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7
2 박 3 일 일정으로,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호캉스’를 떠났다. 부산 해운대 해변의 P호텔은 탁 트인 바다를 향해 나 있는 테라스를 갖춘 객실과 더불어,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는 수영장과 야외 스파로 유명한 곳이다. 지난 해, 내 차를 새로 뽑았을 때 자동차 회사에서 선물로 준 호텔 패키지 상품에다 1박을 더하고 방을 업그레이드 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쓸 수 있는 상품이었지만 결혼 기념일에 맞춰 쓸 요량으로 아껴 놓았던 거다. 호사를 누려볼 참이었다.
부산은 여러 번 다녀본 곳이기에 2 박 3 일 내내 호텔 안에서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체크인을 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호텔방 테라스에 놓인 의자에 몸을 맡겼다. 해운대의 잔잔한 파도와 마린시티의 야경을 보며, 남편과 도란도란 나누는 옛 이야기와 한 잔의 와인으로 봄날의 밤은 깊어갔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귀차니즘’이 발동했다. 전날 밤에 내일은 수영장과 스파에 가자고 계획을 세웠었지만 둘만의 계획이니 바꾸기도 쉬웠다. 그냥 쉽시다에 합의했다. 아점 먹고 쉬고, 저녁 먹고 또 쉬었다. 쉬러 왔으니 쉬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다음날 아침, 수영장과 스파에 못 가본 미련이 남았다. 스파가 문을 여는 아침 8 시부터 한 시간 반 정도만 스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체크아웃 준비를 하기로 했다.
스파에는 해수에 각각의 향과 색을 풀어 넣은 탕이 여러 개 있었다. 스파에 몸을 담그는 순간, '진즉에 올 걸….' 어제의 귀차니즘을 후회했다. 공기는 시원하고 아침 햇살은 은은하며 스파는 따뜻하게 온 몸을 감쌌다. 각 탕의 온도와 향은 다 달랐다.
7 살 때 얻은 장애로 다리가 불편한 나는 굽이 높은 신발이 없으면 걷기가 아주 힘들다. 각 탕을 옮겨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매번 탕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었다가 나와서 다시 신고 또 다른 탕에 들어갈 때마다 그걸 반복해야 했다. 내 집에서야 현관에 놓아 둔 의자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하면 되지만 내 집이 아닌 곳에서는 나는 매번 ‘신데렐라’가 된다. 남편이 내 앞에서 몸을 낮추고 앉아서 내 신발을 벗겨 주고 신겨 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그는 다른 탕에 드나들 때마다 내 신발을 신겨주고 벗겨주었다. 모든 탕을 섭렵(?)한 후에 탕 밖으로 나오자 몸이 서늘해졌다. 서둘러 가운을 입고 스파의 구석진 곳에 있는 사우나로 들어가서 몸을 데웠다. 사우나에는 우리 부부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문을 열기에 쳐다보니 유니폼을 입은, 스파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가 생수 한 병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두 분이 너무 보기에 좋아서 제가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진짜 너무 보기 좋아요.”
그는 우리 모습을 눈여겨 지켜보았던 게다. 우리를 보는 이는 그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안 보는 척 곁눈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지팡이 짚은 아내를 정성으로 돌보는 남편과 몸이 불편한데도 늘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나보다. 실상 나의 환한 웃음은 남편의 살뜰한 보살핌에서 기인한 거다.
남편에게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이유가 없다고 답한다.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유가 없는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거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의 휴대폰에 나를 ‘내 짝’이라고 저장해두었다. 그는 내 짝이기에, 나와 나란히 함께 걷기 위해 기꺼이 느리고 어눌하며 삐걱거리는 내 발걸음에 그의 보폭과 속도를 맞춘다. 동행은 사랑이다.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호텔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창가 자리로 예약을 해두었다. 해운대 해변과 나란한 방향으로 놓인 식탁과 의자는, 한 쪽 의자 뒤로는 마린시티와 오륙도가 보이고 반대쪽에 앉으면 미포항이 보이는 자리였다. 남편이 나를 조금 더 풍경이 좋은 마린시티가 보이는 쪽으로 앉으랬다. 항상 좋은 건 내게 양보하는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오늘은 당신이 더 좋은 자리에 앉아요.”
“아니, 당신이 거기 앉아요. 나는 더 좋은 걸 볼 수 있으니까.”
“더 좋은 거요? 뭐가 보이는데요?”
“난 당신을 보는 게 그 어떤 경치를 보는 거보다 더 좋아요.”
나는 아마도 전생에 지구를 구한 게다.
그가 나의 연약함을 돌보며 이리도 귀히 여겨주니, 나는 내 머리카락을 베어내어 그의 신발을 삼아 바쳐야 할까보다.