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빠인생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우승하는 기분이란 어떤 감정일까? 어제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분이 업된 엘지트윈스 팬 형에게 물어봤다. 형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존나 마음에 안 드는 새끼 뒤지게 후두러팬 기분”
와 이런 기분이라고? 현실에서 일어나면 법적 처벌을 받을 기분. 그 기분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면 느낄 수 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 감정을 위해서 사람들은 수십억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들이 하는 공놀이에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악을 쓴다. 이제 ‘그깟 공놀이’라고 야구팬을 폄하하는 인간들에게 이 감정을 가르쳐주자. 그러면 주변에 야구에 인생을 건 사람을 보아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뭐지? 우승은커녕 시즌 내내 승보다 패가 많은 롯데를 응원하는 나는 우승팀 팬에게 그 ‘존나 마음에 안 드는 새끼’이자, ‘후드러 맞는 새끼’라는 거다. 그러니까 형이 말한 ‘존나 마음에 안 드는 새끼 뒤지게 후두러팬 기분’은 10개 팀 중에 우승한 한 개의 팀 팬들만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이다.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프로야구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꿈과 희망이 이렇게 현실에서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를 후드러패면 감옥에 가지만, 그걸 대신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게 야구라는 뜻이었나? 아무튼 그 우승의 감정을 통역해 준 형이 롯데팬인 내가 우승의 기분까지 물어보는 게 안쓰러웠는지 한 마디를 하는데 말이 안 나왔나 보다. 문자가 이렇게 온다.
“이게 참 뭐라 덕담을 하기도 힘들구먼”
“금방 우승할 거라고 하면 넘 성의 없고”
“몇 년 기다리라고 하면 것도 참 못할 짓이고”
그렇다. 롯데자이언츠라는 이름 자체가 야구팬들끼리도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다. 결국 형이 찾아낸 최선의 위로는 이 말이었다.
“하여간 언젠간 된다”
본인이 응원하는 팀이 우승한 직후에 쾌락을 뒤로하고 롯데팬을 위로하는 형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언젠가 우승’이라니. 화를 낼 수도 기뻐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올해는 한화 이글스의 준우승으로 한국야구가 끝났다. 한화 팬은 아니지만 내가 한화를 언급하는 건 외롭지 않아서다. 10월 31일, 한화는 LG트윈스에 종합성적 1승 4패로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아직 21세기에 KBO에서 우승하지 못한 팀은 여전히 롯데자이언츠와 한화이글스로, 둘은 내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기 직전까지만 그 슬픈 타이틀을 지켜낼 것이다.(매년 나는 내년에는 롯데가 우승할 거라고 기대하니까) 물론, 한화가 올해 26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바람에 21세기에 한국시리즈에 가지 못한 유일한 팀이라는 타이틀만은 롯데자이언츠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기록까지는 나 같은 사람 말고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두 팀 다 우승이 없다.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도 생각보다 덜 외롭다. 나만 잘못된 건 아닌 것 같다는 안도감이 있다.
‘조류 동맹’. 한화와 롯데가 같이 하위권에서 허덕일 때, 두 팀을 이렇게 불렀다. 한화이글스에서 이글스가 독수리고 롯데자이언츠에서 자이언츠지만, 롯데는 응원가로 부르는 ‘부산 갈매기’라는 대표 노래가 있다. 그래서 초반에 롯데자이언츠 팬 커뮤니티 이름도 ‘갈매기 마당’이었다. 심지어 팀 엠블럼에도 거인은 없지만, 갈매기가 있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독수리와 갈매기의 동맹이라 ‘조류 동맹’인 것이다. 동맹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둘 다 지방 구단이고, 성적보다는 정으로 버텨온 팬들이 많아 체념에 익숙하다. 그렇게 둘 다 드럽게 야구를 못한다. 그래서 한화와 롯데 팬은 서로를 잘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는 팀들이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을 서로는 느껴왔다. 그런데 이번에 중반까지 두 팀 다 갑자기 잘 나가면서 플레오프에서 만날 확률이 엄청 높아졌다. 드디어 조류 동맹이 포스트시즌에서 만나겠구나 했지만 롯데만 떨어졌고, 한화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조류 동맹의 힘인가? 롯데도 올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5 울산-KBO Fall League 결승전에서 NC에게 12대 1로 패하면서 준우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결승전이라면 보통 가장 잘하는 두 팀이 붙는 경기다. 그런데 12대 1이라는 스코어를 보면 롯데가 그냥 후드려 맞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 정도면 어떻게 결승전에 올라갔는지가 더 미스터리다. 롯데보다 못하는 팀이 많았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해도 잘하는 팀이라면 한 경기에 12점을 주기는 프로 수준의 경기에서는 참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걸 또 해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울산-KBO Fall League는 기존에 주전 선수가 아닌,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국제 교류 활성화를 위한 대회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KIA, 삼성, LG, 롯데, NC, 고양, 독립리그 올스타, 대학 선발팀 등 8개 팀이, 해외에서는 호주 멜버른 에이시스, 일본 독립리그 선발팀, 중국 CBA 소속 장쑤 휴즈홀쓰가 참가했다. 이 국제적인 경기 결승에서 롯데는 12대 1이라는 스코어로 진 것이다. 스코어를 본 후에 나는 차라리 우리나라 팀만 나왔으면, 차라리 텔레비전 중계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비관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롯데는 준우승팀이다. 한화는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고, 롯데는 울산-KBO Fall League, 이름이 길수록 뭔가 더 수치스럽지만, 이 국제 야구 대회에서 롯데는 당당하게 준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그래서 준우승의 마음? 그런 건 없다. 사실 오늘 하루 그냥 후드려 맞았다는 비참한 마음 밖에 없다.
올해도 나는 여지없이 우승의 마음 통역에 실패했다. 하지만 매년 그 문장을 새로 배우는 과정이, 어쩌면 ‘팬’이라는 단어의 진짜 뜻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는 올해 우승팀 팬이 가르쳐준 문장, “존나 마음에 안 드는 새끼 뒤지게 후두러팬 기분”과 “하여간 언젠간 된다”가 남아 있다. 그 말은 반복할수록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게 하는 믿음의 문장이다. 우승의 마음 통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 문장을 배우며, 언젠가 롯데 팬만의 문법이 완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