씩씩하게 볼을 던졌다. 그런데 볼만 던졌다. 스트라이크가 들어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볼넷 두 개로 9회 초 무사 1,2루 한 점 차. 상대는 번트를 했다. 하지만, 세기말 저주에 걸린 롯데는 번트를 내줄 수 없었다. 볼넷에 수비 실책까지... 불show의 오프닝이 끝났다. 무사 주자 만루. 흔히들 투수가 주자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것을 두고 장작을 쌓는다고 한다. 장작을 1,2,3루에 다 모은 다음 불상수의 불show, 방화show 본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강상수 투수는 무서운 클로저로 변했다. 투수코치에게 한 소리 거하게 들었기 때문인지, 관중석 술 취한 아재들이 “불상수 불쇼하나”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씩씩하게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두 번째 타자도 삼진!! 마지막 타자도 삼진!!! 나와 친구는 고요한 독서실에서 서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손을 번쩍 쳐들었다. 정말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롯데의 최강 클로저 강상수는 스스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불show를 할 것처럼 자신까지 불태워가며, 폭풍 삼진 세 개로 팀 승리를 지켜냈다. 강상수 선수 생일날 부인이 액땜한다고 소화기를 선물로 줬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날이 그날이 아니었을까.
나는 최근에 강상수 선수를 떠올리며 옛 팬 게시판 다른 글을 다시 봤다.
제목: 상수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김밥장사인기라. (ID: 청소****)
상수 글마 성적을 가마이 보몬 억수로 불가사의한 점이 있는기라. 방어율은 1.93밖에 안 된다 아이가? 그런데 우째 승리는 하나도 엄꼬 3세이브에 4패를 기록하고 있노? 마무리 투수라카는 놈이 우째 세이브숫자보다 패수가 더 많노? 불가사의하재 그쟈? 이거 기네스북에 올리돌라캐야 되는 거 아이가? 아이몬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하나 더 추가시키가 8대 불가사의라꼬 맹글어돌라카던지... 일본말로 김밥을 노리마키라 카는데... 노리마키=노리(김)+마키(말다 뜻의 "마쿠"의 명사형) 상수 니는 인자 자꾸 경기 말아 묵지 말고 사직야구장 앞에 김밥집 채리가 김밥이나 말아라.
이 웃픈 글을 읽다가 무심코 강상수 선수의 기록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클로저 불상수는 2000년 성적이 커리어에서 가장 좋았다. 방어율 1.77, 6승 8패, 23세이브(세이브 4위). 승리를 패배로 바꾼 수가 많아 아쉽긴 해도 기록은 엘리트 클로저였다. 하지만,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늘 하던 대로 씩씩하게 볼을 던지며 불안했지만 성적까지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서 팬들의 기억 속 그는 불상수로 기억됐던 것이었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롯데라는 팀의 정체성이다. 가끔 잘하는 때도 있지만 못했던 시즌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어쩌면 롯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팀이 아니었을까? 내가 강상수 선수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도 꾸역 꾸역이지만 스즈메처럼 문을 닫는 데 성공하고, 세상을 아니 롯데를 구하는 장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안다. 강팀 아니다. 월드클래스 아니다.
야구는 결국 실패의 기록이다. 특히, 롯데의 야구는 이미 실패의 기록이지만 더 격렬한 실패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아직도 지켜보는 팬이 있기에,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기 기원하고 응원하는 팬이 있기에 구단은 존재한다. 스즈메가 문을 닫으며 세상을 구했지만, 기억 속의 롯데의 클로저들은 늘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해 세상을, 팀을 완전하게 구원하지는 못했다. 문틈은 늘 조금씩 열려있었고, 닫혀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것처럼 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팬들의 한숨과 웃음이 되었고, 추억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불상수의 불show가 있던 날에도, 이어폰을 꽂고 그 불이 상대팀 방망이에 옮겨 붙는지 관람했다. 그 뒤로도 불을 끄지 못한 클로저들이 있었고, 그것은 나의 복장을 불태우고 청춘을 불태운 시간이었다. 문단속을 못하더라도 우리는 또다시 롯데의 단단한 문단속을 위해 야구장으로 향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처럼 롯데의 문단속은 늘 미완이다. 그리고 그 미완이야말로,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