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는 물보다 진한 것
며칠 전 한집 남자와 밥을 먹다 친정엄마 생각에 울컥했다.
올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느닷없이 생각났다.
이 남자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번 터진 감정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한참 후 나갔더니 이 남자는 내가 울었는지도 모른 채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있다.
마누라는 쳐다도 안 본다.
미운 마음에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우리 엄마 생각도 안 나냐? 어떻게 한 집 살던 장모가 떠나고 없는데 슬퍼하지도 않냐?
이 남자 너무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장모님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슬퍼하냐? 울 엄마도 아닌데.
-당신 엄마는 보고 싶기는 하냐?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리 엄마는 항상, 늘 보고 싶지.
내 기억 속 그날은 이렇다.
초저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야간일을 하던 남편에게 전화했다.
-내가 지금 간다고 죽은 엄마가 살아나냐? 일 마치고 갈란다.
일 년 정도 투병하셨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말투였다.
-지금 일이 대수예요?, 당장 와요, 빨리 시골 가야지.
나는 날을 꼬박 새웠는데 이 남자는 일을 다 하고 왔다.
가는 중에도 나는 허둥지둥 정신이 없는데 이 남자는 너무 덤덤했다.
장례식 첫날 남편의 우는 모습을 잠깐 보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엄마를 생각하며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운 마음을 내비친 적도 없다.
그랬던 이 남자가 자기 엄마는 항상, 늘 보고 싶단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솔직히 그리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시댁인 공주에는 많아야 1년에 두어 번 명절에나 갔기에 정이 들지도 않았을뿐더러 어머니가 잔정이 없는 양반이라 콩 한쪽도 챙겨주실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그리 살갑게 지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말수가 워낙 없는 분인지라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양반이었다.
손자 둘을 안고 가도 그다지 반기는 기색이 없이 왔니? 하면 끝이었다.
가을걷이로 콩을 두드리면서 갈 때 좀 싸주시겠지 해도 빈손이었고, 햇빛에 꼬들하게 말라가는 곶감도 먹어보라 권하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몇 개 따먹으면서 갈 때 좀 싸주시겠지 했는데 빈손으로 와야 했다.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며느리는 나뿐이라 비교 대상도 없어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내가 싫어서라기보다 그냥 그런 분이었다.
결혼 후 몇 년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시골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염장이가 다섯이나 되는 아들놈들을 놔두고 나에게 시어머니 세수를 시켜드리라 했다.
알코올솜으로 어머니 얼굴을 닦으라는데 만지는 것이 께름칙했다.
성의 없이 한 손으로 대충 씻겨드리기에는 보고 있는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의 눈이 의식되었다.
할 수 없이 한 손으로 어머니 얼굴을 잡고 다른 손으로 씻겨드리는데 영혼이 사라진 육체의 냉기가 손을 통해 전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소름이었다.
-이 미친 염장이, 아들이 이리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시키고 지랄이냐.
어머니 얼굴을 씻기면서 나는 속으로 그 염장이를 얼마나 씹었는지 모른다.
이놈의 염장이가 닦아도 닦아도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1~2분이었을 텐데 내게는 한 시간보다 길었다.
1월이라 날도 추웠지만 그 소름 돋는 냉기는 어머니 장례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내 엄마였으면 그랬겠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시어머니였으니 그랬겠지.
그 속도 모르고 남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를 둘이나 보고 가실 수 있게 해 드렸다며 내게 고마워했다.
사위는 장모를 자기 엄마 대하듯 했다.
존댓말과 반말을 적당히 섞어 가며 살갑게 굴었고 마누라가 친정을 가거나 장모가 자기 집에 왔다 가는 날에는 없는 형편에도 두둑한 용돈을 챙겨드렸다.
하루에 두세 번 장모에게 전화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장모는 사위의 전화가 귀찮다면서도 은근히 좋아했다.
복지관친구들이나 교회 권사님들 앞에서 사위의 전화를 자랑하듯 받곤 했다.
장모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별난 사위의 자상함을 부러워했다.
사위는 장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홉 달을 함께 살면서 아들노릇을 했다.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 구경도 시켜 드리고 날 좋은 날 손잡고 산책도 다니며 다정하게 챙겼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울 엄마도 아닌데 아직까지 슬퍼하겠냐는 말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내가 그리운 만큼, 내가 애달픈 만큼 이 남자도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다.
이 남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그리 슬퍼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우리 엄마랑 30년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장모님~, 장모님~ 하면서 날마다 전화할 때는 언제고 엄마가 없다고 인제 쌩까냐?
장모랑 수다 떨며 날밤까지 샜으면서 의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서운한 마음은 며칠이면 족하다.
이 남자는 사위노릇을 넘치게 했고, 나의 며느리노릇은 충분치 못했다.
양가에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부부의 나이가 며느리를 볼 때가 되었다.
내 엄마, 네 엄마도 이제 그리움으로만 기억되는 세월을 살았다.
애달픈 마음은 각자의 몫이지만 부부로 엮인 세월 동안 서로의 부모로 인한 추억은 남아있다
배우자의 부모는 피를 나누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남남이다,
그러나 서로의 부모와 함께 한 세월의 흔적은 묘한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내 부모에 대한 애틋함 어느 한쪽에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아침 무단히 엄마 생각에 눈물바람에 콧물까지 흘렸다.
한바탕 쏟아내고 막 진정시키는데 큰아들 전화가 왔다.
아들의 첫마디가
-무슨 일 있어요?, 울었어요?
단번에 알아차린다.
남남인 한집 남자와는 다르다.
아들은 내 목소리만 듣고도 금세 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